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87
트로츠키의 의구심 가득한 물음에 마이어는 선문답 같은 대답을 내놓는다.
“아직도 이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늘을 보면서 염원합니다. 하늘을 보면서 한탄하고,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길 바라며 기도를 올리죠.
그곳을 인간이 밟아 보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대단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정복하는 하늘, 인간이 발자국을 찍어 낸 달과 화성과 다른 천체들.
태양은 아폴론이 이끄는 마차가 아니고, 화성은 군신(軍神)의 궁전이 아니다. 고작해 봐야 불타는 수소와 차갑게 식은 암석 덩어리일 뿐.
“그 모든 환상을 걷어 내고서, 외치는 겁니다.
저 지구는 너무나도 작구나! 외로운 인간과 위태로운 생명들의 유일한 집이라 여겨졌던 저곳은, 이제 너무나도 작다!”
“하! 자네 시인이 다 되었구만.”
트로츠키는 폐를 향해 담배 연기를 밀어 넣고 나서 다시 캐묻는다.
“그럴 때까지 얼마나 걸릴 거라 보나?”
“40년, 아니면 50년.”
그렇게 장담하는 마이어의 얼굴은 밝았고, 트로츠키도 간만에 기침하는 일 없이 호쾌하게 웃을 수 있었다.
…즐거운 기억이었다.
그 뒤로 몇 년이 흐르고 나서야 조용한 일상이 찾아왔다.
트로츠키는 모종을 옮겨 심으며 가끔 마이어의 호언장담을 떠올렸다.
“…우주는 모르겠고.”
나는 지금 여기다 채소 씨앗을 뿌릴 뿐이지만.
* * *
한낮인데도 졸음이 몰려오는 시간이 많아진다. 독서를 하려고 해도 힘에 부쳐서 펼친 책을 가슴에 엎어 놓고 잠에 든다.
시야가 흐려지는 일이 잦다. 시력이 나빠지니 저술 활동도 아들이나 지인들에게 구술하는 내용에 대한 필사를 부탁했다.
오랫동안 걷기가 힘이 든다. 바퀴 달린 정원용 의자나 지팡이의 도움을 받아야지 겨우 텃밭을 일굴 수 있다.
숨이 쉽게 가빠 온다.
사람의 몸은 불멸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기능을 다한다.
그 유효 기간의 끝자락에서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도 대단한 인내심을 요했다.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두지.”
“예, 아버지.”
“얼마나, 얼마나 쓰여졌지?”
“한 4분의 3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넉넉하겠군. 너도… 돌아가거라. 오늘은 주말인데 쉬어야지.”
아들을 돌려보낸 뒤, 트로츠키는 아들이 받아 적어 가던 원고 뭉치를 슬며시 손에 쥐어 본다.
그 두께와 무게가 상당했다. 나중에 블레어한테 첨삭을 맡길 예정이다. 약간 반푼이 같은 친구지만 그래도 작가이니.
―텅. 텅. 텅.
여름이 끝나 가고 가을이 다가오는 날씨였다. 꽤나 강해진 바람이 유리창을 꾸준히 두드렸다. 허접한 잠금장치는 힘겹게 버티고 있을 뿐이다.
산작약과 수국은 어느새 이미 져 버리고 분홍색 코스모스가 화사하게 피어날 때였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눈은 제철을 맞은 가을꽃들보다는, 꽃잎에서 힘이 다해 가는 여름철의 꽃들과 여름의 짙은 진녹색 속에서 쇠락을 준비하는 저 낙엽수들을 향했다.
움직임.
꽃잎과 이파리가 그리는 하강의 곡선.
서서히 땅바닥으로 내려앉는….
갑자기 졸음이 쏟아진다.
모든 것이 끝날 때가 가까웠다.
…모든 것을….
‘곧 끝난다.’
순간의 깨달음이 벼락처럼 닥쳐온다.
끝이 수마(睡魔)와 같이, 오래 쌓아 두었던 피로감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이 자신에게 얼마간의 유예를 허락하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다음 행동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급히 책상 앞에 쓰러지듯 앉고서는 방금 아들이 필사해 주었던 원고를 뒤집는다.
아직, 뒷장은 쓰이지 않았다. 하얀 눈밭처럼 깨끗한 종이가 처음으로 다가올 발자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쥐고 첫 획을 그으려다 고민한다.
‘…러시아어로? 영어로? 아니면 조선어로?’
러시아어로 쓰려고 했는데, 막상 지난 수십 년 동안 러시아어로 집필할 일이 없었더니 손이 가지 않는다. 트로츠키는 조선어로 작성하기로 하고, 언문 글줄을 써 내려간다.
“의식을 깨친 이래… 나는 수십 년의 생애를 혁명가로서 살아왔다.”
쓸 내용이 있으면 아들에게 구술해 주던 게 벌써 습관으로 붙었는지, 트로츠키는 자신이 쓸 내용을 조용히 입안에서 읊었다.
시간이 없다.
힘이 빠져나가는 손아귀에서 펜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써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앞으로 쓸 문장을 위해서는 한 번의 질문이 필요했다.
넌 혁명가인가?
‘그렇다.’
―‘…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이것이 내게 던지는 정말 마지막 질문이고, 또 대답이다.
나는 이다음 순간부터는 기나긴 자문자답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테니.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나의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젊은 시절보다도 더욱 확고해졌다.’
몸에서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만큼, 기묘한 열정과 고양감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심장 박동은 제대로 들리지 않는데 오히려 펜에 들어가는 손힘은 더욱 강건해진 것만 같다.
펜끝이 덜덜 떨린다.
그다음 문장… 그다음 문장은….
나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 주는, 나의 모든 인생을 사람들 앞에 결말짓는 글이다.
그런데 이렇게 글씨는 괴발개발에 앞으로의 내용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니….
고양감과 흥분감이 컸던 만큼 트로츠키의 마음속에 들어찬 초조감 역시 부풀어 오른다. 이 귀중한 1초를, 마지막 수분을 낭비할 수는 없지 않은가!
―텅. 텅. 텅. 텅. 텅. 텅….
―쾅!
갑작스러운 굉음에 고개를 돌리자, 기어코 가을바람이 창문을 뚫어 낸 듯싶었다. 터덜거리는 창문 사이로 공기가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방 안으로 진입하였다.
먼지 쌓인 온기가 가시고 생기를 불어넣는 가을철의 쌀쌀함이 몸을 간지럽힌다.
두꺼운 창문이 흐려 보이게 만들었던 태양광과 지상의 색채가 트로츠키의 망막으로 달려들어 온다.
벽 아래로 잔디밭은 연초록빛으로 빛난다. 그 위로는 수풀과 관목의 옅은 녹색이. 다시 그 위로 솟은 교목들은 보다 짙고 깊은 초록으로.
한 갈래의 색깔임에도 결코 모두 같지 않다. 어린아이 손등처럼 부드러운 연녹색과 완고한 노파의 눈동자처럼 차분한 진녹색이 서로 팽팽하게 긴장하면서, 또 서로 어울린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본 트로츠키는 시선을 다시 위로 올린다.
하늘은… 투명했다.
그 사이로 심장처럼 태양이 박혀 있다.
트로츠키는 마지막 구절을 결정했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마음껏 삶을 향유하게 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홍위 동지, 잘 있으시오.’
기분 좋은 오후의 햇살이 그의 뒤통수를 따뜻하게 데우고, 바람이 목덜미를 식힌다.
졸음이 쏟아진다.
이제 잠에 들 시간이야.
….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 * *
“장례는 어떻게 할까요?”
“….”
관에 들어 있는 남자는 작고 초라했다.
누구도 관 속의 이 남자가 역사를 움직였던 혁명가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엠버밍해서 보존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RMS 켈틱 1호를 영묘로 만드는 것이죠.”
“…스탈린이 레닌한테 했던 것처럼?”
“….”
죽은 트로츠키가 일어나서 비명을 질러도 모자랄 트라우마 자극이다. 곧바로 기각.
고인의 유서에도 장례 방법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던 만큼 조선과 원산, 만주에서 모여든 각계 인사들에게 이는 커다란 고민거리가 되었다.
“애초에 트로츠키 동지와 다른 소위 ‘의용군’들이 원산으로 오게 된 계기가 곧 스페인이 아닙니까? 그러니 만큼 스페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영토에다 매장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우선, 스페인 공화국은 포르투갈 지역일세. 게다가 너무 외딴곳이라 참배객들이 찾아가기는 곤란하지 않겠나? 유가족들이 들러 보기에도 좋지 않을 걸세.”
“원산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시작이 곧 바다에서 오지 않았습니까? 화장한 뒤에 바다에 뿌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괜찮게 들리기는 하네. 허나 트로츠키 동지가 생전에 은퇴할 때 켈틱 1호를 떠나면서 ‘난 자유다! 개자식들아!’라고 외쳤다 들었네. 그런 동지의 유해를 바다로 다시 들이밀어 버리면… 과연 고인이 반길지 나는 모르겠군.”
다시 돌이켜 보니 트로츠키는, 꽤나 까다로웠던 사람이다.
생전에 지금 나오는 안들을 물어보았더라면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게 최선인가? 정 안 되겠으면 내가 직접 내 장례 계획을 짜 오겠네. 별로 보기는 안 좋을 것 같다만은….” 같은 소리와 함께 퇴짜를 놓았으리라.
아니, 트로츠키가 굳이 살아서 이 광경을 보고 있지 않더라도,
“대군주 동지, 오늘 나온 안은 이게 거의 다입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나왔던 안들도 전부 기각하셨는데 언제까지나 인민 위원들이나 예부의 관원들이 여기에 잡혀 있을 수는….”
“있네.”
이홍위가 대신 그 까다로움을 이어받았으니.
“짐은 말일세.”
이홍위가 한참 동안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서 그 테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회의에 참가했던 다른 이들은 입을 다물었다.
조선의 대군주가 오랫동안 숱한 문헌과 서류를 들여다보다 시력이 악화되었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저 안경이, 이홍위가 트로츠키의 것을 물려받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트로츠키 동지에게 좋은 죽음을 주고 싶네.”
아무 의미도 없을지 모르겠지만.
트로츠키도 유서에서 남겼고 이홍위 자신 또한 그렇지만, 둘 모두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가 아니었던가?
이미 그의 신경이 모든 동작을 멈추었을 때, 그의 심장이 움직이기를 그만두었을 때 이미 이홍위가 알던 트로츠키라는 사람의 정신은 저 멀리 무(無)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 껍데기만 남은 육신에도 감정과 의미를 싣는 것이 인간이다.
이홍위의 표정을 본 이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 역시 트로츠키의 유서를 읽었다. 소련인이라면 모두가 아마 신문에서 그 전문을 읽었으리라.
이 자리의 모두가 유서의 마지막 문장이 이홍위를 향한 작별 인사였음을 기억했다.
저 슬픔과 애도는 트로츠키의 친족들조차도 누릴 수 없을 그만의 특권이었다. 혁명가이기도 했던 그의 부인과 아들 모두 이홍위에게 결정권을 허락한 것이고.
분위기가 조심스러워진 가운데, 이홍위는 천천히 기획안들을 하나씩 훑고, 넘겼다.
매장 후 묘역의 공원화… 기각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특출날 것도 없다. 보류.
트로츠키 동지 모양의 모형을 세운 뒤 그를 황금으로 만든 의자에 안치… 볼 것도 없이 기각.
한 장, 한 장씩 넘겨지던 종잇장은 어느새 마지막 몇 장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오늘도 별 소득 없이 회의를 마치게 되나 싶었던 관원들은 한숨을 겨우 눌러 담았다.
이홍위는 머리를 싸매다가, 벌떡 일어난다. 피로감에 쩔어 있던 관원들 역시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킨다.
“내일 당장 원산으로 한번 가 보겠네. 그곳에서 생각을 정리해 보도록 하지. 뭔가 좋은 생각이 날 수도 있지 않겠나?”
가져다 댈 명목은 많다. 고인을 다시 위로하기 위하여, 고인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기 위하여 등등….
지금 소련 곳곳에서 추모 열풍이 불고 있는 만큼, 트로츠키와 각별한 사이였던 이홍위가 원산에 방문한다 하더라도 문제없었다.
그렇게 졸속에 가깝게 처리된 조선국 대군주의 원산행.
흔들리는 차창에 턱을 괸 채, 이홍위는 동해안으로 향했다.
당연히 도착하자마자 환영 인파나 이런저런 행사의 물결에 휩쓸려야 했으나, 이홍위는 그 강행군을 기꺼이 통과하고서 트로츠키가 생활하던 공간들을 직접 탐방했다.
처음 둘러본 것은 RMS 켈틱 1호의 객실, 좁다고는 할 수 없으나 넓다고 하기에도 그저 그랬던 그곳에는 간단한 책상과 응접용 협탁, 침대와 옷장이 가구의 전부였다.
그가 어릴 적부터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가끔 켈틱 1호에서 철야를 하는 중간중간에 쉬실 때 빼고는 쓰지 않아서… 내부는 많이 바뀌지 않았을 겁니다.”
에티앙블을 비롯해 트로츠키와 함께했던 비서들이 그를 안내했다.
그다음 공간은, 가족들과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을 원산 인민 위원장 관저.
트로츠키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했고, 한편으론 트로츠키 개인의 공간이 아닌 원산의 국가 원수를 위한 공적인 공간이라 왠지 이홍위로서는 정감이 가질 않았다.
“…새 가구들이군.”
“아, 네. 그렇습니다. 트로츠키 동지가 임기 때 사용하시던 집기들은 전부 치워 놓았지요.”
“어디로 말인가?”
“당연히 트로츠키 동지의 사저지요.”
에티앙블의 그 말에 일순간 이홍위의 몸이 굳는다.
“그렇다면… 트로츠키 동지가 서거한 곳 말이로군.”
그의 얼굴에 잠시 괴로움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트로츠키의 비서들 역시 심상찮은 낌새를 느꼈는지 말을 아낀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홍위의 말은 의외였다.
“지금 바로 사저로 출발해도 되겠나? 세도바 동지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그곳을 정말 보고 싶으네.”
어쩔 줄 몰라 하는 비서들을 뚫고서 이홍위는 빠르게 전화를 연결한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노인 여성의 목소리와 대화를 나눈 뒤, 그는 발걸음을 바삐 옮긴다. 나머지는 그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마차 몇 대가 빠르게 원산 도심을 빠져나가서는 오솔길로 접어든다. 도로의 포장 상태가 점점 허술해지고, 그에 따라 승차감도 나빠진다.
이홍위의 손이 떨린다.
어느새 도달한 트로츠키의 사저.
트로츠키의 부인 나탈리아 세도바와 아들 세르게이 세도프가 나와서 그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고인의 방문이 열렸을 때에야,
이홍위는 익숙한 감각을 느꼈다.
손때가 타서 반질반질해진 책상을 쓰다듬었고, 마찬가지로 트로츠키의 필기 습관대로 촉이 휘어 있는 만년필을 쥐어 보았다.
옷장 안쪽의 퀘퀘한 먼지 냄새를 맡아 보기도 하고, 창턱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구경하였다.
“…정말 그 사람이 살던 곳이 맞기는 한가 보군.”
“뒤쪽에도 공간이 있습니다. 지금 손님이 한창 거닐고 있는데….”
“세도바 동지, 실례가 아니라면 혹시 그곳도 볼 수 있겠소?”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중년이 된 트로츠키의 아들이 이끄는 대로 따르다 보니 이내 허접한 오두막이 보인다. 그곳을 지나쳐, 걸음을 재촉하니….
“대군주… 폐하?”
“블레어 동지.”
들었던 말 그대로 손님이 있었다.
목장갑을 낀 채로, 조심스럽게 당근의 뿌리를 매만지는 에릭 아서 블레어.
이홍위는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도울 일은 없겠소?”
“아, 아니… 그….”
“부디 말해 주시오.”
“그… 그렇다면, 저기에 있는 여분의 호미를 가지고 와서 옆의 감자를 캐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오.”
일국의 군주가 직접 팔을 걷어붙여 가며 손에 흙을 묻히는데 어떤 수행원도, 경호병도 말리지를 못한다.
이홍위의 굳은 표정을 보고서 누구도 감히 말을 붙일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저 이홍위는 눈앞의 감자가 다이아몬드라도 되는 듯 소중하게 캐어서는 바구니에 옮겨 담을 뿐이었다.
이내 바구니가 묵직해지자 블레어가 이끄는 대로 그는 방금 보았던 허름한 오두막에 따라 들어간다.
그곳의 탁자에 이홍위는 감자를 내려놓는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블레어가 겨우 말했다.
“…그곳이 트로츠키 동지가 유서를 써냈던 곳입니다.”
“….”
이홍위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트로츠키가 생애 마지막으로 봤을 광경을, 그 역시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녹음의 푸른색과 하늘의 연청색.
그 사이로 떠다니는 먼지와 꽃가루, 천적이 없는 것을 알고 게으르게 날아다니는 새들.
“그러니까, 여기서 내게 작별 인사를 했다는 것이로군.”
블레어는 대답하려다가, 지금이 입을 다물어야 하는 순간임을 깨달았다.
이홍위는 홀린 듯 창가를 향해 다가선다. 트로츠키가 직접 가꿨던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가를 향해서.
“이… 광경을 보고서 인생이 아름답다고 말했다는 게로군.”
“….”
이홍위의 눈가에 물방울이 맺힌다. 그 사실을 이홍위 스스로만 몰랐다.
“블레어 동지.”
“예, 폐하.”
“그대가 보기에는 어떻소? 이곳에 수목장을 하는 거요.”
이홍위는 머릿속으로 어떤 장면을 그렸다.
트로츠키가 지금의 자신처럼 창문을 열어 바깥의 청명한 공기를 달콤하단 듯 빨아 마신다.
트로츠키가 나무를 가지치고, 꽃을 꺾어 햇볕이 드는 곳에다 잘 말려 놓고 책갈피로 쓴다.
트로츠키가….
이 광경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곳에 그의 유해를 화장하여 뿌리고 그 위에 나무를 심는 거요.”
지금의 자신처럼.
“그러면… 그는 자신이 가꿔 온 정원의 일부가 될 수 있겠지. 그리고 이곳을 정원으로 만들어 인민들이 찾을 수 있도록….”
이 사저는 곧 박물관으로 삼을 예정이라 들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유가족도 이사를 준비 중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이곳을 추모 공간으로 삼아도 괜찮지 않겠소?”
그가 가꾸고 사랑한 공간에서 그를 기억하도록. 그가 걸었던 길을 사람들이 걷고, 그가 만진 흙을 만질 수 있도록.
블레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좋은 생각이군요.”
블레어의 동의에 감사를 표하듯 목례하며, 이홍위는 다시 정원을 내다보았다. 창틀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세게 움켜쥐고는 크게 한숨을 쉰다.
블레어는 북받친 이홍위가 뭐라 읊조리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열두 살부터 아비가 없었소. 그런데….”
아니다. 쓸모없는 말들일 뿐이다. 나 자신을 위한 넋두리들은 접어 두자.
고개를 저은 이홍위는 한마디만을 남겼다.
“…잘 가시오.”
유서를 읽고 꽤나 오래 걸린 대답이었다.
대답처럼 바람이 불어오고, 날아든 꽃잎이 부드럽게 이홍위의 뺨을 훑고 지나간다.
돌아보자 그 꽃잎은 이내 저 멀리 날아가서는
점차 멀어지고
하나의 점으로 작아졌다.
작별이었다.
* * *
/ 작가의 말
이번 편으로 본편이 완결되었습니다. 비정기적으로 외전을 올릴 생각이지만, 준비해 둔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가 된 듯싶습니다.
지난 12월 20일에 첫 화를 올렸으니, 어느새 10개월 동안 이 이야기를 위해 울고 웃었다는 사실을 막 깨달았습니다.
첫 소설, 첫 독자, 첫 후원, 첫 응원. 저희에게 많은 첫 번째를 안겨 준 소설이었습니다.
저희의 첫 독자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10개월 동안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야 1질 작가가 되려는 참이지만, 그래도 작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만큼 이렇게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외전으로, 그리고 차기작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언제, 어디서 이 글을 읽으시든 즐겁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2022.09.23. 간다와 왼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