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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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하운은 벽을 두드린 탓에 벌겋게 된 손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런 통증이라도 있어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부어오른 손으로 천천히 주먹을 쥐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그동안 먼지만 쌓였을 뿐 그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이곳은 그가 어릴 적 선물로 받았던 저택이었다.
***
10살이 되던 해, 하운은 자신이 왕궁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재능이 넘치는 둘째 왕자는 왕실의 가장 큰 위험 요소였으니까.
하운의 재능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왕궁은 어수선해졌다. 왕세자인 레이안 대신 둘째인 하운을 왕세자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이 점점 강해졌다.
국왕 부부는 고심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였지만 그 전에 왕국의 평안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렇기에 무서울 정도로 보석술사의 재능이 넘치는 둘째를 첫째의 곁에서, 사람들의 눈에서 떨어트려 놓기로 했다.
저택에 도착했을 때 하운은 자신이 받은 생일 선물이 부모가 마련해 준 도피처이자 감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운은 밤이 되자 시종들의 눈을 피해 혼자서 근처 언덕으로 올라갔다.
‘강한 보석의 힘을 억지로 끌어내려 하다 실패하면 더 이상 보석을 쓸 수 없게 된다고 했어.’
어린 하운은 다른 보석술사들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언덕으로 향하는 하운의 품 안에는 카르디아 왕실이 소유하고 있는 보석 중 그 힘이 강하기로는 몇 손가락 안에 들 만뢰(萬雷)의 카넬리언이 있었다.
언덕의 정상에 도착한 하운은 곧바로 카넬리언의 힘을 개방했다. 평온했던 밀밭 위의 맑은 하늘에 순식간에 번개 구름이 생겨났다. 밤이었건만 램프가 필요하지 않았다. 셀 수 없이 내리치는 번개가 하늘을 낮처럼 환하게 물들였다. 하운은 자신이 이끌어 낸 보석의 힘을 보며 주저앉았다.
이래서, 이런 일을 할 수 있어서 내가 왕궁에 있으면 안 되는구나.
하운은 한참이나 하늘을 바라보다 고개를 떨구었다.
‘실패야.’
한계에 부딪혀 힘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었는데.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하운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보석술사로서의 재능이 사라지면 다시 왕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다시 부모님과 형과 함께 살 수 있을 거라고.
‘돌아가자.’
하지만 그가 보석의 힘을 거두려는 순간 보석이 반짝이며 하운의 부름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카넬리언이 오랜만에 자신의 힘을 있는 힘껏 개방한 탓에 흥분을 한 것이었다. 그사이 번개가 밀밭 여기저기에 떨어지며 불이 붙었다.
“……!”
하운은 놀라 보석을 진정시켜 보려고 했지만 날뛰는 카넬리언은 그사이에도 밀밭 여기저기에 벼락을 떨어트리며 불을 키웠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하운은 열 살의 소년이었다. 그렇기에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당황하고 말았다. 점점 커지는 번개 구름과 불타는 밀밭을 보면서 하운은 입술을 물었다. 이 일이 보고되면 그나마 수도와 가까운 이 저택에서도 떠나야 할 것이다. 왕궁에서 더욱 먼 곳으로 보내지겠지.
‘그건 싫어.’
하운은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든 저 불을 꺼야 했다. 그가 밀밭을 향해 내달리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네놈이냐!”
갑자기 큰소리와 함께 하운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굴렀다. 뒤에서 온 누군가가 그대로 하운의 등을 발로 걷어찼기 때문이었다. 데굴데굴 언덕을 구르다 겨우 멈춘 하운은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내 영지에 잘도 이런 짓을 했구나! 조금만 기다려, 불 끄고 나면 목을 따 줄 테니까! 어린애라고 봐줄 것 같아?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 인지 알겠군요. 조금 있다 이야기합시다, 둘째 왕자님.”
“당신은… 호슨 공작?”
“네, 접니다.”
“그대가 왜 여기에 있나?”
“여기 제 영지입니다. 왕자님이야말로 왜 여기에…. 아, 저 저택에 어쩐지 갑자기 요즘 마차가 드나든다 했더니 혹시 거기로 이사 오셨습니까?”
호슨 공작은 짜증 난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더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물의 힘을 가진 보석은 안 갖고 나왔는데….”
그 말에 하운은 품 안에 있던 하우윈을 꺼냈다. 힘은 남아 있건만 몇 주째 제 말을 듣지 않아 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보석.
“그거 폭우의 하우윈 맞습니까? 이리 주십시오.”
하운의 보석을 보자마자 호슨 공작은 눈을 번뜩이더니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 보석을 가져갔다. 그녀는 하우윈을 향해 말했다.
“야, 불 좀 꺼라.”
무척이나 성의 없는 심드렁한 부름이었는데도 하우윈은 곧바로 제 힘을 개방했다. 제 부름에는 들은 척도 안 하던 하우윈이 곧바로 얌전히 힘을 개방하는 모습에 하운은 말을 잃었다.
하늘에서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폭우가 쏟아졌다. 밀밭에 붙었던 불들은 빠르게 꺼졌다.
하운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자 호슨 공작은 하운에게 다가와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카넬리언을 빼앗았다.
“이건 압수입니다.”
“뭐?”
압수라니? 저건 왕실의 물건이다. 하운이 놀라 벌떡 일어서자 이번에는 호슨 공작의 주먹이 날아왔다. 하운은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그 주먹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최강의 보석술사고 공작이라 해도 왕자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하운은 처음은 당황스러움에 두 번째로는 아픔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때렸어?”
“왕자라서 봐준 줄 아십시오. 안 그랬으면 이미 연못 바닥에 처박았을 겁니다.”
왕궁에서는 언제나 깍듯이 예의를 차렸던 호슨 공작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험한 소리를 하면서 자신에게 주먹을 휘두를 것이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도 때린 적 없는데!
“하지만 그건 왕궁의 보석인데….”
“왕자님하고 저하고만 입 다물면 누가 안다고요? 싫으면 이것도 가져가 버릴 겁니다?”
호슨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려 있던 폭우의 하우윈을 흔들었다. 놀란 하운이 일어나 돌려 달라 매달리자 공작은 피식 웃으며 그것을 하운에게 던졌다. 아슬아슬하게 받아 낸 하우윈을 꼭 쥐자 하우윈이 부르르 떠는 것이 느껴졌다. 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었지만 하운은 보석이 뭐라 말하는지 짐작이 갔다.
‘살려 줘! 무서워!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라고 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
‘그러고 보니 호슨 공작이 만뢰의 카넬리언을 돌려주지 않았군.’
그렇다면 카넬리언 역시 보석의 방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보석의 방을 열어야 할 이유가 하나 늘어났음을 되새기며 하운은 몸을 돌렸다.
급하게 떠났던 곳이기에 대부분의 물건들이 남아 있었다. 수건과 욕실의 용품들도. 옷도 남아있었지만 리엘라가 입기에는 작은 것들이라 차라리 수건 재질로 된 욕실 가운이 낫겠다 싶어서 갖다주었는데.
“하아….”
하운은 다시 한숨을 쉬며 죄 없는 벽을 두드렸다.
갖다줄 때까지만 해도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젖은 옷을 빨리 말리고 체온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 오래된 장작도 찾아내 불을 붙였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들어온 리엘라를 보자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리엘라가 자신의 옷, 그것도 목욕 가운을 입고 있는 것을 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니, 정확히는 한번 새하얗게 되더니 머릿속이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 그림 속에는 왜 리엘라가 제 가운을 입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러니까 같은 저택에 살고 있고, 그래서….
하운은 얼굴에 확 몰려오는 열을 느끼며 허겁지겁 방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제가 상상력이 이렇게 풍부한 인간인지 몰랐다.
어쨌거나 찾아온다고 말하고 나왔으니 뭔가는 들고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근처의 방을 뒤지자 곱게 개어져 있는 여름 이불이 나왔다. 천들로 잘 감싸져 있었기에 벌레 먹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먼지 냄새가 나는 것이 좀 신경 쓰이긴 했지만 모닥불 앞에 앉으려면 뭐라도 좋으니 바닥에 깔 것이 필요했다.
이불을 들고 돌아온 하운은 문을 열기 전 잠시 멈춰 심호흡을 했다.
자꾸 떠오르는 이상한 잡생각에 스스로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폭우를 피하고 있는 이 상황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정신 차려.’
리엘라는 제가 받아야 할 것들을 가져간 여자다. 빛나는 꽃 때문이기도 하고 보석의 방을 위해서라도 당분간만 제가 보호해야 할 여자. 이래저래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오히려 귀찮은 일만 가져오고 있는 여자인데 왜 이렇게 헛생각을 하게 되는 것일까.
‘안 되겠어.’
이건 분명 제가 다른 사람들을 많이 접하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꼭 리엘라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이렇게 정신 나간 것처럼 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럴 것이다. 그래야 했다.
‘침착하자.’
하운은 일부러 발소리를 낸 다음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리엘라는 소파에 앉아 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하운에게 질문했다.
“저기, 혹시 이 저택은 대공님의 저택인 건가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알려 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가 놀라자 리엘라는 제 가운 앞섶을 들어 보였다. 푸른색으로 놓인 자수는 하운이라는 이름이었다. 아, 이름이 있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하운은 다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리엘라가 앞섶을 들어 올린 탓에 조금 더 리엘라의 목덜미가 보였다.
신이시여.
신을 믿지 않는 하운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신을 찾았다. 이상하게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몇 년째 감기 한 번 걸리지 않는 몸이었는데 지금은 얼굴이 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열기가 몰렸다.
하운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돌린 곳에는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거기서 타고 있는 장작은 밑에서 찾은 오래된 것과 이곳에 들어올 때 자신이 발로 차 부쉈던 나무판들이었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못질했었는데 이렇게 쉽게 부수게 될 줄이야.
하운은 활활 타고 있는 나무판을 조용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그럼 여기서 호슨 공작님을 처음 만나신 건가요?”
리엘라는 그렇게 물어보면서 살짝 입을 가렸다. 조금 전부터 자꾸 하품이 나왔다. 젖었다가 보송보송한 옷으로 갈아입고 불이 지펴진 벽난로 앞에 앉아 있으려니 어쩐지 몸이 노곤하게 늘어지는 것 같았다.
어차피 보석이 진정하고 옷이 마를 때까지 할 일도 없기에 하운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처음에는 조금 머뭇거리던 하운은 곧 뭔가 포기한 듯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운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신기했고 그가 오래전 이곳에서 호슨 공작과의 만남을 가졌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전에도 왕궁에서 만난 적은 있지만 제대로 이야기를 한 것을 첫 만남으로 생각한다면 그때가 처음이었군.”
하운은 호슨 공작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찾아와 가르쳐 준다는 핑계로 자신을 여러 번 굴렸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필요 이상으로 주먹과 발이 자주 나온 것 같은데?
‘그건 말 안 하는 편이 좋겠군.’
‘역시 공작님! 마음 써 주고 계신 거였어!’라는 눈빛으로 호슨 공작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리엘라를 보니, 그런 면은 말하지 않는 것이 리엘라의 환상을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제가 말하면 호슨 공작을 깎아내리려 한다 오해할 수도 있었고.
한참이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하운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과거의 기억이 리엘라에게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처럼 들리는 모양이었다. 하운의 말 하나하나에 놀라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하며, 리엘라는 계속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호슨 공작은 원탁회의에 가는 걸 누구보다 귀찮아했는데….”
장작을 한 번씩 뒤집으면서 이야기를 하던 하운은 들려오던 대답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
뒤를 돌아보자 소파에 몸을 기댄 채 그대로 잠들어 있는 리엘라의 모습이 보였다.
하운은 소리가 나지 않게 장작들을 뒤집은 다음 앞에 걸어 둔 리엘라의 옷이 잘 마르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리엘라가 일어나는 기색은 없었다.
한참이나 그런 그녀를 보고 있던 하운은 결심했다는 듯 입술을 물더니 상의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