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72
76
하운은 눈을 떴다.
화려한 그림과 장식, 들어오는 햇살을 가려 주는 두꺼운 커튼, 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이불과 폭신한 베개. 귀한 손님을 위해 준비된 아름다운 공작저의 방의 모습이었다.
벌써 이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음에도 여전히 깨어날 때마다 낯설었다.
철이 들기도 전에 전쟁터로 갔던 탓일까. 그는 여전히 베개 대신 이용하는 군용 배낭과 이불이라 부르기 민망한 거친 천, 딱딱한 흙바닥이 친숙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언제나 낯선 하늘과 주변을 마주했기에 하운에게 익숙한 곳이란 없었다.
“…….”
평소라면 눈을 뜨자마자 일어나 씻으러 갔겠지만 오늘따라 하운은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팔을 뻗어 옆자리를 더듬었다. 여러 명이 누워도 넉넉할 침대 위에 잡히는 것은 구김 없는 시트뿐이었다,
“꿈이었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하운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주변에 사람이 가득했다. 그것만으로도 하운은 이미 지친 상태였다. 가만히 있어도 들려오는 말들이 그를 짓눌렀다. 더 강한 재능, 동생, 위험, 반역…. 자신은 감히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말들을 낯선 자들을 쉽게 입에 올렸다. 그 자리를 뜨고 싶었는데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방의 구석에 쪼그려 앉아 귀를 막는 것뿐이었다. 듣기 싫다.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어디로 가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여기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다 누군가 제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싫지 않았다.
‘누구지?’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다가온 사람은 그에게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다. 움직일 수 없다고 했더니 웃으면서 손을 잡고 이끌었다.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던 몸이 너무도 가볍게 따라 끌려갔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그의 손을 잡은 사람은 어딘가를 보더니 부럽다고 했다.
‘뭐가 부럽다는 거지?’
고개를 들어보니 아름다운 정원에 식사가 차려진 테이블이 보였다. 그와 함께 걸었던 사람은 잡았던 손을 놓더니 테이블로 다가가 앉았다. 그러더니 그에게 어서 와서 앉으라 말했다. 하운은 고개를 저었다. 안락하고 평화로운 곳. 어쩐지 이런 곳은 그가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운이 고개를 젓자 그를 데려왔던 사람이 말했다.
그렇구나. 어쩔 수 없네. 그럼 다른 사람이랑 있어야겠어.
그러자 뒤에서 누군가가 나와 그를 데려온 사람 옆에 앉았다.
“…루시안?”
갑자기 나타난 사람은 루시안이었다. 그의 등장에 하운은 짜증이 났다. 왜 저놈을 불러?
하지만 그가 어떻든 두 사람은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이 억울하고 화가 나 하운은 저를 데려온 사람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았다. 한참이나 앉아 있었지만 여전히 저를 보지 않는 것이 서운해 자신도 봐 달라 손을 뻗은 순간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하운은 한참이나 팔짱을 낀 채 생각하다 결론을 내렸다.
“개꿈이군.”
꿈에 루시안이 보였으니 개꿈이 맞다.
깔끔하게 결론을 내린 그는 서둘러 일어나 평소와 같이 움직였다. 씻고, 입었으니 이제는 먹으러 갈 차례였다.
‘오늘은 좀 더 열심히 움직여야겠군.’
좀 더 두 번째 문에 붙어 있어도 모자랄 시간에 리엘라에게 끌려 루시안네 홈 파티를 가다니. 오늘은 하루 종일 문에 달라붙어서 문을 열 수 있는 나머지 조건이 무엇인지 마저 알아낼 생각이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하운은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다들 어디 간 거지?’
평소라면 복도를 지나다니고 있을 하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정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잠들어 있던 사이 다들 사라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식당으로 바로 가려던 하운은 발걸음을 돌렸다. 이상하리만큼 적막한 이유를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 텐데.’
그랬으면 당장 네아부터가 시끄러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지?
그는 누구라도 사람을 찾으려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하운은 걸음을 멈췄다. 사람들이 전부 그곳에 있었다. 하인들도, 변호사들도, 네아도, 리엘라도.
도대체 여기 전부 다 모여 있는 이유가 뭐지? 의아함을 느낀 그가 한 걸음 걸어가려 할 때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그들의 손에는 다들 신문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신경 쓰였다.
“뭐야, 다들 무슨 일이지?”
그의 말에 다들 우물쭈물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 네가 말하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저런단 말인가. 그가 사람들에게 다가가려 한 순간 네아가 외쳤다.
“야, 너 결혼해?”
“…결혼?”
갑자기 하운은 목 뒤가 뻐근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개꿈을 꾼 것도 모자라 아침에 처음 듣는 게 이런 개소리라니.
‘도대체 어디서 그런 헛소리가 나온 거지?’
그러다 신문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저기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운은 리엘라에게 걸어가 그녀의 손에 있는 신문을 잡아 들어 올렸다. 가볍게 그녀에게서 신문을 가져간 하운은 1면을 보았다.
“공주의 남자?”
뜬금없는 타이틀이었다. 공주의 남자라니. 뭐 하는 놈인가 이름이나 보자, 하며 그는 타이틀 아래에 있는 이름을 보았다.
“하운 아렐 펜드래건…?”
그가 무척이나 잘 아는 이름이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그가 26년이나 쓰던 제 이름이었으니까. 그가 어이없어하며 신문과 사람들을 번갈아 보다 리엘라와 시선이 마주쳤다. 리엘라는 정말로 놀란 얼굴이었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네가? 결혼? 이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대공님… 이게 사실인가요?”
그럴 리가 있나. 애초에 계속 공작저에서 보석의 방을 여는 일에만 매달렸는데! 게다가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리엘라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억울해 하운이 날카롭게 내뱉고 말았다.
“사실이면, 왜?”
아니, 이게 아니라고. 하운이 제 입을 때려 버리려고 하는 그때 리엘라가 말했다.
“사실이라면… 예쁜 사랑 하시라구요.”
잠시 후, 공작저의 사람들은 비키라 소리치며 미친 듯이 말을 몰고 나가는 하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복도를 걷는 하운의 모습에 왕궁의 사람들은 재빨리 옆으로 물러서서 인사를 했다. 그들의 손에도 하나같이 신문이 들려 있었다. 대신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그냥 청소를 하는 시종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신문을 든 채 그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공작저의 사람들과 똑같아 하운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결혼?’
공작저의 사람들이 태평하게 그 소리를 하며 저에게 축하한다는 소릴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특히나 리엘라가 자신에게 뭐랬더라? 예쁜 사랑 하세요? ‘예쁜’은 뭐고 ‘사랑’은 또 뭔데?
확실한 건 둘 다 자신을 표현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집무실로 갔다. 집무실 앞을 지키던 시종은 하운이 다가오니 제가 보던 신문을 슬그머니 뒤로 숨긴 다음 절도 있는 인사를 했다.
“폐하는 안에 계신가?”
“네. 오셨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시종이 안으로 들어가자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안의 소리가 들려왔다.
“하운이 왔대! 신문들 숨겨요!”
“어차피 대공께서 알고 오신 거 아닙니까?”
레이안과 대신들의 목소리에 하운은 주름 잡힌 미간을 눌렀다. 여기도 죄다 그 신문 기사를 읽고 있었던 모양이군.
“들어오시랍니다.”
농담으로라도 공주의 남자라 부르는 놈이 있으면 목을 따 버리겠다는 다짐을 하며 하운은 안으로 들어갔다.
“앗, 공주의 남자다!”
“…….”
목을 따겠다 결심은 했는데 차마 제 형의 목은 딸 수 없었다.
“폐하!”
“농담이야.”
쾅쾅 발소리가 날 정도로 다가온 하운은 레이안의 책상에 신문을 촥 펼치며 소리 질렀다.
“농담이요? 이게 지금 농담할 일입니까! 갑자기 제가 왜 테티아의 공주와 천년의 사랑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심지어 오래된 인연이라 하고! 게다가 바람둥이? 이것들 다 잡아 죽여도 됩니까?”
소리치는 하운의 얼굴이 붉어지며 목에 핏대가 섰다. 워낙에 저를 트집 잡으려는 눈이 많기에 지금까지 하운은 레이안의 앞에서는 공손하게 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레이안의 책상 위에 펼쳐 준 신문의 기사 내용이 보였다.
공주의 남자, 하운 아렐 팬드래건! 최고의 보석술사 하운 대공은 사실 바람둥이? 테티아의 샤를로테 엘 프리아니 공주, 오랜 비밀 연애를 밝히며 청혼을 하러 오겠다는 사실을 밝혀
처음부터 끝까지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소리칠 기사였다. 헤드라인의 말만으로도 목 뒤를 잡고 싶은데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그와 샤를로테 공주가 사실은 오래된 연인이었다느니, 하지만 비밀 연애였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 번도 샤를로테 공주를 보여 주지 않아 아무도 몰랐다느니, 위험한 북부 전선에 타국의 주요 인물을 멋대로 불러들였다느니 등등….
당장이라도 분노로 활활 타오를 것 같은 하운의 모습에 레이안은 손짓을 해 대신들을 나가게 했다. 둘만 남게 되자 레이안이 말했다.
“미리 말하는데 우리 쪽에서 나가게 한 기사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문제인 겁니다.”
하운은 씹어 먹을 듯 신문을 노려보았다. 이것은 카르디아 왕실이 주도한 일이 아니다. 분명 샤를로테 공주 쪽에서 주도한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대대적으로 하루에 터트린 것을 보면 그쪽은 진심으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잖아도 널 불러서 물어보려고 했다. 샤를로테 공주와 만난 적이 있냐?”
“비공식적으로 세 번 있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접촉했지?”
“북부 전선이 테티아와의 국경 사이에 있다 보니 가끔 플레노트가 부리던 몬스터들이 정신 지배가 풀리면 그쪽으로 도주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테티아 측에서 몬스터들을 사살하기 위해 온 사람이 샤를로테 공주였습니다.”
샤를로테 엘 프리아니. 사람들에게는 테티아의 공주님으로 불리며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여자는 하운에게는 영리한 보석술사로 기억되고 있는 사람이었다.
카르디아와 달리 테티아의 왕실은 그다지 보석술사의 피가 흐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테티아는 왕실의 보석보다는 일반 보석술사들이 소유한 보석이 훨씬 많았고, 왕실은 그런 보석술사들의 눈치를 보는 상태였다.
그런 테티아의 왕실에 갑자기 등장한 보석술사가 샤를로테였다. 보석술사들의 눈치를 보던 테티아 왕실은 샤를로테에게 모든 힘을 실어 주었고 덕분에 그녀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더냐?”
“사람들은 그녀를 꽃 한 송이도 못 꺾을 것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무척이나 확실하게 목표를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플레노트를 잘 피해 갔지요.”
드래곤을 상대하는 것은 제게 넘긴 채, 테티아로 넘어오는 잡다한 몬스터들은 그녀의 보석 앞에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그런 모습에 나름대로 익숙해진 하운조차도 테티아가 남긴 흔적을 봤을 때 잠시 놀랄 정도의 처참함이었다.
“그런 샤를로테 공주가 널 노리고 오는 것 같구나.”
레이안은 신문을 팔락거리며 넘기다 팔짱을 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