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47
을 베었다.
내일 저녁까지 이틀동안 기방에서 뒹굴어야 한다.
가규는 이틀 동안 기방에서 창기와 뒹군 것 같다. 낮에는
도전방에서 전낭을 갈취해간 자를 뒤쫓고 밤에는 창기와 몸을
섞고. 오래 걸리지는 않은 것 같다. 내일 저녁까지면 단 이
틀. 연고(緣故)라고는 아무도 없는 해남도에서 사람 등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도곤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한편으로는 다른 것도 기다렸다.
“출부복령산에 당하고 난 뒤,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잘릴
지도 모르지. 가규장군이 그랬을 지도 모르고.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지만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해. 해 줄 수
있나?”
침상에 누워있는 화문은 적엽명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해드리고 말고요.”
화문은 눈을 감은 채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가규는 힘들게 뛰어다녔지만 자신은 그럴 필요가 없다.
호귀 류가 거느린 노노가 창기들은 인생의 밑바닥에서 살아
남은 끈질긴 잡초들. 그 중에서도 특히 ‘걸물’이라며 소개해
준 다섯 여자는 이미 살인 경험이 있었다.
그녀들이 가규의 행적을 조사해서 말해주고, 화문의 손에서
떠난 전낭을 되돌려준다.
화문은…… 죽음의 마수가 다가오기만 기다리면 된다.
정작 그 때가 오면 노노가의 창기들은 힘을 못 쓸지도 모른
다. 그저 멀리서 멀거니 바라보기만 할 지도 모른다. 틀림없
이 그럴 것이다. 가규를 죽인 자가 해남파 무인이든, 관원이
든, 우화대원이든 노노가 창기들이 나서서 제지할 수 있는 곳
은 아무 곳도 없다.
그녀들은 적엽명에게 전서(傳書)를 띄우는 것으로 끝이다.
적엽명이 전서를 받는다 해도 그는 제 시간에 달려와 도와
줄 수 없으리라.
“우정을 미끼로 죽음의 땅에 들어서라면 벗이 아니지. 사귀
는 이번 일에 끌어들일 수 없다. 호귀에게도 죽음을 각오한
여자 대여섯 명만 보내달라고 말했을 뿐이야. 우리 세 사람의
힘으로 모든 일을 끝내야 한다. 나는 우화를 만난다. 다음은
장문인을 먼저 만날지 경주자사를 먼저 만날지 상황을 봐가면
서 움직여야겠지. 가규의 행동을 답습하는 일은 분명히 효과
가 있겠지만 가규의 뒤를 따르기 십상이다.”
천하의 맹장, 화문도 요즘에 들어와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
를 실감한다. 도전방에서 술을 한 잔씩 마실 때마다 이것이
이승에서 먹는 마지막 술…… 이라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들
곤 한다. 약기운에 절어 고개를 떨굴 때는 과연 내일 밝은 세
상을 맞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가기도 한다.
자신이 죽임을 당한다면 홍암장군은 자신이 죽은 곳에서부
터 자신이 만났던 모든 사람을 집중적으로 파고들 것이다. 그
리고 해결해 내리라. 이번 일을.
화문이 반은 꿈결 속에, 반은 현실에 머물러 있을 때, 방문
이 스르륵 열렸다.
화문은 눈을 뜨지 않았다.
코에 익은 물분 냄새.
어느 덧 화문은 수많은 창기들의 뇌살적인 살 냄새 속에서
취채의 살 냄새만을 골라낼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신은 내가 본 남자들 중에 가장 근사해.”
취채의 유혹은 평범했다.
“부담 갖지 마. 내가 좋아서 준거니까. 어차피 많은 새끼들
이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몸인걸 뭐.”
첫 관계를 가진 후, 취채는 사랑스런 표정으로 전혀 사랑스
럽지 않은 말을 했다.
“잠자는 거야?”
화문은 눈을 뜨지 않았다.
낯익은 감촉은 망설이지 않고 옷을 벗겨냈다. 상의부터 천
천히, 천천히……
“이상해. 하루하루가 절박해. 내일이면 당신을 못 볼 것 같
아서 불…… 안해.”
취채의 달착지근하면서도 부드러운 입술이 포개져왔다.
그제야 화문은 팔을 둘러 취채의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허
리를 휘감았다.
3
팔 월 초순.
적엽명은 비가로 돌아왔다.
“전가주가 직접 나섰다는 풍문입니다. 좁은 땅덩이에서 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준비를 하시는 게……”
황함사귀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자, 적엽명은 뜻밖에도 순순
히 비가로 방향을 돌렸다.
으릉……! 으르릉……!
늑대 염왕은 오랜만에 만난 주인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저 혼자 떨어지게 될까봐 잠시라도 적엽명의 모습
이 보이지 않으면 이빨을 곤두세우고 으르렁거린다. 그럴 때
면 아무리 친근했던 사람이라도 염왕 근처에 다가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적엽명의 모습이 다시 보이면 언제 이
빨을 곤두세웠냐는 듯이 얌전해지곤 한다. 다른 사람은 근처
에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갈기를 곤두세웠던 놈이 발길로 걷어
차고, 털을 잡아 뽑아도 ‘께갱!’하고 죽는시늉만 할 뿐 대들
생각은 하지 못한다.
“헤헤! 유소저, 자칫하면 부군 뺏기겠어?”
“호호! 벌써 뺏겼는데요?”
“그런가?”
“그럼요.”
염왕이 적엽명 다음으로 따르는 사람은 유소청과 취영이었
다.
대체적으로 맹수는 여자에 포악한 법이다. 맹수뿐만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도 여자는 얕잡아 보고 달려들기
일쑤다.
목소리에 힘이 없거나, 겁을 집어먹었다고 판단하거나, 행
동이 어딘가 불안정하면 어김없이 달려든다.
염왕은 그런 면에서 특이했다.
유소청과 취영에게 달려들기는 했지만 그것은 얕잡아 보고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친근한 사람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형태
였다.
요즘, 적엽명은 날이 밝기 무섭게 백사구에 오른다.
전가주와의 일전을 앞두고, 마음 속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거둬내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의 허리에는 두 자루의 검이 매달려 있다.
파랑검과 묵검.
조곡 노인은 적엽명이 비가로 돌아오기도 전에 파랑검을 보
내왔다. 다른 일은 다 제쳐두고 파랑검부터 갈았던 모양이다.
적엽명은 두 검을 다 소지했다.
어느 검 하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검들이니.
두 검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길이와 무게는 비슷하지만 파랑검은 자갈밭 속에 묻혀 있어
도 제 빛을 뿜어내는 보옥과 같은 검이고, 묵검은 평범한 검
들 속에 섞어놓아도 단번에 골라낼 정도로 볼품 없는 검이다.
하지만 두 검이 모두 끈끈한 숨결을 토해낸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무인을 끌어당기는 힘.
그것이 파랑검과 묵검에는 있다.
으릉! 끄르릉……!
염왕은 유소청이 던져준 염소고기 한 덩이를 천천히 씹어먹
는다.
유소청과 취영은 그늘진 나무 아래서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
를 만끽했다.
“많이 부드러워진 것 같아.”
“그렇죠?”
“응.”
“그런데 정작 본인은 너무 날카로워졌다고 생각하고 있어
요.”
“나야 무공을 잘 모르니까……”
“아니에요.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부드러워진 것
같이 보이는 데 무공을 아는 사람이 보면 어떻겠어요. 많이
부드러워졌어요.”
“그런데 건이는 왜 날카로워졌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부드러워진 것은 확실한데……”
취영은 무공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도
무공을 익히기는 했으되 기본 공부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의 무가들이 그렇듯이 비가도 여인에게는 가전무공을 가르치
지 않는다. 여자란 나이가 차면 남편을 따라 출가하는 법. 가
전무공인들 새어나가지 말란 보장이 어디 있으랴.
그런 취영이 보기에도 적엽명은 많이 부드러웠다.
무인의 기도는 행동에서 나타난다.
부드러워진 말투와 얼굴에 웃음기가 보인다는 것은 검 또한
유(柔)해졌음을 말해준다.
두 여인은 적엽명을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 파랑검을 들고 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태양을
향해 곧바로 검을 겨누고 있다.
어제는 묵검을 들었다.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해 버린 듯한 지루한 적막.
그러나 움직이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검의 방향도 틀어지고 있으니까.
두 여인은 적엽명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 이것이 비가의 독문 무공인 일장검법을 수련하는 것이
라고는 더더욱 몰랐다. 적엽명은 진기를 끌어올리지 않는다.
검기도 쏘아내지 않는다. 초식의 변화도 없다. 누가 보더라도
무공을 수련하고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하기야 해남오지 중
일인인 유소청이 모르고 있다면 말해 무엇하랴.
직접 따라해 봐도 소용없다.
일장검법의 검결을 알지 못하면 지루한 생각만 들어 중도에
서 검을 접고 만다. 신체에 고통이 오고, 정신이 가물거릴 무
렵 백이면 백 검을 접는다.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할 기회가
없는 셈이다.
적엽명은 무엇 때문에 자신을 학대하는 것일까?
유소청과 취영이 보기에는 그랬다.
적엽명은 지금 자신을 학대하고 있다.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 이유는 짐작이 간다. 근래 자신을 괴롭히던 정신적인
번뇌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것일 게다. 마음 속의 묶은 때를
씻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다.
끄르릉……!
염소고기 한 덩이를 다 먹어치운 염왕이 두 여인에게 어슬
렁거리며 다가왔다.
요즘 들어 염왕은 제법 맹수다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고기를 충분히 먹어서인지 털에 윤기가 흐르고, 눈빛도 날
카롭게 되돌아왔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길러진 듯한 심성,
겁이 많은 것만은 고칠 수 없었고, 발을 절룩거리는 것도 어
쩔 수 없었다.
“야! 얌전히 먹으랬잖아! 너 언제까지 칠칠맞게 먹을 거
야!”
취영이 늑대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입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
다.
“호호! 짐승은 주인을 닮는데요. 주인을 닮아서 그렇지 왜
그렇겠어요?”
유소청은 아무 의미 없이 말했다.
그러나 취영에게는 비수로 가슴을 찌르는 듯 아픈 말이었
다.
적엽명은 밥다운 밥을 먹어보지 못했다. 목부들과 같은 곳
에서 식은 밥을 먹으며 자랐다. 보주의 아들이기는 하나 가족
들로부터 냉대를 받는 적엽명.
목부들은 눈치에 민감하다. 그들은 가족들이 적엽명을 대하
는 태도에서 무엇을 원하는 지 알았고, 가족들이 원하는 바를
실천에 옮겼다.
구박, 천대.
적엽명이 황담색마의 종부에 깊이 간여하기 전까지는 그야
말로 지옥 같은 생활이었다.
익히지도 않은 생풀에 소금만 뿌린 것을 반찬이라고 먹었
다. 덕분에 비건은 늘 설사에 시달렸다. 비 오는 날 빗속에서
설은 찬밥을 먹는 모습도 보았다. 밥 먹고 있는 것을 뒤에서
걷어차 말똥 속에 처박히는 것도…… 죽에다가 양념이라면서
파리 서너 마리 집어넣는 것은 구박 축에 들지도 못했다.
“나는…… 말야. 건이에게 참 못할 짓을 많이 했어.”
“……?”
“훗! 건이가 말 안 해? 지겨워서 못살겠다고?”
“아뇨.”
취영은 적엽명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숨김없이 말해주었다.
아버지라고 불렀다가 엉덩이가 찢어지도록 맞은 일, 형이라
고 불렀다가 목검으로 인사불성이 되도록 두들겨 맞은 일, 누
나라고 불렀다가 대나무에 묶인 채 광에서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못 마신 일……
뜨거운 눈물이 취영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유소청도 울었다.
두 다리를 오므리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지만 들
먹이는 어깨가 울고 있음을 말해준다.
적엽명은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비가주의 둘째 아들은 의외로 소박
하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만큼 꾸밈이 없었다.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진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첩의 자식, 여족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는 것을 알
았을 때도 그가 비가에서 어떻게 생활하는 지는 신경 쓰지 못
했다. 그가 여족의 피를 받았다는 자체가 큰 충격이었으니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취영은 유소청의 손을 잡아주었다.
“행복할게요. 걱정 마세요.”
유소청도 취영의 손을 마주 잡았다.
적엽명의 수련은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질 무렵에야 끝났다.
그는 이제 연공이 끝난 다음에도 혼절하지 않았다. 스스로
검을 접고, 약 반 각 동안 운공조식을 행하고 나면 아침녘에
보여주었던 모습 그대로 활기찬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청천수 비해는 적엽명의 내력(內力)이 증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청천수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 역시 적엽
명이 이룩한 경지는 다가서지 못했기 때문에 일장검법을 구성
(九成) 이상 익힌 후에 나타나는 변화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
다.
일장검법을 구성이나 익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검인십로(劍人十路)라 일컬어지는 검인의 길
중에서 아홉 번째 단계인 반본환원(返本還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검법을 팔 성 익혔다, 구성 익혔다 하는 것은 검법 속에 내
포된 진수(眞髓)를 터득한 정도를 말하며, 검인십로는 깨달음
의 경지를 말한다. 그래서 검인십로 중 육로 이상은 쉽게 의
미를 깨달을 수 없는 선학적(禪學的) 글귀로 이루어져 있다.
적엽명의 검이 어느 정도인가?
그것을 정확히 알만한 사람이 비가에는 없었다.
“하루 종일…… 지겹지 않아?”
“풋! 하루 종일 태양만 쳐다보는 사람은 지겹지 않고?”
“나야……”
적엽명은 어색한 듯 피식 웃었다.
“진기는 어때? 고르게 돌아?”
“……?”
적엽명은 언뜻 이해하지 못했다. 유소청이 무슨 의미로 이
런 말을 하는 것일까. 진기가 어떠냐고 묻는 것은 몸의 상태
가 어떠냐고 묻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 다음 말은
으레 한 가지다.
‘그럼 최상의 날개를 펼쳐 보자구.’
이는 도전이다.
“말해봐. 괜찮아?”
“소청.”
“괜찮은 모양이네? 그럼 최상의 날개를 펼쳐보는 게 어때?”
적엽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도전 때문에 기분 상한 것은 아니다. 최상의 날개를 펼쳐보
자는 말은 목숨을 건 비무가 아니라 초식을 비교해 보자는 의
미다. 그러나 지금은 받아들일 수 없다. 검이 일정한 경지에
올라가면 목검이나 진검이나 매한가지. 단 일 초식에 상대의
목숨을 끊을 수 있다. 더군다나 지금은 검을 조절할 수 없지
않은가.
“안 돼.”
적엽명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잊지 마. 나도 무인이야.”
유소청의 얼굴은 확고한 결의를 띄웠다.
누이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말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말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무를 부추기는 듯 나무 그늘에
서 일어나 한쪽으로 물러서 준다. 염왕까지 데리고. 사전에
무엇인가 말을 주고받았음이 틀림없다.
“소청, 네가 무인인 것은 잊지 않았어. 하지만……”
“너와 겨뤄보고 싶어.”
“왜?”
“나도 무인이니까. 우리 유가 검법은 알지? 가장 깊이 알
거야. 백부님이 사용했으니까.”
“소청!”
팔 년 전에 벌어졌던 일은 건드려서는 안될 화약이다.
유소청에게는 백부가 되는 유전일(劉塡一)의 피살.
서로간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친 혈육이 적엽명에
게 죽은 사실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얼룩으로 남았다. 그리
고 그것은 적엽명이나 유소청에게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상
태로 남아있었다.
유소청이 먼저 화약에 불씨를 붙였다. 담담하게……
“비천검법(飛天劍法)이야. 칠십이 초식. 환(幻), 섬(閃),
강(剛), 공(空) 네 단계로 나뉘어지고, 각 단계별로 열 여덟
초식이 있어. 나는 이중 환섬강만으로 해남오지에 올랐어. 쉽
게 생각하면 안 돼. 알았지? 꼭 이겨 줘.”
유소청이 검을 뽑아들었다.
취옥검이다. 검의 명가(名家)인 조가의 전대가주인 조곡 노
인이 만든 검으로 검신 중앙에 비취(翡翠)빛 광택이 흐른다
해서 취옥검이라는 검명을 얻었다.
“소청, 정말……”
“빨리 준비 해. 준비하지 않으면 그냥 들어갈 거야.”
적엽명은 이마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식은땀이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비천검법은 유가를 당당하게 강성오가에 올려놓은 검법이
다. 무가이면서도 살인을 금기시하는 가문, 유가를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올려놓은 검법.
기수식(起手式)에서 이어지는 환 십팔식은 사람의 정신을
뺏어 버린다. 광풍노도와 같이 몰아치는 변화다. 더욱 무서운
점은 변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변화가 신체를 육박
한다는 데 있다. 어느 한 점이라도 소홀히 했다가는 바로 난
자(亂刺) 당해 버린다.
환 십팔식에서 이어지는 섬 십팔식은 지독하게 빠르다. 상
대의 호흡을 빼앗는 데는 이보다 좋은 검법이 없다. 석가의
무음검이 단 일 초식으로 끝내버리는 빠름이라면, 유가의 섬
십팔식은 연속되는 빠름으로 상대가 검법을 전개할 여유를 주
지 않는다.
강 십팔식에는 중(重)의 무거움을 실었다.
이미 호흡을 빼앗겨 버린 상대는 검에 진기를 싣지 못하고,
약간의 충격에도 비칠거린다. 도저히 강 십팔식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공 십팔식은 적엽명도 모른다.
아직 견식하지 못했다.
당시 유전일은 황유귀가 설치한 노방에 빠져 검법을 마음껏
펼칠만한 공간을 얻지 못했다. 몸이 바싹 붙은 상태에서 몸싸
움이나 다름없는 격전을 벌였으니 그나마 운이 따라주었지 넓
은 공간에서 유전일과 마주쳤다면 죽은 자는 자신이었으리라.
비천검법은 분명히 무섭다. 그렇다고 조절할 수 없는 검을
펼칠 수도 없지 않은가.
“준비 안 해?”
“소청, 제발 그만두자.”
적엽명은 차라리 애원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서로 홀가분하게 끝내. 지금 내가 든 검은 백부님의 검이
야. 내가 져도, 내가 이겨도 이것으로 과거는 끝내. 그러니까
검을 뽑아. 그리고 최선을 다해 줘.”
“……”
적엽명은 거절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유소청의 말은 타당했다. 비천검법의 진수와 겨뤄서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이다. 이것으로 과거를 끝낸다. 물론 유가와
는 달리 해결해야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유소청과 깨
끗한 마음으로 사랑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적엽명에게는 불감청(不堪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그런데 정작 검이 말을 듣지 않으니……
“빨리.”
유소청은 재촉했다.
적엽명은 잠시 눈을 감았다.
‘피를 봐서는 안 돼.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유매는……
장군, 어쩌면 처음으로 임무를 실패할지도……’
그는 죽음까지 생각했다.
이번 싸움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칫
농락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애써 쌓아놓은 사랑탑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
스르릉……!
적엽명은 파랑검을 뽑아들었다.
살기가 짙은 묵검보다는 맑은 빛을 뿌려내는 파랑검이 어울
릴 것 같았다.
“고마워. 그럼. 차앗!”
유소청이 신형을 날려왔다.
환 십팔식!
쉬르륵! 쉬륵! 촤아악……!
눈이 현란하다. 천지사방이 온통 검빛으로 휘감긴 듯 하다.
“허(虛)!”
적엽명의 입에서 일갈이 튀어나온 순간, 파랑검은 환 십팔
식의 일부분을 찢고 들어갔다.
“섬(閃)!”
유소청이 다시 날카로운 소리를 토해냈다.
쉬릭! 쉬리릭……!
결코 휘어지지 않는 검이 버들가지처럼 휘청거리는 듯 하
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도 연검을 휘두를 때처럼 낭창거
린다.
피윳! 피우웃……!
이미 유소청에게 가까이 다가간 적엽명은 갑자기 변화하는
섬 십팔식에 대항하지 못하는 듯 했다.
머리를 스쳐 가는 검. 머리칼 한 줌이 베어져 허공 중에 흩
날린다. 어깨를 스쳐 가는 검. 옷이 찢어지며 어깨 살이 불에
데인 듯 화끈거린다. 고개를 숙이자 다시 등뒤로 스쳐 가는
검. 몸이 절반으로 갈라지는 듯 짜르르한 전율이 몸을 관통한
다.
유소청은 제대로 검을 익혔다.
아무리 무남독녀(無男獨女)라고 하지만 이만한 재질이 없었
다면 비천검법을 전수하지 않았을 터.
적엽명은 자연에 몸을 맡기 듯 검풍(劍風)에 순응했다. 억
지로 대항할 생각을 포기했다.
밀려오는 폭풍을 막기 위해서는 폭풍보다 더 강한 힘으로
앞을 가로막아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방(堤防)을 쌓는
다.
무인도 그렇다. 상대의 검을 막기 위해서 상대보다 더 강한
힘, 더 빠른 검, 더 다변(多變)화된 변화를 창출한다.
그러나…… 인간이 지닌 본능은 절대 막아서지 않는다. 물
러선다. 공포를 느끼면 도망치고, 위협을 느끼면 몸을 사리
고…… 그것이 본능이다.
적엽명은 일장검법을 익히면서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
앞에 항거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했고, 초라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태양의 힘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막기는 고사하고 대등한 위치에서 방어조차 할
수 없었다. 검으로 태양을 겨누고 있지만 태양의 강렬한 햇살
은 난비(亂飛)하는 비수처럼 온 몸 곳곳에 파고들었다.
대항은 부질없는 짓이다.
태양 앞에, 폭풍 앞에, 강풍 앞에 대항이란 있을 수 없다.
일장검법은 거대한 진리 안에서 숨을 쉬었다.
– 자연에 순응하라. 모든 것에 순응하라.
태양의 햇살을 온 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면서 고통도 사라
졌다.
태양은 태양일 뿐이다.
태양의 힘을 몸 속으로 끌어들일 수도 없고, 태양을 쳐다본
다고 안력이 강화되는 것도, 진기가 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태양을 거역하면 고통이 따른다.
얻는 것은 없고 잃는 것만 있는 수련.
적엽명은 잃지 않기 위해서 순응했다.
그 다음부터 그는 혼절하지 않았다. 태양을 거역하지 않았
기 때문에 진기를 조절할 수 있고, 호흡을 하는 데 무리가 없
었으며, 몸의 굴곡이 자연스러워졌다.
적엽명은 빠름에 대항하지 않았다.
검날이 다가온다 느껴지면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환 십팔식은 신법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섬 십팔식은 손목
의 굴절에서 비롯된다. 손목이 굽혀지는 순간보다 빠르게 신
법을 전개할 수 있다면 섬 십팔식은 피할 수 있다.
적엽명은 자신의 하체가 굳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
다.
상체의 굴절만으로 섬 십팔식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본능은 또 말한다. 검을 쳐내라고.
그 소리만은 듣지 않았다.
검을 쳐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뒤따를 것 같았다.
파랑검은 눈이 달려있지 않다. 쇠붙이에 불과한 것이다. 파랑
검에 진기를 주입하지 않으면, 유소청이 전개한 초식에 밀려
버리리라. 그것은 위험하다. 검과 검이 부딪쳐 밀린다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