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66
166화
이른 새벽.
두 세력이 대치한 전장에는 싸늘함이 감돌았다.
“아버님!”
“내 말대로 하거라!”
천웅방 수뇌부에 다시 팽팽한 긴장감이 어렸다.
“말도 안 됩니다. 왜 또 이러십니까? 차라리 저희를 베고…….”
원천호가 눈을 부릅뜨고 꿇어앉는다.
[쯧쯧, 자네 자식 농사를 잘못 지었구만. 뻑하면 죽네 마네, 아주 지랄만 풍년이야.]그의 모습에 진무가 혀를 차며 전음을 날리자 원공후가 억울하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지는 자식도 없어 봤으면서…….
지난밤, 무지막지하게 짓밟는 것으로 둘만의 회포를 마무리한 뒤 진무는 원공후에게 홀로 나설 것을 명했다.
원공후가 직접 나선다면 천우명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일대일의 싸움. 바로 그곳에 진무가 함께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말하자 다섯 아들과 장로들이 또다시 거품을 물며 반대하고 나섰다.
“이놈들! 내 분명 말했지 않더냐!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너희들이 내 뒤를 이어 끝까지 복수하면 되지 않느냐!”
원공후가 고성을 지르며 호통을 쳤지만 아들놈들은 도통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버님.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저희들은 물론, 천웅방의 모두가 복수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사기의 문제입니다. 아버님께서 먼저 나섰다가 패배하기라도…….”
“이노옴! 닥치지 못할까! 네놈이 감히 아비를 능멸할 참이냐!”
원공후의 노성에 원천호가 제 말에 실수가 있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원공후는 천우명에 비해 한 수 떨어진다.
그리고 그가 지면 천웅방의 사기는 바닥을 칠 것은 당연한 일.
“지금부터 나의 말에 토를 다는 놈이 있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원공후가 한기를 풀풀 날리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진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작정하고 하는 위협치고는 아주 글러 먹지 않았는가. 죽음을 각오하고 목까지 내미는 놈들에게 고작 용서 운운이라니.
하지만 그의 위협이 통하기는 했는지 아들놈들은 입을 꾹 다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애당초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하는 생각으로 제 아비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겠지.
하여간 사파 놈들하고는. 무식하게 지르면 다인 줄 안다. 물론 나부터도 그렇지만.
단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라고, 모두가 지난밤 그런 전술을 꺼낸 적생을 째려봤다.
“아, 저, 그건…….”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새우, 적생이 죄인이 된 심정으로 사색이 되어 더 움츠러들 것도 없는 목을 한껏 움츠렸다.
“천호!”
“예. 아버님.”
“네 말대로! 만약 내가 죽는다면.”
원공후가 호랑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노려보자 찔끔한 원천후가 시선을 회피했다.
“적 선생을 총사로 모셔 전투를 지휘하게끔 하라! 이는 천웅방주로서의 명이니라!”
“……알겠습니다.”
결정은 내려졌다.
모두가 기적을 바라야만 하는 상황에 굳은 표정을 지을 뿐이었고, 그 중심에 끼게 된 적생은 여전히 죽을상이었다.
하긴 진무를 만나면서 팔자에도 없는 천웅방의 총사 노릇을 하게 되었으니.
“방주님! 철검단입니다. 그들이 다시 전열을 정비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전황을 살피던 무인이 급히 뛰어와 아뢰자 원공후가 고개를 끄덕이고 진무를 쳐다보았다.
그래, 가자. 천우명이 만나러.
원공후가 나서 준다면 정말로 다행인 일이다.
천우명이 직접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철검단과 함께라면 몰라도 일대일로 마주한다면 최소한 천웅방과 철검단의 싸움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비장하게 걸음을 내딛는 원공후를 진무가 뒤따르자 당세령과 운암이 한껏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전음을 날려 왔다.
[너, 뭐 하는 거야?] [진무 도장, 어찌 함께?]한 놈씩 말해라. 정신 사납다.
[걱정 마. 그냥 사패천의 최강이라 불리는 천우명과 싸워 보고 싶을 뿐이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너 천우명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하는 소리냐? 우리 아빠도 승부를 점치기 어려워하는 상대라고!]아무렴, 그 새끼가 그 정도는 되지.
[천웅방주와 함께 가는 거 안 보이냐. 니가 걱정할 일 안 생긴다.] [이런 미친 인간이!] [믿어, 믿어.]당당하기만 한 진무의 전음에 당세령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채 진무를 노려보았다.
[운암.] [예. 진무 도장.] [잘 봐 둬.] [알겠습니다. 두 분의 싸움, 세세히 살피고 마음 깊이 담겠습니다.]전혀 다른 둘의 반응에 진무가 씩 웃으며 원공후의 뒤를 따라 천웅방의 진형을 벗어났다.
진무와 원공후.
두 사람이 나서자 다가오던 철검단이 일제히 진격을 멈췄다.
그리고 그 중앙으로 천우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마 원공후가 나서는 순간 직감한 것이리라. 둘이서 결착을 보고자 한다는 것을.
“천주, 괜찮을까요?”
전장의 중심을 향해 걷던 원공후가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천우명의 실력을 아시잖습니까?”
당연하다.
그러니 나선 것이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지난밤에 맞아 본 결과, 사실 그다지 아프지 않았습니다.”
“…….”
“과거에 천주님께서 가진 힘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랍니다. 피똥을 쌀 정도는…… 어쨌든 제가 느끼기로는 저와 비슷한 정도거나 조금 높은 경지이신 듯한데.”
원공후가 진무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열이 안…… 받는 건 아니지만 그것 역시 당연하다.
과거의 힘을 되찾으려면 아직 멀었다. 지금의 경지라면 원공후와 싸워도 승패를 예측하기 힘들다.
“차라리 저에게 하신 것처럼 그에게 먼저 신분을 밝히시는 것이.”
그래, 그게 가장 편한 길이긴 하지.
하지만 원공후와 천우명은 다르다.
원공후는 그나마 머리가 있고, 천우명은 정말로 대단히 멍청한 놈이다.
어쩌면 청우보다 훨씬 더 멍청할지도 모른다. 말해 줘도 듣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불로초를 구해다 준 게 제 놈인데도. 도리어 멍청한 자신을 꾀려 한다고 의심부터 할 것이 틀림없다.
한두 해 본 것도 아니고, 벌써 어떤 식으로 우겨 댈지 생각만 해도 복장이 뒤집히는 판에 신분을 밝히긴 뭘 밝혀.
저놈은 일단 패야 한다.
패서 귓구멍을 강제로 열어도 들을까 말까 한 놈이었다.
“공후. 일단 설득부터 해라.”
“하지만…… 그 후에도 믿지 않으면.”
“그땐 날 믿어.”
“…….”
진무가 자신하듯 말했지만, 원공후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사이 둘은 전장의 중심에 다다랐고, 천우명 또한 모원려와 함께 오 장여까지 다가왔다.
“공후.”
천우명이 착잡한 눈으로 원공후를 바라보았고.
“천웅방주를 뵙습니다.”
모원려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비록 지금은 적이 되었으나 오랫동안 같은 울타리 안에서 한솥밥을 먹던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이네, 원려. 우명, 자네도.”
“그렇군.”
원공후의 말에 천우명이 고개를 끄덕였고 모원려가 다시 한번 인사를 했다.
“공후, 홀로 결판을 낼 셈인가?”
“일단은 자네를 설득하러 왔네.”
“……설득?”
“우명, 지금이라도 물러나 주게. 자네도 유월청이 사패천을 잘못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던가?”
설득하려는 말이었지만 천우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주님이라 부르게. 그분의 후계이시네.”
순식간에 피어나는 싸늘한 기세.
천우명의 눈매가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듯이 매서워졌다.
“내 자네의 충심을 모르는 바는 아닐세. 하지만 그의 악행이 그분께서 세운 사패천을 무너뜨리고 있음일세.”
“…….”
“우명, 맹목적인 충성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네. 우리가 따른 것은 그분의 뜻이지 그분의 후계가 아니란 말일세.”
원공후의 말에 천우명이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돌아선 것인가?”
“뭐?”
“자네의 뒤를 따라온 자.”
“…….”
“그리고 어제의 전투에서 모습을 보였던 당가의 여인과 선기를 가진 도사.”
“그건…….”
“공후. 자네 정말로 정무맹에 투신하려는 겐가?”
“뭐야?”
뜬금없는 말에 원공후가 미간을 찡그렸다.
“원려가 말했을 때만 해도 자네를 믿었네. 자네가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지금 자네 뒤에 선 새파랗게 어린 녀석에게서 선기가 느껴지는군.”
“아, 아니 그건!”
원공후가 당황하며 진무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 천우명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려가 그 같은 말을 했을 때 아니라 말했으나 이제는 자네를 믿을 수가 없군. 내 천주께서 천웅방을 토벌해야 한다고 하셨을 때 의아함을 품었으나 이제는 확실해졌네. 그분께선 이미 알고 계셨던 게야. 자네가 정무맹으로 돌아섰음을.”
아니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어이가 순식간에 허공을 훨훨 날아가는 것을 느끼며 원공후는 속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저 벽창호 같은 놈에게 당장이라도 진무의 신분을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진무가 오히려 의심만 품을 것이라며 그에게 함구를 명했기에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역시 천주님께선 그분의 후계이시네.”
“우명!”
“더는 말하지 말게. 나는 그분의 명을 따를 뿐이네. 그것이 그분에 대한 나의 충심일세.”
“…….”
원공후가 천우명을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우명이 지칭하는 그가 바로 진무, 아니 혁련무강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아. 제길, 자넨 정말…….”
고개를 내젓는 원공후를 향해 천우명이 가슴을 펴며 말했다.
“둘이서 결착을 볼 생각이면 곧바로 시작하세. 뒤에 있는 도사 놈이 함께여도 나는 상관없네.”
당당히 나서는 천우명의 모습에 원공후가 진무를 바라보았다가,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 하지만 우명, 자네가 결착을 볼 상대는 내가 아닐세.”
“뭐?”
“이분이 할 것이네.”
“이, 이놈…… 네놈이…….”
천우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부끄럽지도 않느냐! 냄새나는 어린 도사 놈에게 천웅방의 미래를 맡기다니!”
“나도 그러고 싶진 않네만 어쩔 수가 없어.”
“뭐야?”
“한 가지만 말해 주겠네.”
“…….”
“정말이지 걱정은 되네만…… 이분께서 자신하셨으니 어쩔 수 없지. 정말 조심하는 게 좋을지도 몰라. 그리고 반드시 귀를 열게.”
“…….”
“자네의 오랜 벗인 나의 충고일세. 무시했다가는 늙은 몸으로 오랜만에 피똥을 쌀 게야.”
진심으로 걱정한 말이었으나 천우명은 원공후가 자신을 우롱한다 생각했다.
“닥쳐라! 이놈! 감히 사패천의 핵심이었던 네놈이 그분과의 의리를 저버리고 정무맹에 의탁한 것도 모자라, 도사 놈 따위에게 뒤를 맡기다니!”
천우명의 몸에서 솟구친 서슬 퍼런 기운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히 경고했네.”
원공후가 더할 나위 없이 애잔한 눈빛으로 천우명을 바라보며 천천히 물러나자 진무가 그의 자리를 채웠다.
“원려! 물러나라.”
“단주님, 하지만 천웅방주가 함께 있습니다.”
“닥쳐라! 내 의를 저버린 저깟 놈들에게 당할 것 같더냐! 물러나라!”
천우명의 호통에 모원려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원 방주님?”
“나는 결단코! 나설 생각이 없네.”
“…….”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 상관치 않겠다는 듯이 원공후가 훌쩍 뛰어 둘 주위를 벗어나자 날 선 경계를 품었던 모원려도 이내 그들에게서 물러났다.
남은 것은 서로를 쏘아보는 천우명과 진무뿐이었다.
진무는 잠시 고민했다.
가장 그리웠던 녀석. 막상 그를 상대하려 하니 언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그래. 혹시 알아들을지도 모른다.
일단은 자신과 있었던 수많은 추억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해 볼 생각이었다.
“우명.”
“우, 우며엉?”
진무의 부름에 천우명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일단 한번 말은 해 보마.”
“…….”
“네가 먹인 불로초, 정말로 효험이 있었다.”
“…….”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이다만, 처음 나를 만났을 때를 기억하느냐?”
진무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문득 사무치는 그리움.
“우리가 낭인이었을 때지. 너는 한참 어린 꼬마였고. 너를 처음 본 날 내가 분명 그리 말했다.”
천우명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대가리에 술병 처박고 다녀도 너보다는 멍청하지 않겠다고.”
“……!”
천우명의 눈이 부릅떠지며 엄청난 안광을 토하기 시작했다.
경악의 의미가 아니라 흉포한 살기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이런 개 잡놈의 새끼가!”
천우명이 엄청난 기세로 진무를 향해 돌진해 왔다.
진무는 아차 싶었다. 젠장, 하필이면 그 말이 떠올랐단 말인가?
제가 천우명이었어도 화를 낼 만했다.
하지만 천우명과의 기억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것들뿐이다.
수련시키며 팬 거, 멍청하다고 팬 거, 많이 처먹는다고 팬 거, 이래서 팬 거, 저래서 팬 거, 어쨌든 팬 거…….
야…… 뭔 추억이 이따위냐, 너와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