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71
371화
정적이 찾아왔다.
쉴 새 없이 흔들리던 협곡에 고요가 찾아오고 자욱했던 먼지구름이 가라앉아 그 내부가 드러난다.
단 일격이 만들어 낸 참상이었다.
모조리 터져 나가 흉측하게 변해 버린 대지와, 그 사이사이 으깨진 시신들.
진의 중앙에 있었던 이들은 아예 형체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진무에게 죽은 자들, 그리고 진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능서현과 그 수하들에 의해 죽은 자들.
시신으로 가득 메워진 협곡 안에 살아남은 묵검대는 스물 안팎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잔뜩 움츠러들어 불안하게 눈을 굴리는 꼴이 삼일 밤낮을 처맞고 두려움에 떠는 다리 밑의 거지나 다름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의 우상과도 같았던 사마도가 진무의 발치에 허물어진 채 힘겹게 피를 게워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끝난 싸움에 전의를 잃어버린 묵검대의 무인들이 차례로 검을 떨구고 무릎을 꿇는다.
니들 뭐 하냐?
투항해서 목숨이라도 구걸해 보려고?
진무는 그들의 모습을 무감하게 바라보다 사마도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몇 가지 물어볼랬더니 얼마 처맞지도 않아 놓고 다 죽어 가는 꼬라지라니.”
“……우웩.”
앞에 쪼그려 앉아 제 머리칼을 움켜쥔 진무의 말에 사마도는 분노를 토할 겨를도 없이 계속해서 피를 게웠다.
“뒈지기 전에 하나만 말해라.”
“…….”
“니들 대가리가 누구냐? 흡성마공을 익힌 그 개새끼 말고. 그 위에 또 있지? 그치?”
이 와중에도 한없이 장난스러운 어조에 사마도는 흐릿하게 웃었다.
“내가…… 말할 것 같으냐?”
“그치? 그럴 줄 알았어. 염병, 이미 죽어 가는 놈 패 봐야 나올 것도 없고.”
진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놓고 일어났다.
사마도는 그냥 둬도 죽는다.
내상도 내상이거니와 그가 게워 낸 핏물에 내장 부스러기들이 가득하니 살아날 도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삼동천으로 오고 있다는 다른 새끼 잡아서 족쳐 보는 수밖에.”
“그래, 너의 무위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
마치 죽어 가는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태워 내는 불꽃처럼, 흐릿해졌던 사마도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 너는 괜찮을까?”
“뭐?”
“네가 쓴 그 무공은 필시 무당의 것이겠지.”
“…….”
“너는 아직 저들에게 정체를 밝히지 않은 모양이더군. 그저 중원인으로만 알고 있느니. 이제 저들이 너의 무공을 보았는데 가만히 있을까?”
사마도의 말은 정곡이었다.
“큭큭, 마기와는 상극이나 다름없는 선기를 가진 네놈의 밑에서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마교인들이 어찌 나올지 궁금하군.”
“…….”
“아마 흩어지거나 너를 공격할 것이다. 다가오는 소궁주를 막겠다고? 홀로 말이냐?”
빌어먹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일환을 제외한 동천의 무인들에게는 자신의 진짜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지금쯤 마기와 상극을 이루는 도가의 선기를 모두가 느꼈을 것이고, 거기에 사마도가 주절거리기까지 했으니 무당지검임을 알았을 것이 분명하다.
젠장, 어찌한다?
지금의 상황에서 속았다며 반발이라도 한다면…….
“연맹주님.”
“…….”
진무가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 대답하지 않자 능서현이 옆으로 다가왔다.
“투항한 자들은 어찌할까요?”
“……어?”
묻지 않는다?
자신의 몸에 품은 선기, 무당의 무공을 가장 빨리 눈치챘을지도 모르는데.
“하명하시면 저희들이 처리하겠습니다.”
“아, 그…… 음.”
진무는 잠시 머뭇거리다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예?”
“그…… 무당……. 사패…….”
“……?”
답지 않게 버벅거리는 진무가 귀여웠던지 능서현이 피식 웃었다.
“연맹주님.”
“어?”
“그건 알고 있었습니다.”
“뭘?”
“제가 사패천주였던 혁련무강의 무공도 알아보지 못할 줄 아셨습니까?”
“……아, 알고 있었어?”
“당연한 소리를요. 말씀하지 않으시기에 묻지 않았을 뿐입니다.”
“…….”
“저뿐 아니라 괴뢰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젠장, 다 아네. 다 알아.
나만 혼자 비밀이라고 생각했던 거네.
진무는 허탈해진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래? 그런데 괜찮은 건가?”
“문제 될 것이 무엇입니까?”
“…….”
“연맹주께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마교에 우뚝 서신 분입니다. 누구보다 강자존의 율법에 어울리는 분이시지요.”
“그래도 도가의…… 마기와는 상극인데…….”
“그 또한 문제 되지 않습니다. 외인이 마교의 권좌에 도전했던 일은 긴 역사 속에 몇 차례나 있었으니까요. 저도 괴뢰도, 그리고 마교의 무인들도 이미 북리 교주님과 천산에 등을 돌리고 연맹주님께 충성을 바친 몸입니다.”
“…….”
“또한, 사패천, 중원의 정파 무림에 이어 마교까지…… 저희는 그저 정사마의 정상을 향해 걸어가시는 연맹주님의 발자취를 좇고 싶을 뿐입니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능서현의 모습에 되레 머쓱해져 버린 진무가 어색하게 웃었다.
능서현, 이런 멋진 녀석 같으니.
그땐 미안했다.
너의 진심도 모르고 귀찮다는 이유로 떨구려 했다니.
앞으로 너는 나의 충직한 부하 십 호…… 맞나? 순서가…….
“연맹주님.”
“응?”
혹시나 틀렸나 싶어서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보는 진무를 향해 능서현이 재차 물었다.
“투항한 자들을 어찌할까요?”
“음, 죽여야지.”
신경 쓸 것도 없다는 듯 내뱉는 심드렁한 한마디에 무릎을 꿇고 있던 묵검대의 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쳐들었다.
“사, 살려 주시오! 우리는 투항했소.”
“…….”
다급히 터져 나오는 외침.
다시금 수를 헤아리던 진무가 고개를 돌려 말을 뱉은 묵검대의 무인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터벅터벅 다가간다.
와락!
그의 멱살을 잡아 올린 진무가 싸늘하게 웃었다.
“이 새끼 어이없게 웃기네. 투항? 누가 받아 준대?”
“아, 아니 그…….”
“짐승의 개나 짐승이나 뭐가 다르냐?”
“…….”
“니들도 알고 있었잖아. 니들이 납치했던 민초들, 그리고 죄 없는 아이들이 짐승의 밥이 될 거란 거.”
“그, 그건.”
“애초에 너희 중 누구도 살려 줄 생각을 하지 않았어. 이곳은 함정이 아니라 너희의 묏자리였으니까.”
진무는 패대기치듯이 그의 멱살을 놓고 일어났다.
“죽여. 모조리.”
몸을 돌리며 싸늘하게 뱉어진 두 마디에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었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그들의 머리 위로 능서현의 귀영마수가 짙게 드리워졌다.
짐승 사냥의 첫 번째 전투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제 죽을 자리를 찾아오는 짐승에 대한 단죄였다.
“황신!”
“예, 천주님.”
“나머지 무인들은?”
“하루면 당도합니다.”
“하루…… 좋아. 죽은 이들을 놈들이 오는 길목에 던져 놓아라. 우리는 삼동천 본성으로 가서 모두와 합류해 적을 기다린다.”
“예!”
협곡의 무인들이 서둘러 시신을 수습했다.
적에게 선물이자 경고로 남기기 위해서…….
* * *
까악, 까악.
우우우우!
들판을 가득 메운 까마귀 떼와 배고픈 이리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해 온 이들을 향해 경계심이 가득한 울음을 토했다.
선두에 선 말이 멈추고 마상의 노인, 상관평이 손을 들어 대열을 정지시켰다.
“확인하라.”
언짢은 기색이 가득한 지시에 무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날래게 뛰어나가자, 까마귀 떼가 일제히 솟구쳐 하늘을 가득 메우고 이리 떼가 들판으로 이리저리 흩어졌다.
까마귀 떼에 가려져 있던 전경을 목도한 선두의 몇몇이 얼굴을 찌푸렸다.
들판에 열을 지어 놓인 수많은 시체.
묵검대였다.
묵검대가 모조리 시신으로 변해 자신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틈을 뒤적이던 이가 시신 한 구를 들쳐 업고 상관평을 향해 급히 뛰어왔다.
가까워져 올수록 선명해지는 그의 모습에 상관평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묵검 사마도.
이궁주 노국태 휘하에서 최강으로 군림했던 무인이 죽었다.
대체 어떤 놈이?
삼동천에 묵검대를 몰살시킬 수 있는 전력이 있었단 말인가?
천산이 움직이지 않고는 힘들 것인데…….
문득 상관평은 의문이 들었다.
중원의 떨거지들을 추격하게 했던 노국태는 어떻게 됐지?
“이궁주는? 이궁주의 시신은 없더냐?”
“예!”
“…….”
시신이 없다면 생사가 불분명해진다.
괜한 걱정인가?
하긴 마도육제의 이름보다 높은 곳에 있는 이궁주를 죽일 수 있는 이는 지금의 마교에는 북리도천뿐이다.
그가 나섰을 리는 없으니 노국태가 죽었을 리는 없다.
이 마교에 누가 있어서 휘몰아치는 그의 장법에 상대가 되겠는가?
하지만 진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노국태는 송여방과 함께 상관평의 절친한 벗이다.
비록 노선이 다를지언정 그의 죽음을 바랐던 적은 없었다.
“의외로군. 사마도가 죽다니.”
“…….”
곁으로 다가온 담담한 목소리의 정체, 한승.
흡정을 통해 스민 마기가 이제는 골수까지 미쳐 눈은 아예 흰자위를 찾아볼 수 없이 시커멓게 변해 버렸고, 평소에도 흘러나오는 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을 고민하는 게지, 상관평?”
“…….”
“어차피 그들은 모두 나를 중원의 지배자로 만들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나? 설마 지금 그들의 죽음을 추모하기라도 하려는 건가?”
수하들의 죽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한승의 말에 상관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되레 기대되는군. 사마도를 죽일 만큼 강한 무인이라……. 벌써부터 흥분이 돼.”
“…….”
한승이 검은 안광을 빛내며 혀로 입술을 쓸었다.
“서둘러 가지. 곧 삼동천이 아닌가?”
“예.”
그래, 갈 수밖에 없다.
사마도를 죽인 놈이 누구이든 그곳에 짐승을 풀어놓을 것이다.
모두가 짐승의 밥이 될 것이다.
애도는커녕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는 지금의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상관평은 대열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출발한다!”
우렁찬 그의 외침에 멈추어 있던 대열이 일제히 발걸음을 내디디며 지축을 울렸다.
그리고 다시금 까마귀 떼와 이리 떼가 시체의 살점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 * *
“천주님!”
황신이 날 듯이 뛰어와 전각의 문을 열어젖혔다.
오랜만에 두 사질이 푸는 무당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 진무가 고개를 돌려 핀잔을 주었다.
“뭘 이리 호들갑이야? 대화 나누는 거 안 보여?”
대화는 무슨, 당장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이 급박한 상황에 추억 놀이나 하고 있어 놓고.
하지만 괜히 진무의 신경을 건드려 놓을 것이 없는 황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초의 감시자들에게서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
“적의 규모는 이천, 시신들을 놓아둔 길목을 넘어 삼동천의 본성을 향해 곧장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드디어 왔나 보네. 도착 시각은?”
“저들의 이동 속도로 봤을 때 반나절 정도로 예상합니다.”
“반나절…….”
그들이 묵검대의 시체를 깔아 둔 곳은 본성에서 오십 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경공을 어느 정도 수련한 하급 무인이 뛰어온다고 해도 반 시진이면 족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
그런데 반나절이나 걸릴 속도로 온다?
천천히 유랑하듯이 주변을 다 살피고 온다는 뜻이다.
“미친 새끼들. 전쟁하러 오는 새끼들이 뭐가 그리 여유로워?”
범은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인데.
여하튼 적이 늦게 온다니 잘되었다. 이쪽에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다는 뜻이니까.
“어쨌든 대화를 나눌 때는 아니란 소리네. 각 동천의 수뇌부들에게 모두 모이라고 해.”
“예!”
진무의 명령에 황신이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오는군요.”
“그래.”
긴 시간 그를 추격하다 마교까지 오게 되었던 청상이 얼굴을 굳혔다.
“다 하지 못한 오룡궁의 이야기는 싸움이 끝나고 다시 듣자.”
“예. 사숙.”
진무가 일어나자 청상과 청우가 뒤따랐다.
놈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 자신을 이토록 화나게 한, 살 가치 없는 짐승 놈이.
그래, 어서 와라.
애들을 잡아먹은 그 이빨,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