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84
384화
둥, 둥, 둥, 둥.
평원이 떠나가도록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한 점에서 시작된 흔적이 점차 넓게 퍼지며 이내 사위를 거멓게 칠했다.
선두에서 길을 안내한 갈성혁이 비틀거리며 주저앉자 그의 뒤를 여유롭게 따르던 진무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척, 척척척.
그가 입 안 가득 욱여넣은 천산설초를 씹으며 천산을 바라보는 사이 뒤따른 대열도 저마다 자리를 잡았다.
진무를 호위하는 황신과 아이들, 능서현, 청상과 청우를 필두로 무인들을 이끄는 동천주들이 시퍼렇게 부어오른 얼굴로 옆자리를 지켰다.
그들만으로도 엄청난 수였으나, 대열을 채운 것은 동천의 무인들만이 아니었다.
진무의 천산행을 응원하는 천산 일대의 사람들이 마교에 불어온 변화가 성공적으로 끝나기를 염원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후우…… 춥네.”
진무는 눈 덮인 천산을 바라보며 허연 입김을 내뿜었다.
따로 내공으로 추위를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서불침 어쩌고 하는 개소리는 원래도 믿지 않았고.
추우면 추워하고 더우면 더워해야지 뭐 하러 내공 아깝게 아닌 척을 한단 말인가? 다 같잖은 위선이고 가식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스승님, 이것을.”
옆에 있던 양진이 서둘러 자신이 입고 있던 털옷을 벗어 건넸다.
천산설묘 대장 놈의 거죽으로 만든 두툼한 겉옷.
진무가 아직 무공이 약한 양진을 위해 만들어 준 것이었다.
자신을 향해 내민 털옷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무는 피식 웃고는 양진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이 녀석아. 내가 지금 천산을 무너뜨리러 온 참인데 토깽이 거죽이나 덮어쓰고 가면 되겠냐?”
용 가죽까진 아니어도 호랑이 가죽은 뒤집어써야지.
“하지만 닭살이 돋았는데요?”
“…….”
젠장, 이놈을 너무 잘 대해 줬나? 아주 지 할 말 따박따박 하는 게…….
하지만 옷을 벗어 준 탓에 오들오들 떨고 있으면서도 눈빛에는 걱정이 한가득이다.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한 요놈을 차마 때릴 수도 없고.
양진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준 진무의 곁에 능서현과 동천주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연맹주님, 마종지로가 열렸습니다.”
“마종지로?”
“예. 권좌에 도전하려는 이가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이지요.”
“흐음.”
진무는 능서현의 손가락 끝에 위치한 협곡을 무심한 눈길로 훑었다.
활짝 열린 철문.
휘몰아치는 칼바람이 거센 눈보라를 일으키며 마치 잡아먹히듯 그 가운데로 빨려 들어가는 살풍경한 모습.
내부에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 길의 끝은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시선을 위쪽으로 올릴수록 짙어지는 구름에 막연히 저 끝이 천산의 정상이겠거니, 미루어 짐작할 뿐.
“그나저나 안에서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군요.”
“…….”
“결국 육가가 움직인 모양입니다.”
“육가?”
“예.”
진무의 물음에 능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리교주께서 소신녀를 보내 청하신 것은 육가와 천산에게 경고를 한 것과 같습니다.”
“…….”
“교주의 뜻이니 절대로 나서지 말라는 의미겠지요.”
그럴 테지.
설마 제 놈이 청한 손님을 박대하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테니까.
“연맹주님께서는 그 청을 무시하셨습니다. 하물며 갈 문주까지 저리 끌고 오셨으니 육가와 천산에게 빌미를 주신 거나 다름없습니다.”
“흐음.”
진무가 턱 언저리를 천천히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맹주님을 손님으로 대했다면 마중을 나온 이가 있었을 것이나 문만 열어 둔 것을 보면…….”
“올 테면 와 보라는 뜻이다?”
“예.”
진무는 가만히 마종지로를 주시했다.
말인즉슨 마종지로라 불리는 저 협곡의 입구가 지옥의 아가리쯤 된다는 뜻이다.
모두가 칼을 숨기고 기다리고 있을 테지. 자신이 주인이 될 만한 자인가를 시험하기 위해서.
고작 니놈들 따위가.
“재미있네.”
진무의 입가에 걸린 싸늘한 미소를 보아하니 곧 밀고 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능서현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육가는…….”
마도의 여섯 기둥.
마도육제라 불리는 이들이 다스리는 가문으로 오랫동안 번갈아 가며 마교의 권좌를 독식했고, 천 년의 역사를 함께해 온 마도의 주축이었다.
“그중 지금 세가 가장 큰 것은 염인 북리가입니다.”
“북리도천의 가문?”
“예. 북리가는…….”
“됐어.”
“예?”
진무는 손을 들어 이어지려는 능서현의 설명을 막았다.
“세세하게 들을 필요 있겠어?”
“…….”
“부딪쳐 보면 알게 되겠지.”
대수롭지 않은 고갯짓에 능서현이 빙그레 웃으며 물러났다.
하긴, 원래 저런 인물이다.
밑도 끝도 없이 당당한 저 모습에 반해서 여기까지 따라오지 않았던가?
이젠 돌아갈 수도 없는 길이다.
그들은 이미 반역자였다. 패배는 곧 죽음으로 이어질 터.
물러난 능서현에게서 시선을 뗀 진무가 활짝 열린 철문의 안쪽을 다시금 굳은 눈길로 주시했다.
“좋아. 그럼 가 줘야지. 오라는데 안 갈 수도 없고 말이야.”
진무의 결정에 능서현이 뒤를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천산을 오른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모두가 결연한 표정으로 화답했다.
“따르겠습니다!”
“……응?”
“예?”
“니들이 왜 따라와?”
“예? 그게 무슨?”
마종지로라며?
그럼 응당 마종이 가야 면이 서지, 니들이 같이 가면 이게 마종지로겠냐?
궁이라는 자식들이야 애초에 목표에도 있지 않았던 놈들이고, 아직 황…… 그곳이 남긴 했지만.
여하튼 여기가 무림에서 가고자 했던 길의 마지막 지점인데, 그 정상에 오르는 짜릿함을 니들이랑 나눠야겠어?
따라오고 싶으면 이 길 말고 다른 길로 돌아와야지.
마뜩잖은 표정으로 눈을 부라리는 진무를 본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혼자 갈 건데?”
“……예에?”
“나, 혼자!”
엄지로 자신의 가슴을 쿡 찌르며 던지는 말에 멍하니 풀렸던 무인들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 이런 미…….”
하도 어이가 없었던 단우강이 뭐라 한소리 하려다가 진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쳐다보자 퍼뜩 제 입을 막았다.
분명 이런 미친놈이라고 하려 했던 것 같은데?
“미…… 아니, 여, 연맹주…… 아니 주군. 아니 될 말입니다. 어찌 저 위험한 곳에 혼자 간단 말입니까?”
“…….”
“육가는 십이동천과는 완전히 다른 곳입니다. 저들의 힘은…….”
갑자기 들어 올린 진무의 손가락에 능서현이 말을 멈추고 눈을 깜박였다.
그의 손끝이 닿은 곳은 갈성혁이었다.
“쟤도 육가의 주인이잖아.”
“그, 그렇긴 합니다만.”
동시에 픽 터져 나온 웃음.
“고작 저따위 놈이 주인인 곳이야. 떼거지로 덤벼도 문제 될 건 없어.”
“…….”
이 양반,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다.
능서현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심정에 이마를 짚었다.
저 말도 안 되는 당당함을 마음에 들어 했던 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미친 괴물인 줄은 알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은가?
곱게나 미치든가……. 아니, 지옥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데 저렇게 해맑게 걸어 들어가겠다고? 산보 나왔냐? 산세 구경하러 왔어?
자신들이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혼자 들어갔다가 뒈져 버리기라도 하면 여기까지 따라온 동천의 무인들은 어쩌란 말인가?
수하들은 그렇다 치고, 최소한 동천주들은 무조건 죽는다.
천산과 육가가 자신들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주군, 안 됩니다. 이럴 수는…….”
“거참 말 많네. 내가 혼자 간다면 혼자 가는 거야.”
“…….”
진무가 눈을 홉뜨며 주먹을 슬며시 들어 올리자 능서현과 동천주들이 그제야 흠칫하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젠장, 망할 고집불통 괴물 같으니.
도무지 어떻게 설득해야 한단 말인가? 저렇게 눈을 희번덕거리며 고집을 부리는데.
누가 대신 말려 줬으면 좋겠건만, 육가의 힘을 모르는 황신과 아이들마저 가만히 있으니…….
“주군.”
“……?”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속으로 발만 동동거리던 와중에 괴뢰가 앞으로 나섰다.
“제게 약속하셨지요?”
“뭘?”
“정상에 오를 때 옆에 서게 해 주시겠다고요.”
“…….”
“함께 싸우지 않고 얻은 옆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희가 도우려는 것이 싫으시면 따르게만 해 주십시오.”
예상치 못한 논리정연한 말에 진무는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 새끼…… 이렇게 말을 잘했었나?
인형극을 자주 하더니 상황에 대처할 줄 아는 말주변까지 생긴 모양이다.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괴뢰의 말마따나 천산의 정상에 설 때 옆에 나란히 서게 해 주겠다 약속했으니까.
“……젠장. 어쩔 수 없지.”
정상에 오르는 기분을 나누는 건 싫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는 없었다.
“대신, 동천주들까지만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멀찍이 떨어져서 와. 방해하지 말고.”
“……예.”
“좋아. 그럼…….”
언짢음이 역력한 표정으로 몸을 돌리는 진무의 뒷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린 능서현과 동천주들이 괴뢰를 향해 슬며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야!”
“……?”
걸음을 내디딘 진무가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갈성혁을 부른다.
“다들 간다잖아! 넌 안 가냐?”
“……?”
“……각출아!”
쉬이이.
호출과 바람 소리의 공포를 아는 갈성혁이 언제 앉아 있었느냐는 듯이 튀어 올라 진무의 뒤를 따랐다.
각출이 뒤에서 뼈다귀로 쿡쿡 찌르는 통에 걸음을 멈출 수도 없었다.
진무는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걸었다.
마종지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일휘를 어깨에 비스듬하게 걸치고…….
다 왔다.
정무맹, 사패천, 그리고 마교.
마종지로의 끝에 북리도천이 기다리고 있다.
이전의 삶에서 결착을 보지 못했던 그와의 승부, 그리고 이후의 생에서 목표한 정사마의 가장 높은 자리를 향해 가는 길.
능서현의 말대로 저 길의 좌우에 수많은 적이 숨어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목을 노리기 위해 칼을 벼리고 벼린 채 몸을 날릴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발을 딛는 모든 순간이, 보이는 모든 곳이 전장이 될 터.
하지만 그게 뭐가 대수랴?
이미 한승에게 빼앗긴 선기는 오는 길에 청우가 잡아 온 토끼의 선단과 천산설초로 대부분 회복한 뒤였다.
기다리거라, 이놈들아.
오랫동안 권력의 물가에 발을 담그고 마도의 하늘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너희들.
남들의 위에 있다면서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네놈들.
천산의 정상에 서서 그 책임을 물어 주마.
정사마의 구분과 관계없이 힘을 가진 이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저버리고 그저 구경만 하며 시시덕거린 네놈들의 그 입을 좌우로 찢어 놓아 주마.
저벅.
진무가 내디딘 첫발이 살기의 경계를 넘어 지면에 닿았다.
휘유우우우.
그리고 공기가 변했다.
밖의 세상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일깨워 주듯 사방에서 뻗어 온 살기가 바늘처럼 피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과연 마교의 본산.
어지간한 놈들은 살기만으로도 피를 토하며 엎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능서현이 그토록 안 된다 말렸던 이유가 이해될 정도다.
하지만 내친걸음을 물리지는 않는다.
후아악!
차분히 내딛는 걸음과 함께 진무의 몸에서 뿜어진 거대한 존재감이 전방을 짓누르며 퍼져 나갔다.
“큽!”
“크윽!”
안을 가득 채웠던 살기가 밀려나고 휘몰아치던 북풍마저 잠잠하게 가라앉은 협곡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
숨어 있던 자들이 진무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신음과 함께 물러났다.
길 좌우에 숨어서 공격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지 지나온 뒷자리에서 공격해 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검은 용을 수놓은 장포를 걸친 사내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두 번째 철문 앞에서 진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 속눈썹과 분칠한 얼굴, 그리고 장포 사이로 길게 빠져나온 손톱.
누가 봐도 마룡 갈가의 무인이었다.
그의 시선이 진무를 지나 그 뒤에서 비틀거리며 걷는 갈성혁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휙, 쩔거럭.
용문장포의 사내가 손에 든 검을 갈성혁의 발치에 던졌다.
뭐 하는 거지?
진무가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결하십시오, 아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