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96
496화
“몸은 좀 괜찮으냐?”
“예.”
“…….”
명현과 무당의 장로들이 안타까운 눈길로 청상을 살폈다.
붕대로 칭칭 동여맨 그의 상반신.
청상은 대궁주의 공격에 심각한 내상을 입고서도 등 뒤에서 터진 화탄에서 명현을 보호했다.
화염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 등에 흉측한 상처가 생겨 버린 것이다.
방어선에 도착하자마자 혼절한 그는 곧바로 의원들에 의해 치료를 받았고, 한나절 만에 깨어났다.
“전쟁은, 전쟁은 어찌 되었습니까?”
“…….”
제 몸부터 추슬러도 모자랄 것을.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청상다워 명현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황군들이 막고 있다.”
“황군들이요?”
“그래.”
“그 대궁주라는 자를 어찌?”
“그는 나서지 않았다.”
“예?”
“아마도 너에게 상처를 입은 때문인 듯하다.”
“아…….”
자신이 날린 폐목환에 당한 복부와 부러진 검에 꿰뚫린 허벅지를 치료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그만한 상처를 입고 계속해서 공격을 감행할 수는 없으리라.
힘을 아낀 것이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자금성이라는 목표가 남았으니까.
“사패천의 적 총사가 북부를 막고 있던 일만의 황군들을 이곳으로 보낸 덕분에 한시름 놓았다.”
“그랬군요. 다행입니다.”
병력이 증원되었다는 말에 청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로는 정무맹의 무인 사천이 저들을 우회하여 곧 도착한다는구나.”
“……!”
뒤이은 소식에 청상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비로소 막막했던 전장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손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손님……이요?”
청상의 물음에 명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이 존칭할 사람이라면…… 대체 누가?
“오랜만이오, 청상 도장.”
“……?”
청상의 물음이 가시기도 전에 한 인물이 갑주를 찬 무장들과 함께 나타났다.
좌군 도독 곽종산, 그리고 그 옆의 열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기품 넘치는 익숙한 얼굴.
“태, 태자 전하?”
대번에 그를 알아본 청상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명현과 무당의 장로들은 이미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으윽.”
청상도 그들을 따라 예를 취하려 했지만, 회복이 덜 된 탓에 몸 상태가 여의치 않았다.
일어서다 말고 신음을 내뱉으며 주저앉는 그를 태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렸다.
“괜찮소. 그냥 누워 계시오.”
“아, 아닙니다.”
“어허, 괜찮다니까.”
짐짓 꾸짖는 어조에 청상이 반쯤 세워 앉은 몸으로 태자를 쳐다보았다.
어찌해서 태자가 이 위험천만한 전장에 나타났단 말인가?
그의 의문을 읽기라도 한 듯, 태자가 별안간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
“황가가, 아니 이 나라가 그대와 중원 무인들에게 많은 빚을 졌소.”
“아, 아니 어찌 저희 같은 한낱 무부에게…….”
지고한 신분을 가진 그의 사죄와 진심 어린 감사에 청상은 물론 함께 있는 무당의 도사들도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이제는 우리 황군에게 맡기시오.”
“설마 친정(親征)을 하실 생각입니까?”
친정, 왕이 직접 전장에 나서 적을 정벌하는 것.
하지만 태자는 그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아직 보위에 오르지 못했으니 친정이라 할 수 없소.”
“…….”
말도 안 된다.
현 황제의 권위가 유명무실해졌음은 이 자리의 누구보다 청상이 잘 알았다.
그때 그 자리에 진무와 함께 있었으니까.
지금의 태자는 보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 황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군의 소집이 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귀비가 실컷 분탕질을 친 뒤였다.
문신들은 물론 무신들도 그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귀비에게 놀아난 반대파를 숙청하고 정국을 안정시킬 시간이 필요했을 터다.
또한, 그는 과보침사를 인정함으로써 지나간 황실의 과오를 명명백백히 세상에 드러내었다.
치부를 드러낸 것에 대한 반대가 만만치 않았을 터.
모르긴 몰라도 이제껏 권력에 빌붙어 있던 자들은 그에 관하여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전장에 왔다는 것은 이미 그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직접 나서는 것은 시대를 이끌어가는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책임지려는 행동임을 안다.
하나 만약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태자 전하,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신분의 차이를 고려치 않는 청상의 진심 어린 걱정에 태자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늦은 감이 없잖아 있소. 군이 늦은 탓에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소.”
“…….”
“지금의 일은 나의 선대이신 태조께서 만든 매듭에서 비롯된 것이오. 응당 그 후손이 된 내가 풀었어야 할 일이었소.”
“태자 전하…….”
“괜찮소. 이미 황군의 삼만 정병이 지원되었고, 계속해서 추가 병력이 도착하고 있으니 저들도 이전처럼 파죽지세로 전쟁을 주도할 수는 없을 것이오.”
“…….”
태자는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청상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청상이라는 도사에게서 왠지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함께 있었다면 더욱 든든하였을 것인데…….”
“…….”
태자가 말하는 인물은 아마 진무일 것이다.
“상처가 깊어 보이니 좀 더 쉬도록 하시오.”
태자는 청상과 무당 도사들을 두고 군의 무장들과 함께 의실을 빠져나갔다.
* * *
그리고 소강상태나 다름없던 전장에 다시 전운이 깃들었다.
둥, 둥둥둥.
군진에서 흘러나온 북소리가 양측이 대치하는 전장을 진하게 울려 긴장감을 조성했다.
산야를 가득히 메운 홍건들 사이로 대궁주 한무화가 뒷짐을 진 채 오만한 눈길로 전방을 주시했다.
자신들을 막고 있던 방어진에 생긴 변화.
길을 질러 와 합류한 수많은 무인이 자리한 좌우로, 번쩍거리는 갑주를 걸친 삼만의 정병들이 기마병을 앞세우고 창검을 곧추세운 채 늘어섰다.
그 하나하나의 기세가 가히 하늘을 찌를 듯하였으나 그들을 바라보는 한무화의 표정에는 당황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은 사자였고, 토끼는 모아 봐야 토끼 떼에 불과했다.
청상이라는 도사에게 예상치 못한 상처를 입었으나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수의 무인이 있다 해도, 수많은 정병이 진을 이루었다고 해도 상관없다.
전력을 다해 부술 것이다.
놈들의 방어진을 갈가리 찢고 피로 산천을 물들일 것이다.
그리고 내일, 원래 자신들의 것이어야만 했던 자금성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천하를 호령할 것이다.
한무화가 전쟁의 시작을 위해 막 걸음을 내디디려 할 때, 중원의 방어진이 작은 변화를 만들었다.
북소리가 멈추고 방어진의 중심이 열리더니, 그 사이로 한 소년이 중갑을 갖춰 입은 황궁 시위들을 대동하고 앞으로 나섰다.
다각, 다각.
고요해진 전장에 그들이 접근하는 소리가 거짓말처럼 크게 울려 퍼졌다.
은은히 빛을 뿌리는 금빛 갑주와 허리에 매인 화려한 장식의 어장검.
한무화의 눈이 살짝 찡그려졌다.
저런 아무 쓸모도 없는 보여 주기식의 금빛 갑주를 걸칠 수 있는 이는 하늘 아래 하나뿐이었다.
황제?
아니다. 지금의 황제가 보위에 오른 지 한참이 되었으니 앳된 소년일 리가 없다.
“태자……로군.”
내딛던 걸음을 물린 한무화가 전장의 중심까지 걸어오는 태자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리고 태자가 멈추었다.
황궁 시위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혹여 모를 위협에 대비하고, 함께 온 무인들이 태자의 곁에 머문다.
뒤늦게 도착해 방어진에 합류한 정무맹의 양소방, 등여평, 벽운영.
그리고 태자의 안위가 걱정되어 쉬지 못하고 붕대를 칭칭 동여맨 채 나선 청상이었다.
그들 사이로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선 태자가 자신의 앞에 선 대궁주와 궁의 무인들을 찬찬히 쓸어 보았다.
“모두 듣거라!”
“…….”
힘껏 외친 태자의 육성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따로 무공을 익히고 있지 않음에도 묵직한 힘을 담고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목소리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나는 그대들이 말하는 배덕한 자의 후손이자 이 나라의 태자이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태자가 궁을 바라본다.
크지도 작지도 않게 뜬 그의 눈동자가 그 먼 거리에서도 이상하리만치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일찍이 태조께서 그대들의 조상들과 함께하여 같은 뜻을 품고 이 나라를 세웠음을 안다.”
“……!”
태자의 말에 갑자기 홍건들의 틈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대들이 선대의 잘못된 선택과 비뚤어진 충정에 오랫동안 핍박받아 왔다 들었다. 고향을 잃고 쫓겨나 머나먼 동토에서 숨죽이며 살아왔음도 알고 있다.”
“…….”
“하지만 그대들은 이곳까지 오며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죄 없는 자들을 학살하고, 힘없는 자들의 것을 빼앗았다. 이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나 지금이라도 칼을 내려놓고 나의 백성으로 돌아온다면 모든 것을 불문에 부칠 것이다.”
“……!”
“또한, 나는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여 사죄하고 그대들을 받아들이려 한다. 내 그대들이 정착할 토지와 집을 내줄 것이다. 과거에 대해 보상할 것이며, 내 직접 그대들과 그 후손에 대해 면책권을 부여할 것이다. 하니, 이제 서로의 가슴에 칼을 겨누는 것을 멈추고 투항하라.”
온 힘을 다해 외치는 태자의 목소리는 열다섯 소년이라고 하기에는 믿지 못할 만큼의 울림과 무거움을 지니고 있었다.
배신한 자의 후손.
그의 목소리가 홍건들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가 말하는 것은 약속이었다.
대궁주 한무화가 오랫동안 자신들에게 말한 막연함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오는 그런 약속.
“하지만 만약!”
태자가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 홍건들을 향해 똑바로 겨누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칼을 들고 끝까지 다가선다면 나는 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또한 백성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단 하나의 목숨도 살려 두지 않을 것임을 명심하라!”
“…….”
전장에 싸늘한 적막이 흘렀다.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만큼 긴장이 흐르고, 홍건들이 대궁주의 뒤에서 서로를 힐끗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누군가 먼저 칼을 놓는다면 연쇄적으로 투항할 듯한 분위기가 그들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어려 번졌다.
“큭.”
그 적막을 깬 것은 갑자기 터져 나온 웃음소리였다.
“크핫핫핫!”
한무화가 고개까지 젖혀 가며 웃음을 터트렸다.
쩌저저적.
일순 그의 몸에서 솟구쳐 나온 살기가 순식간에 그 주변을 동토의 대지처럼 차갑게 얼렸다.
웃음기가 싹 걷힌 그의 시선이 태자를 향했다.
“용서…… 관용…… 배려.”
“…….”
“참 좋은 말이구나.”
한무화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한(恨)이 전해졌다.
“고작 핏덩이 주제에.”
“…….”
“태어난 것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놈 따위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태자와 한무화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동토를 경험해 본 적이 있느냐?”
“…….”
“먹을 것이 없어 추위에 얼어 죽은 시신을 갉아 먹어 본 적이 있더냐? 빼앗지 않으면 생존할 방법마저 없는 그 막막함을 아느냐?”
“…….”
그들이 버텨야 했던 처절한 세월이 그의 한 서린 목소리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씨의 핏덩이가 뭐라? 토지와 집을 내줘? 백성으로 받아들여? 이 중원이 언제부터 너희의 것이었단 말이냐? 중원은 빼앗은 자의 것이었다. 너의 조상이 그러했고, 수많은 나라가 그리 역사를 만들어 왔다.”
한무화가 걸음을 내딛자 양소방을 비롯한 무인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태자의 앞을 가로막고, 황궁 시위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
“우습구나. 네놈을 지켜 주려는 자들의 틈 속에 숨어서 되지도 않은 소리나 뱉어 대는 어린놈아. 나는, 그리고 궁은! 빼앗을 것이다. 네놈들이 몇만, 몇십만을 동원해 나의 앞길을 막더라도 모조리 죽이고 나의 것을 되찾을 것이다.”
쿠우우우.
대기가 일그러졌다.
그가 내딛는 걸음마다 대지가 괴성을 지르며 뒤흔들렸다.
그 가공할 힘을 바라보는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침을 삼켰다.
“결국…… 싸움을 택하는 것인가?”
“애초부터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주씨와 한씨는.”
태자의 읊조림에 한무화가 싸늘히 대꾸하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태자 전하, 속히 몸을 물리십시오. 저자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양소방이 한무화를 향해 나서고, 등여평과 벽운영이 좌우를 지켰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중원의, 그리고 무림의 명운을 건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태자의 옆에 홀로 남겨진 청상마저 부상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들어 겨누었다.
대궁주 한무화.
이곳에서 반드시 그를 죽여야만 했다.
저자가 가진 이념이, 빼앗고자 하는 탐욕이 세상을 파멸로 몰아가리라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청상의 시선이 한무화의 뒤를 따라오는 흑건의 무인들에게 닿았다가, 이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리는 홍건들에게 향했다.
대궁주의 야욕에 이용당한 불쌍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막기 위해 나선 중원의 무인들과 군병들.
결국은 모두가 전쟁의 희생양이 될 힘없는…… 어?
홍건의 측면에서 반대편까지 훑던 청상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쾌속하게 전장을 향해 질주해 오는 사내와 그 뒤를 따르는 이들.
선두를 이끄는 사내를 알아본 청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입술이 벌어지고 입꼬리가 절로 솟구친다.
이윽고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사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