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49
19화
도산옥의 괴들은 스스로의 강함을 입증한 진무를 더 이상 침입자로 생각지 않았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기는 하지만 그는 도산옥에서 가장 강한 존재였다.
일단 모두에게 그렇게 인식되고 나니 더 이상의 공격도 없었다. 마력을 쓰는 이상, 강자에 대해 맹목적으로 굴종하는 것이 귀모가 정한 지계의 법칙이니까.
괴들은 흩어졌고, 도산옥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진무와 황신은 오랫동안 해후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긴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서야 황신이 어째서 도산옥주 협비에게 욕설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찾고 있었던 것이다.
진무라는 이가 지계에 없으니 천계로 갔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천계로 보내 달라 생떼를 쓰다가 결국은 대부분의 힘을 빼앗기고 괴로 강등까지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도 포기하지 않고 천계와 이어져 있다는 틈을 찾고 있었다고 했다. 진무를 만나기 위해서.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이생이 폐허가 되다시피 한 도산옥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도산옥이 이리 처참하게 박살이 날 정도의 힘이라면?
“아! 이럴 때가 아닙니다.”
“응?”
“서둘러야 합니다. 작지 않은 사고를 쳤으니 필시 윗전으로 보고가 들어갈 겁니다.”
“보고가 된다고?”
“그렇습니다. 상황을 좀 보십시오. 검수림에, 도산옥까지 박살이 났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 회복된다고 해도…… 이건 분명 보고가 됩니다.”
“그럼 어찌 되는데?”
“어찌 되긴요? 당장에 확인하려 하겠지요.”
“확인?”
“암요, 괴나 요도 아니고 무려 귀급이 아닙니까?”
“귀? 전에는 요라고 하지 않았어?”
“요인 줄 알았죠!”
“…….”
“어쨌든 진무 님께서 귀에 오르신 게 분명한 이상, 이대로 둘 순 없습니다. 서둘러 신분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칫 윗전에서 확인이라도 하려는 날에는 금세 발각될 것입니다.”
이생의 말에 진무가 짜증스럽게 얼굴을 찌푸렸다.
윗전이고 나발이고 무시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이제 겨우 자신의 법보인 여의의 진신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괴, 요, 귀……. 지계에서 말하는 그 단계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들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하물며 천계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귀천옥을 써야 할지도 몰랐다.
그리되면 스승님과 청우의 등선, 업경에 적힌 과, 그리고 청화를 찾아오라는 옥황의 명도 수행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음, 그럼 곤란한데?”
“걱정 마십시오! 그래서 저 이생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응?”
이생이 기다렸다는 듯이 가슴을 내밀자 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법이 있어?”
“암요! 오직 저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요.”
“…….”
“제가 누굽니까? 바로 이 도산옥의 망자들을 등록하는 일을 하는 괴, 이생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맨 처음 만났을 때 분명 그랬다. 자신이 신분을 위조해 줄 수 있다고.
“진무 님은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지금 즉시! 진무 님과 청상 님의 혼적을 허위로 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허, 허위 기재? 설마 문서 위조를 하겠다는 거야?”
“예!”
“……그래도 되는 거야? 안 걸려?”
“저는 걱정 마십시오! 제 자랑 같지만, 절대로 안 걸릴 자신이 있습니다.”
“…….”
너야 어찌 돼도 상관없지. 어차피 나쁜 놈이었을 텐데.
진무는 단언하는 이생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요는 자신과 청상의 신상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하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저놈 도움을 바랄 수밖에 없나.
“좋아, 그럼 부탁하자. 내가 아직은 걸리면 안 되거든.”
“부탁이라니요? 명령만 하십시오! 이래 봬도 제가 이승에 있을 때부터 높으신 분들 뒤치다꺼리 전문이었습니다! 암요!”
“그, 그래?”
“예!”
“음, 그래. 고맙다. 도움은 잊지 않으마!”
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째 이생의 표정이 이상했다. 뭔가 감격한 듯 눈동자까지 떨어 대고 있었다.
“지, 진심이십니까? 정말 제 도움을 잊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 그야…….”
“알겠습니다. 잠시 쉬고 계시면 제가 후딱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
이생이 허리까지 깊숙하게 숙이고는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렸다.
진무를 처음 만났을 때, 그저 요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신선이었다. 본인이 직접 말했고, 신력을 드러내 확인까지 시켜 줬다.
어찌 신력과 마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생은 진무를 만난 것이 줄이고 끈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기회인 것이다.
그는 육계의 주인들 바로 아래의 힘을 가진 귀가 분명했다. 마력을 증폭시키는 법보의 진신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귀에 오른 자들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던가?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말한 대로 진짜로 협비를 쓰러뜨리고 도산옥을 차지하면?
“크흐흐흐!”
이생은 등록소를 향해 달리는 내내 실성한 듯 웃었다.
그를 돕다가 잘하면 천계로 갈 수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던 것인데, 이리되면 지계에 있어도 상관없다. 자신의 신분이 괴면 어떻단 말인가? 괴도 괴 나름인 것을. 모시는 주인이 육계마왕이면 요나 귀의 따귀를 올려붙일 수도 있는 것이다.
뿐인가? 진무가 도산옥주가 되어 육계 중 하나를 차지하게 되면 귀모가 내린 권능을 이어받게 된다. 그리되면 자신의 휘하에 있는 모든 괴와 요, 귀의 힘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스스로를 황신이라 말하는 총아에게서 힘을 빼앗은 것도 바로 협비이다. 반대로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권능으로 힘을 줄 수도 있다.
즉! 진무에게 잘만 보이면 괴가 아니라 요도 될 수 있고, 귀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크핫핫핫!”
눈에 선히 그려지는 장밋빛 미래에 이생의 웃음소리가 한층 커졌다.
“으하하하! 내가 이생이다!”
“…….”
뭔가 하나 빠진 놈인가?
멀리 사라지며 웃어젖히는 이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저나 지금까지 자신을 대하는 것을 보면 그리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이승에서 무슨 죄를 지었길래 지계에 왔을까?
“아주우! 악랄한 이인자입니다.”
“응?”
“이승에서 그리 살았다고 하더라구요.”
멍하니 이생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진무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황신이 넌지시 운을 뗐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저놈 저거 조심하십시오.”
“……?”
“듣기로는 이승에 있을 때, 강자들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며 힘없는 자들을 무던히도 괴롭혔던 모양입니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전형적인 양아치죠. 강자 앞에서 간이며 쓸개며 빼 줄 듯이 굴다가도, 강자가 약해진 모습을 보이면 서슴없이 등짝에 칼을 꽂는 녀석입니다. 듣기로는…….”
황신이 이생이 이승에서 저지른 수많은 죄업을 쉬지도 않고 나열했다. 얼마나 다양하게 악랄한지, 듣는 내내 절로 욕설이 나올 지경이었다.
저런 개…… 이런 쌍!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 그런 녀석이라고?”
“예, 지계에 있는 놈들 대부분이 마치 영웅담이라도 되는 양 자신의 죄과를 자랑삼아 이야기하거든요. 저놈에게 직접 들었으니 다소 과장은 됐을지언정 거짓은 아닐 겁니다.”
“…….”
“그리고 저놈이 저리 행동하는 것을 보니 아마 천주님께서 제 놈 삶에 꽤 이득이 된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이, 이드윽?”
“괜찮습니다. 그래도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는 놈이거든요. 약한 모습을 보이시기 전에는 목숨 걸고 충성할 겁니다.”
황신의 말에 진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채 이생이 달려간 쪽을 바라봤다.
좋은 놈인 줄 알았는데,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강약약강 형의 인간이었을 줄이야.
“허, 저런 놈과 친했단 말이냐?”
“필요했습니다.”
“응?”
“마음에 들진 않지만, 도산옥에서 저놈만큼 소문이 빠른 놈이 없습니다. 정보력이 각출이 뺨칠 정도랄까요?”
“그, 그 정도야?”
“아니면 저런 놈과 제가 왜 친해졌겠습니까?”
“…….”
“그나저나 어찌 된 일이십니까? 저는 지계에 계신 줄 알고 한참을 찾았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지계에 왜 와?”
“왜 오다니요? 당연히 지계로 오셨어야지요.”
“뭐가 당연해? 누가 봐도 천계지.”
“하아! 천계요? 누가 그럽니까?”
“…….”
“천주님은 누가 봐도 지계시죠. 한무화를 잡고 무림 대영웅이 되셔서 그렇지, 사실 착하진 않으셨잖아요. 고집불통에 성격 더럽지, 이유 없이 사람 잘 패지, 사기에 거짓말은 천하에 당할 자가 없는 데다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이 죽이셨는데.”
황신의 말에 청상이 팔짱을 끼고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들이…….
나이를 처잡숫고 뒈진 뒤에 만났더니 감을 잃었나? 지금 니들이 누구 욕하는지 모르겠어? 것두 당사자 앞에서?
하지만 주먹을 움켜쥐던 진무는 이내 픽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려 만 년 만이 아닌가? 청상도, 황신도.
그래, 봐주자.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어야지.
“참! 생각해 보니 그 사패천주 혁련무강이셨으면서 내내 무당 도사를 사칭하기도 하셨죠.”
“…….”
“어이구, 그때 술 취한 천우명 대협께서 말은 비밀이라고 하곤, 동네방네 떠드는 바람에 그거 무마한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각출이랑 저랑 아주 혼구멍이 났었습니다. 급기야 주씨 황제가 아예 근절 교지까지 내렸었다니까요?”
“하긴 그런 때도 있었지.”
“그런데 천계? 그건 좀 선을 넘었죠. 안 그런가, 청상?”
“음, 하긴 지금 생각해 보니 사숙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말들이 많긴 했었지.”
“그래! 기억하는구만. 그때 그랬잖은가? 천주께서 도사로 죽었지만 등선은 못 했을 거라고…….”
“지옥에 떨어졌을 거라고 그랬지.”
“암, 자네 기억나나? 왜 그 당 소저가 지옥 끝까지 따라가겠다며 자살 소동도 벌이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기억나는구만, 그때 당가주님께 잡혀가서 아미파로 강제 귀의했었지?”
“그래! 그래서 그녀가 결국 아미파의 장문인까지 올랐지 않나.”
“무량수불, 맞네, 맞아. 오래된 일이라 잊고 있었는데 그런 일도 있었구만.”
황신과 청상이 주거니 받거니 과거사를 읊는 가운데, 익숙한 이름을 들은 진무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걔가 비구니가 되었어? 아미파 장문인?”
“예.”
“그 성격에?”
“많이 바뀌었죠.”
“…….”
“말년엔 생불, 혹은 자애불이라 불리기까지 했다니까요?”
“그, 그래?”
“그랬다니까요?”
“…….”
세령이가 비구니가 되다니…… 정말 예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생불에 자애불 소리까지 들었다면, 그녀도 열반한 뒤 천계로 왔을지도 모르겠다. 도사들이 등선에 사계산에 오르듯, 그들도 열반하면 불광정토에 도착하니까.
“…….”
문득 진무는 그쪽으로는 절대로 발길을 돌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격이 바뀌었다고 들었지만, 직접 만나면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니까.
“그런데 신아.”
“예?”
“넌 어찌 그리 기억이 또렷한 거냐? 설마 괴가 되면 기억이 돌아오는 거냐?”
“아닙니다.”
“아니라고?”
“예. 지계의 망자들은 처음부터 이승의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
“벌을 받아야 할 죄인들이 기억을 잃어서야 되겠습니까?”
“아!”
“뿐만 아니라 죽을 때마다 이승에서의 하루하루가 주마등이 되어 머리에 각인됩니다. 그 때문에 날이 갈수록 기억이 또렷해집니다. 요샌 태어나면서 어미가 힘들어하던 그 순간까지도 죄스럽다니까요?”
황신의 말에 진무와 청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계는 참으로 무서운 곳이구나. 그리 기억을 또렷하게 만들어 지은 죄에 대해 벌을 내리다니…….
뉘우친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하긴, 그러니 이생의 말대로 소멸이 가장 큰 꿈이 되었겠지. 고통스러울 테니까.
“……힘들었겠구나, 황신.”
“이제 괜찮습니다. 이리 천주님을 만난 것을요.”
미소 짓는 황신을 보며, 진무는 다짐했다.
반드시 업경을 찾아내, 자신이 아는 모든 이의 이름을 찾아서 지울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