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14
84화
불력을 머금은 폭우가 불길을 완전히 지웠지만, 살의는 지우지 못했다.
화염의 힘을 잃은 뒤에도 마귀들은 떼 지어 몰려들었다.
“흠, 청상선인에게만 맡겨 두고 가만히 있기엔 위치가 너무 안 좋은데요?”
“그, 그렇지?”
주위로 달려드는 마귀들을 보며 툭 던진 비사의 말에 당세령이 고소(苦笑)를 금치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이라는 마귀들이 원을 이룬 채 봉인지를 지키고 있었고, 청상과 몇몇 신령들이 공격해 오는 놈들 사이를 헤집어 대며 당세령을 지키는 상황이었다.
발목을 잡고 있던 불길이 꺼진 덕에 아군이 활기를 되찾은 건 좋지만, 지금 둘의 위치는 적진의 한가운데.
일검에 수십을 베어 넘기는 무용(武勇)을 자랑 중인 청상이라도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수였다.
다른 신령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일이다. 저마다 봉인지를 지키는 팔괘진의 축을 맡고 있어, 하나만 빠져도 진의 위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테니까.
“결국, 자구책(自救策)을 마련해야 한다는 건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내 걱정은 하지 마.”
“걱정이 안 될 수가 있겠어요? 불력을 전부 쏟아부으셨는데.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보여요.”
“그야 그렇지만…….”
“……?”
당세령이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뭘 찾는?
“아! 여기 있다!”
“……?”
당세령이 활짝 웃으며 꺼낸 무언가가 삽시간에 커지더니, 이내 펑퍼짐한 방석 모양이 되었다.
“서, 설마? 그것도 가져온 겁니까?”
“응.”
“허…….”
“고작 앉는 자린데, 뭐.”
“…….”
비사는 아연한 표정으로 눈앞의 방석을 응시했다.
당세령이 꺼낸 것은 금강보좌(金剛寶座)였다. 득도를 이룬 모든 불선(佛仙)이 명상할 때 사용하는 자리이며, 극락정토에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는.
하지만 그뿐이면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 모양은 분명…….
“저기, 천수 님?”
“응?”
“진짜 혹시나 해서 여쭙는 건데, 그거 아미타 님 겁니까?”
“맞는데?”
“하다 하다 아미타 님의 금강보좌까지…… 아주 작정을 하셨군요?”
“혹시나 위험에 처할 일이 생길까 봐. 다행히 생겼네? 큭큭.”
“…….”
치밀하다, 치밀해.
고작 방석이지만,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의 물건이다. 그 안에 스민 강렬한 법력으로 뭇 마귀들이 절대로 범접지 못하니, 그보다 좋은 방어막이 어디 있을까? 와중에 백련의까지 입고 있으니…….
“비사.”
“예.”
“마음 놓고 싸워. 난 정말 괜찮아.”
“…….”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귀하디귀한 아미타의 금강보좌를 진창에 툭 던지곤 냅다 앉아 버린다. 이젠 감탄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뭐 해, 가라니까?”
밝게 웃으며 손을 휘휘 젓는 모습에 비사는 한숨과 함께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하아, 알겠습니다. 그럼 좀 쉬고 계세요.”
“응.”
대답과 동시에 솟구친 불기가 그녀를 빈틈없이 휘감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뒤, 비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크아아아!”
“…….”
사방에서 추악한 괴성을 토하며 공격하는 마귀들.
짧은 언령과 함께, 그의 손에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창 하나가 생겨났다.
싸늘한 불력이 삼차극에 스미자 낯빛이 초록으로 물들고, 온화한 빛을 발하던 눈동자에 흉포함이 감돈다. 법보를 든 비사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비사이다. 다문천의 제자이자 마귀를 섬멸하는 나찰과 야차를 권속으로 부리는 자다. 지금부터 살의를 품고 다가서는 자는 용서치 않고 참할 것이다.”
추상같은 호령과 함께 내디디는 걸음을 따라 불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이미 서로가 물러날 수 없는 싸움이었다.
“크아아!”
경고를 무시한 마귀들이 제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불력의 경계를 넘었다.
“큭, 그럴 줄 알았다. 잡스러운 것들!”
푸하학!
비사의 손을 떠난 삼차극이 금빛 서기로 변해 원을 그리며 마귀들을 도륙하자, 순식간에 당세령의 주위로 거대한 공터가 생겨났다. 실로 극락정토의 수호자로서의 면모에 걸맞은 위용이었다.
“역시, 야차왕 비사.”
살생계를 지키는 불선임에도 적과의 싸움에서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보이지 않는다. 피식 웃은 당세령이 소진한 불력을 채우려는데, 어디선가 다급한 부름이 들려왔다.
“세령아!”
“……?”
진무였다.
훌쩍 뛰어 날아오는 그의 뒤를 마왕 사타가 득달같이 쫓는 것을 보면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도망?
“……일 리가 없지.”
하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싸움 중에 자신을 찾아오는 이유가.
혹시 내가 위험해졌을까 봐 걱정돼서 보호라도 해 주러 온 것일까?
녀석…… 안 본 사이 많이 착해졌네.
자신도 모르게 볼이 살짝 달아오른 당세령이 부끄러운 듯 쳐다보는데, 별안간 진무가 금강보좌가 만든 법력의 보호막 안으로 손을 쑥 뻗었다.
“그거 좀 줘라.”
“……응? 뭘?”
“비 뿌리는 그 칼!”
“…….”
뜬금없는 청에 당세령이 눈을 끔벅이며 손에 든 수월도를 바라봤다.
……보호하러 온 게 아니라, 칼?
“이게 미쳤나? 수월도가 어떤 물건인 줄 알고 달래? 이거 극락정토의 보물이라고!”
“됐고, 빨리 내놔! 시간 없어!”
아니, 그러니까 대뜸 달란다고 냅다 줄 만한 게 아니라니까?
왈칵 짜증이 치민 당세령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쏘아붙였다.
“닥쳐! 이게 진짜 오랜만에 만나서 쌍욕을 하질 않나, 남의 칼을 달라고 하질 않나!”
“미안해. 근데 지금 말다툼할 시간이 없다.”
“…….”
하아, 이건 무슨 적반하장도 아니고…….
하지만 뒤에 활활 타오르는 사타가 뒤쫓고 있으니 급박한 상황이야 굳이 말로 설명치 않아도 된다.
아마 안 준다고 하면 뺏겠지.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
이럴 땐…….
“내 부탁 하나다!”
“……씨, 알았어!”
“약속한 거야!”
“알았다니까!”
그 급한 와중에도 자기 잇속부터 든든히 챙긴 당세령이 수월도를 휙 던졌다.
뭔 상관인가?
극락정토의 보물을 주고, 진무에게 부탁 한 개를 얻어 냈으니 훨씬 더 이득이다.
하지만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수월도를 대체 왜?
자신의 스승인 관음의 법구는 선기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닌…… 으응?
순간, 당세령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수월도가…… 진무의 손에 잡힌 극락정토의 보물이…….
화아악!
진무의 힘을 머금고 시퍼런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제 손에 들렸을 때보다 훨씬 더 짙은…….
너 대체? 그게 되는 거였냐?
그녀가 황당해하건 말건, 진무는 흡족하게 중얼거렸다.
“차갑네. 좋은 느낌이다.”
히죽 웃은 그가 그대로 몸을 비틀며 바로 뒤까지 쫓아온 사타를 향해 수월도를 휘둘렀다.
슈아아아…….
푸른색 빛이 대해의 물결처럼 퍼져 나가 사타를 덮쳤다.
“놈! 이따위 공격이 통할 줄 아느냐!”
난데없는 공격이었지만, 사타는 당황한 표정 하나 없이 겁화가 스민 손을 휘둘렀다. 수월도가 뿜어낸 푸른색 빛을 태워 버리기 위함이었다.
콰드드득!
“……으응!?”
예상과 달리 빛은 불타지 않았고, 되레 손이 으스러질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재빨리 빼지 않았다면 잘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치이익.
와중에 겁화가 꺼지고, 칼날에 베여 상처가 생긴 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역시…… 될 줄 알았지.”
“……이, 이런!”
싸늘한 미소를 머금은 진무가 재차 수월도를 휘둘러 오자 기겁한 사타가 한참을 뒤로 물러났다.
“이, 이게 대체…….”
사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손과 진무를 번갈아 쳐다봤다. 물론,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당세령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지?
본인 법구도 아니고…… 또한 선기로는 절대로 발동할 수 없을 것인데?
황당함에 젖은 사타의 눈빛에 거목의 가지와 수월도를 각기 양쪽 어깨에 걸치고 짝다리를 짚은 진무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해 안 되지?”
“……?”
“될 리가 없지, 짝퉁이나 쓰는 놈이.”
“뭐?”
궁금함을 참을 수 없는 얼굴.
하지만 말해도 이해할 리가 없다.
사타가 가진 겁화의 힘은 귀모에게 부여받은 화(火)의 기운에 불과하다. 그리고 수월도가 머금은 것은 그 상극인 수기(水氣). 서로 천적의 위치에 놓인 불과 물이니, 그 강약에 따라 증발하거나 꺼질 수밖에 없다.
거기다 진무가 지닌 힘은 세상 모든 기운의 원류인 조화이다.
음양도, 오행도 모두 조화에서 비롯된 것.
하니 힘의 차이가 명확할 수밖에 없었고, 진무의 힘으로 증폭된 수월도의 기운이 사타의 겁화를 압도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다만, 아직은 조화의 힘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기에 매개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 그의 손에 들린 당세령의 수월도처럼.
“그래도 이게 진퉁이거든.”
“지, 진퉁? 그게 무슨 뜻이냐!?”
사타가 발악하듯 물었지만, 찬찬히 설명해 주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던 진무가 어깨에 걸쳤던 수월도를 들어 겨눴다.
“뭔진 니가 알 필요는 없고.”
“…….”
진무가 송곳니를 싸늘히 드러내며 손에 힘을 주자 수월도에 다시금 푸른색 빛이 넘실거렸다. 방금의 경험으로 그 빛이 자신을 해할 수 있음을 깨달은 사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이제부터, 망할 불 같은 걸로 귀찮게 한 대가를 치를 걱정이나 해라.”
진무가 수월도를 발도하듯 허리로 당기고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 내디딘 발에 체중을 싣는다.
가슴을 섬뜩하게 만드는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죽음이 떠오른 사타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귀모.
그녀에게서 받던 느낌이었다.
아니, 상극이 주는 불안감은 그보다 더한 두려움을 야기하고 있었다.
눈빛을 마주한 것만으로 몸이 움츠러드는 듯했고, 수월도가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자르고 지나갈 것 같은 착각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으, 으으…… 으아아!”
“……?!”
급기야 냅다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하는 사타의 모습에 진무가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제까지 기세가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새끼가…… 도망을 쳐?
저런 것도 마왕이라고. 이름이 아깝네.
파악!
디딘 발이 땅을 짓누르고, 진무의 신형이 바람처럼 휙 대지를 스쳤다.
고작 몇 호흡.
“십 리는커녕! 일 리도 못 간다, 이 새끼야!”
“……!”
단숨에 사타를 따라잡은 진무가 몸을 휙 틀었다.
슈아아악!
수월도에서 뻗어 나간 푸른 궤적이 가로선을 그린다.
“크아압!”
사타가 목을 보호하려고 온 힘을 다해 겁화를 피워 냈다.
그러나 이미 상대가 되지 않음이다.
푸른색 빛이 닿자마자 불길이 꺼지고, 오른쪽 뺨을 힘차게 얻어맞은 사타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과 함께 사타의 몸이 바닥에 처박혀 뒹굴었다.
“크윽.”
볼이 얼얼해져 오는 고통을 겨우 참아 낸 사타가 몸을 일으켰다.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으나 운이 좋았다. 수월도의 궤적을 피해 고개를 꺾은 덕에 목이 잘리는 것은 면한 것이다.
하지만 더욱 절실히 깨달았다, 놈이 뿜어내는 수기는 자신에게 천적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거봐라, 괜히 도망가다가 빗맞았잖냐.”
“으으…….”
“얌전히 처맞자, 알겠지?”
“닥쳐라, 이놈! 내가 쉬이 당할 것…….”
슈아악! 짜아악!
“커억!”
말을 끝내기도 전에 휘둘러진 수월도가 사타의 왼뺨을 강타했다.
“…….”
뭐지? 방금?
궤적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목을 안 베고…….
하지만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짜악! 짝! 짝짝짝!
수월도가 좌우를 번갈아 가며 궤적을 그릴 때마다 사타의 얼굴이 그에 맞춰 춤췄다.
이건 마치…… 수기를 두른 칼로 때리는 따, 따귀?
“대! 이 새끼야! 넌 오늘 뒈졌어!”
“…….”
겁화는 간데없었다. 불 꺼진 사타의 멱살을 움켜쥔 진무가 수월도를 대신해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푸른빛이 선명했다.
“수월도 때문에 좋은 걸 깨달았다.”
조화의 힘을 오행의 그것 중 하나로 변화시켜 사용하는 방법을 말이야!
짜아악! 짝짝짝!
전장을 울리는 소름 끼치는 소음에 싸움을 멈춘 마귀들이 마치 제 놈들이 맞고 있는 듯이 움찔거린다.
한데 소리가 어찌나 청아한지.
아마도 진무의 손에 악의 힘보단 선이 가득하기 때문이리라.
“……저거, 하나도 안 변했네. 뭔 따귀를 저렇게 선한 기운으로 후려 대는지.”
어느덧 사라진 위협에 금강보좌에서 일어난 당세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