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Dragon Teacher RAW novel - Chapter 232
232화
촤아아…….
찬바람이 불어왔다.
달무리가 짙은 밤.
허윤의 장원으로 들어가는 산길의 초입에는 밤안개가 자욱하게 피었다.
그곳에 십여 명의 인영이 어른거렸다.
모두 몸에 붙는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움직임이 흐느적거려서 어딘가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여기에 놈이 숨어 있다.”
상투를 틀어 올린 천인종의 수장 백면신 괴생락이었다.
모종의 일을 처리하느라 남창에 뒤늦게 도착한 것이다.
그가 앞을 내다보았다.
흐릿하게 장원의 모습이 보였다.
마음먹고 뛰면 한 호흡에 도달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장원을 한동안 지켜보던 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손을 잃었다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아주 상하게 만들었다.
“이런 곳에 잘도 숨었구나.”
괴생락이 킥킥 살기 어린 웃음소리를 냈다.
신도들은 말없이 명령을 기다렸다.
“시간이 있었으면 달아났어야지. 내가 찾아오기 전에.”
하나 괴생락은 쉬이 걸음을 옮기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앞쪽의 풍광이 어딘가 이상함을 눈치챈 것이다.
그때, 안개 속에서 작은 소녀가 홀연하게 걸어 나왔다.
색동옷을 입은 아이는 왠지 괴생락을 알아보는 듯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괴생락이 미간에 살짝 주름을 만들며 아이를 지켜보았다.
“무슨 수작이지?”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괴생락은 눈을 가늘게 뜨곤 마주 웃었다.
“예쁘장하구나. 눈알을 뽑아서 장식하고 싶을 정도로.”
소녀는 괴생락의 끔찍한 말에도 전혀 놀라지 않고 꾸벅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인님? 네 주인이 허윤이란 작자더냐?”
“아니. 고…….”
“고?”
그러자 왠지 소녀가 당황하는 듯하더니, 다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께서는 아무나 뵙지 않으십니다. 뵐 자격이 있는 분만 보실 겁니다. 그럼.”
소녀가 뒷걸음질을 하여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아이야, 눈동자가 예쁜 이상한 아이야. 누구 멋대로 돌아가느냐?”
괴생락이 손짓했다.
그러자 신도들이 소녀를 잡으러 빠르게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데 시간이 지나도 두 신도는 돌아오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장원까지 오가도 서너 번은 더 오가고 남았을 시간이었다.
“흥. 진법이었구나. 고작 이런 것으로 내 앞길을 막으려 들다니.”
괴생락이 가느다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돌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샌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문뜩문뜩 외치는 고함 중에 ‘죽여라!’ ‘허 선생!’ 등의 단어가 섞여 있었다.
“방해자가 있군.”
괴생락이 길고 붉은 손톱이 달린 손가락으로 안개를 가리켰다.
“길을 열어라. 우리 먹이를 저런 미천한 것들에게 양보할 수는 없다.”
“존명!”
신도들은 즉시 안개로 뛰어들었다.
잠시 뒤를 지켜보고 있던 괴생락 역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얼마 뒤, 천인종이 있던 자리에 수적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왔다.
그들도 분위기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어스름한 달밤.
짙은 안개.
스산한 바람.
“어? 이거 뭔가 좀 쎄한데?”
“허 선생인가 그놈, 폐허가 다 된 장원을 샀다더니.”
총채주들이 상의했다.
“장원이 가까워 보이긴 하는데, 우리가 따라오는 걸 알면서도 보초를 두지 않은 게 수상하다.”
“혹시나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고, 진법 같은 것일 수도 있으니 그냥 여기서부터 태워 버리자.”
“허 선생이 안 나오면 장원과 함께 통구이가 되는 거고, 나오면 화살 받이 되는 거고.”
“불 질러 버려!”
“튀어나오는 건 전부 죽여!”
수적들이 화섭자를 들고 불을 붙이려 했다.
칙칙.
그런데 워낙 습기가 많아서 쉽지 않았다.
게다가 가까스로 불이 붙어도 이상하게 금방 꺼졌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수적 중 한 명이 총채주들에게 달려와 말했다.
“총채주님…… 들. 여긴 불을 못 지릅니다.”
“우리가 지르면 지르는 거지, 그런 게 어딨어!”
“이상해서 둘러보니 주변에 나무가 울타리처럼 식재되어 있는데, 죄다 아왜나무입니다.”
“아왜나무?”
“불에 안 타는 나무라서 방화수(防火樹)라고 하는데, 불이 닿으면 거품이 부글부글 생기면서 바로 꺼집니다. 저 나무엔 진짜 불이 안 붙습니다. 기름을 통으로 부어야 탈까 말까 합니다. 근데 그러면 기름을 부은 데만 타고 또 금세 꺼지겠죠.”
“하…… 별.”
“그리고 바람의 방향이 희한하게 저희 쪽으로 붑니다. 불이 붙어도 이쪽으로 올 겁니다.”
“골 때리네.”
총채주들은 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에이이! 그냥 밀어!”
“우리 인원이 근 칠팔백 다 되는데 뭐가 두렵냐!”
“바로 코앞이야! 수로 밀어 버려!”
“제일 먼저 여기를 통과하는 놈은 술과 여자를 질릴 때까지 준다!”
수적들의 사기가 끓어올랐다.
장원이 멀지 않은 곳에 보여서 설령 진짜 진법이 있을지언정 못 갈 것도 없을 듯했다.
“와아아아!”
“전부 죽여!”
“다 죽여 버려!”
“돌격!”
수적들이 앞다투어 안개로 달려갔다.
그때 갑자기 선두에 있던 수적들이 놀라서 멈춰 섰다가, 뒤에 있는 이들과 엉켜서 나동그라졌다.
“힉!”
“뭐야!”
돌연 흰옷을 입은 자가 안개 속에서 튀어나왔는데, 얼굴은 허옇고 입술은 붉었다.
머리는 정수리까지 당겨 상투를 틀어서 기괴했다.
“으아악! 귀신이야!”
“죽여!”
“으아아아! 귀신 죽여!”
넘어져서 버둥대던 수적들도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천인종의 신도는 어리둥절했다.
분명히 일행과 똑바른 길을 가고 있었는데, 혼자만 이상한 곳으로 나와 버린 것이다.
게다가 나오자마자 귀신을 죽이라고 덤벼드는 이상한 놈들을 만났다.
하나 가만히 칼을 맞아 죽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칼을 휘두른 수적의 팔을 비틀어 뽑았다.
“캬아아아!”
신도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허공에 피를 뿌렸다.
“으아아악!”
수적들의 눈에 불이 켜졌다.
“우리 동료를 해친다! 죽여!”
“다 죽여! 썅!”
뒤에 있던 총채주들은 왜 저런 괴이한 자가 허윤의 장원에서 튀어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 이상했다.
“혹시…… 마도?”
“마도의 소굴 심층부에는 인간 같지 않은 놈들이 산다는데…… 그놈들인가?”
“그러면 싸우지 말아야 하는 거 아냐?”
총채주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중 장강용왕을 찔렀던 두벽이 살기를 풀풀 뿜었다.
“아니지. 마도와 손잡았던 총채주를 우리가 죽였는데. 그럼 우린 마도와 적이 되지.”
“그런가? 하지만…….”
하나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어졌다.
천인종의 신도가 칼에 맞아 흰옷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자, 버티지 못하고 안개로 다시 달아나 버린 것이다.
“와아아!”
“죽여! 죽여!”
수적들 상당수가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채주들은 본래 조금 더 지켜보다가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들이 온 길 쪽에서 지독한 살기의 덩어리가 다가오고 있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물에 흠뻑 젖은 장강용왕이 극 한 자루를 든 채 달려오고 있었다.
“이 새끼들, 감히 본왕을 배신하다니! 네놈들의 목을 찢어 뜯어서 저잣거리에 매어 주마.”
채주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특히나 두벽은 얼굴이 허예졌다.
“망할! 안 죽었잖아.”
“앙연이다. 앙연으로 들어선 거야!”
장강용왕은 죽기 직전 앙연에 오르는 길을 택했다.
부상이 모두 나은 건 아니었으나, 순간 폭증한 내공이 그의 목숨을 겨우 붙여 놓았다.
그리고 배신자들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끝까지 쫓아온 것이다.
원래 앙연에 이르면 한 가지에 집착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장강용왕은 그게 자기를 배신한 수하들에 대한 복수로 발현했다.
“아홉 놈 중에 네 놈의 머리가 비는구나. 모조리 찾아서 시신까지 오체분시할 것이다!”
분노한 장강용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총채주들은 강맹한 포효와 달리, 장강용왕의 몸에서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걸 발견했다.
“굳이 싸우지 마! 상처가 깊어. 어차피 곧 죽는다!”
이미 수적의 대부분이 안개로 들어가 버린 터라 싸울 수도 없었다.
채주들도 수적들을 따라서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따라오다 뒈지든지 말든지!”
장강용왕은 살기로 눈이 뒤집혀 있었다.
푸우욱.
길게 숨을 내뱉자 몸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며 물기가 마르고, 피가 말라붙었다.
그러나 다시금 새로 피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부하였던 총채주들의 말대로, 그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죽인다.”
빠드드득.
이를 갈며 장강용왕이 안개 속으로 들어섰다.
* * *
장원 안쪽.
허윤 일행들이 마당에 나와 있었다.
진 내부의 상황을 보러 갔던 번산이 혀를 내두르며 돌아왔다.
“난리가 났습니다. 여럿이 몰려와서 진법 안에서 저들끼리 싸우고 있습니다.”
허윤이 점괘로 예고한 대로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일이 알아서 해결되어 갔다.
“손속이 잔혹한 걸 보니 한쪽은 마도인 것 같고, 수가 많은 건 수적인 듯합니다. 또 혼자서 날뛰는 사람이 있는데, 상당한 고수처럼 보입니다. 그는 피아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죽이고 있어요.”
안소방이 물었다.
“번 형, 그 고수가 무기는 뭘 들었소?”
“극.”
“그럼 장강용왕입니다.”
“그가 장강용왕이면, 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지?”
“글쎄요.”
“피해는?”
“벌써 수십 명이 죽어 나갔습니다. 마도와 장강용왕으로 추정되는 고수의 실력이 엄청나서.”
허윤은 살짝 마음이 착잡했다.
“아무리 악한 자들이라고 해도, 그렇게 죽어 가는 걸 내버려 두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구려.”
그 말에 모두가, 심지어 낙락까지도 어이가 없다는 듯 허윤을 쳐다보았다.
“네 살인두풍에 죽는 사람들을 보는 우리 심정도 그래.”
“팔다리 끊긴 거 막 널브러져 있고…… 아휴.”
“그것만 하면 다행이게. 사람을 막 터뜨려 죽이는 주제에.”
허윤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런데 참 이상하구료. 분명 진법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텐데, 왜들 부나방처럼 뛰어 들어왔는지 모르겠소.”
고우사가 팔짱을 끼고 거드름을 피웠다.
“쟤들 눈에는 장원이 엄청 가까워 보일 거거든.”
이진휘가 물었다.
“여기는 길이 구불구불해서 장원 바로 앞에 오기 전까지는 안 보일 텐데요?”
“쟤들은 그게 바로 코앞처럼 보여. 실제로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뱅뱅 돌면서 헤매고 있는 거지.”
고우사가 껄껄 웃었다.
“허!”
허윤도 감탄했다.
“그러니까 점수 잘 줘. 이거 하느라 머리 빠질 뻔했어.”
“알겠소이다.”
허윤이 소맷자락에서 장부를 꺼내 점수를 기록했다.
안소방도 옆에서 연신 감탄했다.
“굉장합니다. 구궁오위진이 한층 더 강력해졌군요.”
“이건 구궁오위진이 아니다. 새로 창안했어.”
“아앗! 그렇군요. 이름이 뭡니까?”
그런 데에 관심이 많은 안소방이 눈을 반짝거렸다.
잘하면 고우사가 창안한 진법의 이름을 최초로 듣게 된다.
고우사가 보란 듯 대답했다.
“항허절진.”
“항허절진…… 무슨 뜻인데요?”
“허가 놈을 막기 위한 절진.”
“네?”
그 말을 들은 허윤이 점수를 적다가 고우사를 빤히 쳐다봤다.
“…….”
“왜.”
“그거 좀 그렇소이다? 내가 사는 집 앞에 왜 나를 막는 진법이 있는 것이오?”
“널 막기 위한 진법이니까 그렇지.”
“누굴 위한 진이오……?”
“구궁오위진도 깨뜨린 널 막는 진이니까 적들에겐 얼마나 막막하겠느냐. 내가 널 높이 사서 이렇게 이름을 지어 주었으니 감사하거라.”
“위력이 대단하다니 믿음직스럽긴 한데, 이름이 기분 나쁘잖소. 여차하면 내가 내 집을 못 들어오게 될 것 같은 느낌도 막 들고.”
“그러라고 만든 건데?”
“방금 내 집 앞이라는 말 못 들었소?”
“내가 널 따라다니는 이유가 뭐냐. 네놈이 뚫지 못할 진법을 만들기 위해서야. 지금은 미완성이다만, 계속 고쳐 나가면 언젠간 못 들어오는 날이 있겠지. 그날이 바로 내가 천추의 한을 풀고 가는 날이다.”
허윤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은 통과할 수 있다는 얘기구려. 알겠소이다.”
그러면서 장부에 무언가를 표시했다.
슥슥.
고우사가 움찔했다.
“아…… 야, 인마! 왜 썼던 점수를 다시 지워. 아니이, 그러면 안 되지. 원래 그런 용도로 만들었던 걸 어쩌라고. 이름 바꿔? 알았어, 바꾸면 되잖아. 거, 치사하게 점수 가지고 그러지 말자.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