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39)
하산-2
백소고가 하산하고서 이성민은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잡음과 악취가 떠도는 일상 속에서 이성민의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매일매일 꾸는 악몽은 매번 그 형태를 바꾸었고, 그것이 거듭되면서 이성민은 악몽을 기억하게 되었다.
꾸는 악몽은 다양했다. 수많은 괴물들과 싸우다 결국에 힘이 다해 사지가 뜯겨 죽는 꿈도 꾸어보았고, 괴물을 피해 거대한 미로를 떠도는 꿈도 꾸어보았다. 그냥 무작정 도망다니는 꿈도, 끝없이 추락하는 꿈도. 고문당하는 꿈도.
꿈속에서는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만약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한다면, 이성민은 일단 앞뒤 가리지 않고서 놈의 면상을 한 대 갈겨주겠노라고 마음 먹게 되었다.
또렷한 악몽 속에서 이성민은 아픔을 느꼈다. 물론 그 아픔은 꿈에서 깨어난다면 사라진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기억은 그대로 잔존했다. 꿈속에서 악몽을 자각한다고 해도 악몽의 형태는 변하지 않았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악몽은.
“너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군.”
위지호연과의 재회가 악몽으로 나타났다. 악몽 속에서의 시간은 이미 10년을 모두 채웠고, 이성민과 위지호연은 루베스에서 재회했다. 다시 만나게 된 위지호연의 모습은… 이성민이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성민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악몽 속의 위지호연이 이성민이 상상했던 10년 뒤의 모습이었다면, 이성민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너는 10년 동안 무엇을 했지?”
그 말에 대답한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였노라고.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만 그러한 외침으로 악몽 속의 위지호연은 설득되지 않는다. 그녀는 싸늘함이 느껴지는 시선으로 이성민을 한 번 보고선, “그게 네 한계였나.”
그렇게 중얼거릴 뿐.
아픔은 없는 악몽이었으나 정신적인 고통이 오래갔다. 이성민이 진정 두려워하던 미래가 악몽으로 발현된 것이기에, 그 악몽을 처음 꾸었을 때 이성민은 스스로의 무력함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공포를 느꼈다.
정말로… 위지호연과 재회하게 되었을 때 저렇게 되면 어떡하지.
패티그 리커버리. 마인드 클리닝. 마법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거듭해서 꾸는 악몽을 이겨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악몽은 계속된다.
백소고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그런 꿈이었다.
괴로운 꿈이었다.
백소고의 죽음을 막고 싶다. 그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이성민은 그 던전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앞으로 7년 뒤에 백소고는 위지호연과 같은 던전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는다.
이성민은 위지호연을 악인惡人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 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지호연은 선인善人도 아니었다. 굳이 색으로 분류하자면… 위지호연은 회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할 상황이 된다면, 위지호연은 살인에 망설임을 갖지 않는다.
그 던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 던전에서 위지호연이 다른 이들을 죽여야 할 상황이 만들어졌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이성민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억눌렀다. 마인드 클리닝. 거듭해서 펼친 마법에 정신이 적응한 것일까. 아니면 악몽이 강해진 것일까. 머리의 지끈거림은 가시지 않는다.
‘위지호연을 막을 정도로 강해져야 해.’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정답은… 백소고가 아예 그 던전에 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되지는 않을 것임을, 이성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최악을 준비해야 한다.
위지호연을 이기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백소고의 죽음을 막을 정도만이라도. 앞으로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7년 남짓이었다.
짧다.
여름이 되었다.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물론 이성민은 매미의 울음을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무에 달라붙어 열심히 몸을 떠는 매미는 볼 수 있었다. 귀에 떠도는 잡음은 잘 쳐준다면 매미의 울음과 닮았다고 할 정도는 되었다.
매미의 유충은 매미가 되기 위해 10년이 넘는 세월을 땅 속에 지낸다. 그래. 고작 벌레 따위도, 장성하기 위해서 그만한 세월을 보낸단 말이다.
7년. 유충이 매미가 되기에도 짧은 시간 아닌가. 유충이 아닌 나는 7년 동안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아니, 할 수 있을까가 아니다. 해야 한다. 해야만 했다.
잡음이 떠도는 산은 고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거운 몸뚱이와 끔찍한 식사와 악취는 편안하지 않았다. 매일 꾸는 악몽은 하루를 더 길게 만들었다. 아무도 없다. 산에 수행자가 더 들어왔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누군가가 산을 나갔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이성민은 그들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성민이 변하면서 세상은 변했다. 운기는 이전보다 편안했고 기혈을 흐르는 내공에는 막힘이 없었다. 매일 펼치는 창법의 기본기는 손에 익었고 구천무극창의 경지는 더 높아졌으며 무영탈혼을 펼칠 때에는 자그마한 자유를 느꼈다.
부족했다.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되었다. 그만큼 이성민이 보내는 하루의 밀도는 높아졌다. 잠을 줄였다. 어차피 악몽 때문에 제대로 잘 수도 없었다. 잠을 자지 않은만큼 수행을 했다. 몸의 무거움은 나날이 갈수록 더해졌지만 이성민이 펼치는 무영탈혼은 보다 더빨라졌고 창법은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다음 금제.
이성민은 금제를 견디기 위해 준비를 해놓았다. 주변의 지리를 모두 파악했고 눈을 감고서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지리에 익숙해졌다. 아공간 포켓 가득 식량을 넣어 두었고, 그로도 모자라 장시간 썩지 않도록 고기를 훈연해 놓았다.
두 눈의 금제를 받았다.
세계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청각이나 후각에 의존할 수는 없었다. 이성민이 의존할 수 있는 감각은 촉각 뿐이었다. 피부에 닿는 바람을 느끼려 했다.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감각이 보다 더 날카로워야 했다. 자하신공에 매진했다. 역겨운 맛이 느껴지는 보존식을 먹으면서 버텼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야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다. 바닥에 글을 적기 위해 들고 다니던 나무 막대가 이성민의 새로운 눈이 되었다. 바닥을 짚으면서 걷다가, 주변을 향해 손을 휘젓는다. 바람을 느끼려 했다. 피부에 닿는 바람을.
한 달이 넘어 준비해 둔 식량이 떨어질 즈음에야 사냥에 성공했다. 기뻤다. 이성민의 주변에는 그를 칭찬해 줄 사람이 누구 하나 남지 않아 있었지만, 이성민은 스스로 해내었다는 사실에 홀로 기뻐하고 만족했다. 가치 있는 사냥이었으나 음식의 맛은 여전히 역겨웠다.
맴맴.
맴맴맴.
귓가를 떠도는 잡음은 끝나지 않는 매미의 울음이었다. 가끔 그것은 비명이 되기도 했고 절규가 되기도 했다. 비명은 백소고의 목소리로 들렸고 절규는 이성민 본인의 목소리였다. 보이지 않는 두 눈이 담은 시커먼 어둠은 악몽을 만들어냈고, 이성민은 어느 순간부터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그는 스스로 기계가 되기를 갈망했다. 움직이는 기계. 무공을 펼치는 기계.
시커먼 세계에서 이성민은 스스로 펼치는 창법의 형태를 볼수가 없었다. 내가 휘두르는 창은 어디로 향하는가. 창의 궤적은 어떤가. 무영탈혼을 펼쳤을 때, 내 몸은 어디로 가는가. 어디로 나는가.
그저 날고 싶은 뿐인가. 매미가 되고 싶은 것인가. 긴 세월 땅에 웅크려 있다가 바깥으로 나와 시끄러이 울다 죽는 그런 매미를 바라는가. 아니. 이성민은 귀에 아른거리는 매미의 울음을 증오하여 발작했다. 매미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다. 이성민이 되고 싶은 것은, 되고 싶었던 것은. 그가 바라는 것은 더, 더, 더 큰.
무엇이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위해 돌아온 것일까.
나는.
피부에 닿는 바람의 온도가 바뀌었다. 겨울이 되었다. 이성민의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시커먼 세계에서 이성민은 언제나 움직였다. 그는 능숙하게 겨울을 준비했다. 사냥은 더 이상 어렵지 않았다. 시커먼 세계에서 이성민은 고독하고 외로웠으나 살아감과 수행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바람이 바뀌었다. 겨울에서 봄이 되었다. 또 봄이 여름이 되었다. 2년이 지났다. 므쉬가 금제를 추가해야 한다 하기에, 이성민은 씻는 것의 금제를 받았다. 어차피 코에는 언제나 악취가 감돌고 있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반 년이 지나고, 이성민은 갈아입는 것의 금제를 받았다. 변하는 바람의 온도와 므쉬가 찾아오는 것만이 이성민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징표들이었다.
그렇게 3년이 되었을 때.
때가 되었다. 므쉬. 이성민은 입술을 뻐끔거리며 그녀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므쉬가 이성민의 정신에 대고 말했다. 이성민은 천천히 호흡을 고른 뒤에 말했다.
수행을 끝내고 싶다.
므쉬는 즉답하지 않았다. 거적때기를 몸에 두른 시련과 고행의 신은 자신의 앞에 서있는 수행자를 바라보았다.
3년.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산에서 버티는 것이 가혹한 것은, 계속해서 금제가 추가되기 때문이다. 플람이라는 시련은 계속해서 수행자를 찾아 와 정신적으로 압박하고, 수행자는 금제 속에서 발버둥친다.
이 산에 들어 온 모든 수행자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얻기도 전에 포기한다. 버티지 못한다.
저 수행자는… 인과율이 비틀어진 저 인간은. 독했다. 이성민이 최근 이 산에서 보낸 일 년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혹했었다.
그럼에도 버텼다.
“너는 원하는 것을 얻었느냐?”
므쉬가 물었다.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짧고도 긴 침묵을 가진 뒤에, 이성민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내가 천재였다면 얻었을 지도.
천재가 아닌 이성민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것인가. 씁쓸한 현실 아닌가. 결국 가진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단 것인가.
그래도 조금은 보였어.
이성민이 중얼거렸다. 그것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더, 더 많은 것을 바란다. 이성민은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음에 감사했다. 죽음을 극복한 것에 감사했다.
그렇기에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수 있었다.
“이 산의 수행이 너에게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이 산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렇게 되지 못했을 거야.
그 대답이 므쉬는 썩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가볍게 손을 휘저어 이성민의 몸에 묶여 있던 금제를 풀어냈다.
모든 금제가 사라졌을 때, 이성민은 살짝 휘청거렸다. 3년. 3년 동안 느껴 온 몸의 무거움이 사라진 것이다. 그 당연한 가벼움을 이성민은 어색하게 느꼈다. 언제나 맡던 악취가 사라진다. 귀에서의 잡음이 사라진다.
감고 있던 눈이 뜨여진다.
“…아.”
이성민은 오랜만에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반가운 기분이야.”
이성민은 므쉬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