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401)
407화 93. 드래곤(4)
이성민은 영매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영매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천외천의 시작은 무신이 영매와 만난 후부터였다.
무신의 뜻은 종언을 막는 것, 이라지만 무신은 결국 신령…… 영매의 꼭두각시다. 무신이 종언을 막겠답시고 해온 일들은 모두가 영매의 뜻에 지나지 않았다.
“왜 무신을 죽이지 않았지?”
이성민은 마령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10년 전, 위지호연은 꿈에서 부름을 받아 이곳에 왔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무신과 만났고, 무신 역시 마령과 접촉했을 것이다.
“네가 마령정을 나올 수 없다는 것은 이해했다. 그런데 왜…… 마령정을 찾아온 무신을 죽이지 않은 거냐?”
“할 수 없었으니까.”
마령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균등하지는 않은 역할을…… 무신이 가진 역할과 운명은 신령의 보호를 받는 것이었고, 내가 개입할 수도 없었다.”
“무력하군.”
이성민이 이죽거렸다.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마령은 그 모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무신에게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무신이 마령에게 당신이 종언의 사도인 것이냐 물었을 때, 마령은 자신은 사도가 아니라 간섭하여 길을 제시해주는 존재일 뿐이라 대답했었다.
그리고 무신이 자신의 역할에 대해 물었을 때도, 마령은 자신이 무신의 길을 제시해 줄 수 없다고 대답했었다.
‘만약 그때 마령이 무신을 죽였더라면.’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성민은 그 생각에 휘둘리지 않았다. 만약 무신이 그때 죽었어도, 어떤 식으로든 사마련주는 죽었을 것이다.
오히려 무신과의 싸움이 사마련주에게는 득이었다. 그와의 싸움 덕에, 사마련주는 자신이 고금제일인임을 확신했고 가장 큰 미련을 버릴 수 있었다.
“신령의 목적은 뭐지?”
줄곧 품고 있던 의문이다. 이성민이 가진 그 누구의 기억으로도 이 질문의 대답은 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앞에 있었다.
“……이번 세상에는 변수가 많았다.”
마령이 중얼거렸다.
“내가 의도했던 변수도 있었지만, 지금의 세상은 애초에 의도했던 것보다는 너무 많은 변수를 안게 되었어.”
“나는 에레브리사의 드래곤들과 접촉했다.”
그 말에 야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성민이 용언을 습득하고, 에리아 탈출에 성공한 드래곤들과 접촉하는 것은 그 누구의 안배도 아니었다. 우연과 우연이 거듭되어 만들어진 결과일 뿐이었다.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들었지. 이번의 세상이 저번과 지지난번의 세상와 비교해서 많이 다르다는 것.”
“……달라질 수밖에. 저번 세상까지 나는 신령과 협력하고 있었다.”
“왜 신령을 배신했지?”
“므쉬와 데니르가 회의감을 품은 것과 같다. 이 세상은 몇 번이나 반복되었고…… 우리는 기계적으로 그것을 지켜보아 왔다. 나는 몇 번이나 문명의 시작을 보았고, 문명의 끝을 보았다. 거의 변하지 않는 결말과 그 안에서 허무하게 죽어가는 이들을 보았지.”
“동정심이라도 품은 모양이군.”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야…….”
마령이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작은 흔들림이 시작이었다. 그것이 커다란 괴리감을 낳았을 뿐이지. 인제 그만 끝내고 싶었을 뿐이다. 물론, 몇 번이고 죽고 사는 것을 반복하는 이 세상을 구원하고 싶다는…… 그런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너는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이 일을 반복해오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므쉬와 데니르 같은 신들의 기억은, 세상이 멸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리셋 된다.
오슬라와 사라헨느 같은 초월적인 존재들은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면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만약 다음 세상이 열리게 된다면, 새로운 정령의 여왕과 요정의 여왕이 이 세상에 속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신령과 마령은 아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관리자로서, 몇 번이나 반복되는 기억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마령이 종언을 끝내고 싶었던 것은 그 지긋지긋한 반복에서 탈출하고 싶은 사심도 상당 부분 있을 것이다.
“신령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했나?”
“그랬더라면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지도 않았겠지. 오히려 내 행동이 신령을 자극해 버렸어. 내가 끝을 내고자 만들었던 변수가, 신령의 의욕을 끌어 올렸지. 수 없는 반복 중에서 이번만큼 다름이 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덕분에 신령도 적극적으로 세상에 개입하고 있지.”
그리에스의 존재. 과한 힘을 손에 넣은 제니엘라. 천외천. 신령의 행동이 달라졌음은 당장 천외천이라는 조직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본래 이 시점에서 종언은 모든 것을 끝냈어야 했어.”
하지만 끝나지 않았다.
“신령은 이 세상의 너무 많은 변수. 그것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무수한 가능성에 대해 주목했다. 그는 당장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보다는, ‘극복할 수 있을 만한’ 재앙을 주는 것에 주력했지. 그리에스라는 마도서는 그를 위해 안배되었다. 종언의 운명을 알게 된 인간들은 종언을 막기 위해 주력했지. 결과적으로 신령의 의도는 성공했다.”
운명에서 도망친 카인과는 다르게, 동생인 아벨은 적극적으로 운명에 맞서는 것을 선택했다.
그는 종언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동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신령의 안배였군.”
이성민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에스의 마법을 통해 운명을 바꾸는 것 따위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이성민은 아벨의 모습을 떠올렸다. 개죽음이었다는 말이지.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주먹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정해진 결말을 알게 된 존재는…… 둘 중 하나지. 발악하든가, 포기하든가. 신령이 주목하는 것은 물론, 발악하는 쪽이었다. 그 발악은 운명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이전과는 다른 역사를 만들었다. 네 말대로 에리아의 존재 목적은 완성된 기술을 손에 넣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아주 많은 이들의 조력 하에 이루어져 있지.”
“……정령과 요정?”
“그 외에도. 이만한 세상을 구성하고,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시키는 것에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나? 그리고 이 세상을 지탱하는 것이, 정말로 나와 신령 둘뿐이라고 생각했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우리는 어디까지나 관리자일 뿐이니.”
“……대마계.”
마령의 자조어린 중얼거림을 들으며, 이성민은 김종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김종현은 마령이나 신령과 접촉하지 않고서도 에리아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김종현이 그 허락되지 않은 지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준마왕이 되면서 타 차원의 진짜 마왕들과 접촉한 덕분이었다.
“그들 역시 이 세계의 구성에 상당 부분 힘을 보태주고 있지. 이 ‘실험장’은 그런 ‘투자자’들을 위한 것이다.”
“투자자라니.”
마령의 비유에 이성민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꽤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들 역시 원하는 것이 있으니 이 세상에 힘을 보태고 있을 테니.
“그리모어는 대마계가 심어 놓은, 그들을 위한 가능성이다. 몇 번의 반복 중에서 이 실험장의 모르모트가 그리모어를 사용해 마왕으로 각성한 것은 처음이었지만. 만약 김종현의 의도가 성공했더라면, 대마계는 이 거대한 실험장을 통째로 식민지로 삼는 것에 성공했겠지.”
“……너는 가능성에 대해서 말했었다.”
이성민은 손에 묻은 피를 바짓단에 벅벅 문질러 닦았다.
“종언을 맞닥뜨린 우리가 발악하는 것이, 그 가능성이라는 말이냐.”
“사마련주를 떠올려라.”
그리고 창왕도.
“허주야 여태까지의 반복 속에서 그런 결말이 정해져 있는 녀석이었지만, 사마련주와 창왕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태까지 ‘인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변수의 반복 덕에 그들은 인간을 초월했지. 그들은 이 세상을 탈출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그들이 이룩한 ‘기술’은 이 세상에 기록되어 있어.”
신령의 의도는 성공했다. 이성민은 그 사실을 되새기며 쓰게 웃었다. 종언에서 벗어나고자 한 발악들. 그것이 변수가 되고 가능성이 되었다.
“……외길은 뭐냐.”
“외길?”
이성민의 중얼거림에 마령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성민은 마령에게 사마련주와 허주, 창왕이 보고 떠났던 외길에 대해 말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마령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투신전(鬪神傳).”
“……투신전……?”
“본래 인간은 필멸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어떠한 인간이 필멸의 굴레를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완전무결한 절대의 권능까지 손에 넣었지. 그 존재는 모든 차원의 전례가 되었고, 그를 시작으로 하여 각 차원에서 드물게나마 필멸의 굴레를 벗어나는 존재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들은…… 육체에 구애받지 않고, 거대한 세계에 의식이 연결되었지. 그게 바로 투신전이다. 그것이 외길의 형태를 가졌는지는 몰랐다만.”
허주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언젠가, 그곳에서 다시 보자는 말을.
“신령은 이미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었다. 그리고…… 머지않아서 모든 것이 끝나겠지.”
마령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무력감에 젖은 마령의 목소리를 들으며 까득 이를 갈았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마령의 어깨를 잡았다.
“아직 듣지 못했다.”
이성민은 마령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야나의 얼굴.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야나가 이성민에게 맹목적이었던 것은, 이성민의 안에 있는 허주를 연모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야나를 이곳에 묶어두면서까지 나를 불러들인 이유.”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오지 않았을 테니…….”
“그 이유를 말해.”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다.
확실한 답이 필요했을 뿐이다.
마령에게 있어서 이성민은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처음부터 마령이 안배했던 것은.
“위지호연이 어떻게 된 거지?”
내뱉은 목소리가 싸늘했다. 감정이 부글부글 끓으려 했다. 이성민이 마령을 노려보았다. 마령은 노려보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이 역시 신령의 의도였을까.”
“말해.”
“……정령의 여왕이 갑작스레 세상에 강림하려 하면서. 위지호연은 차원의 틈 사이로 떨어졌다. 그리고…… 나의 가호에서 벗어났지. 나는 이곳에서 나갈 수가 없었지만, 신령은 달랐어.”
더 들을 것도 없다.
이성민이 마령의 어깨를 놓았다. 그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 보았다.
새카만 공간을 떠돌던 위지호연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녀답지 않게 약해진 마음으로, 어깨를 떨던 모습을.
손을 뻗어도 닿지 않던 그 순간을.
너를 믿는다며 중얼거리던 목소리를.
“……위지호연이 신령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나?”
“불가능해…… 위지호연의 존재는 고정되어 있다. 이 세상의 존재는 초월적인 힘을 얻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아. 그만한 격을 갖추게 되면 강제적으로 세상에서 추방되지. 아니면 투신전으로 향하게 되든가.”
그것을 막기 위해, 마령은 위지호연의 존재를 이 세상에 고정했다. 아무리 강한 힘을 손에 넣는다 해도 위지호연은 이 세상에서 추방되지도, 투신전으로 가지도 못한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위지호연이 가진 힘에 비해 낮은 격을 갖게 만들었다.
“거역하는 것은 불가능해.”
“……하하…….”
이성민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마왕 김종현은 세상에서 추방되었다.
정령의 여왕이 소멸했다.
뱀파이어 퀸은 패배했다.
모든 던전이 닫혔다.
다음은 뭘까. 항상 생각해왔다. 앞으로 무엇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것은 이성민에게 미지의 공포를 안겨 주고는 했었다. 그리고 이제, 다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
위지호연이 웃는 모습을 떠올렸다.
절망해서는 안 된다. 이성민은 동요를 가라앉혔다. 마지막 질문이다.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품 안에서 열쇠를 꺼냈다.
“이건 대체 뭐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