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writer who lives again RAW novel - chapter 133
의외로 컬트적 감각도 있고.
고민 끝에 난 번역기를 돌려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사이에 인사치레는 필요 없었다.
마치 벌써부터 친구라도 된 느낌으로 이렇게 물었다.
― 흑인이 안 나와도 괜찮아요?
답장은 바로 날아왔다.
― 백인만 나오는 영화에서 인종차별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그만큼 세련된 작품도 없겠죠.
그리고 이런 농담도 덧붙였다.
― 벗지 않고도 섹시한 사람처럼.
기발한 비유였다.
벗지 않고도 섹시한 사람.
백인만 나오지만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영화.
다 같은 맥락이었다.
나는 또 메시지를 보냈다.
― 아직 제대로 된 시나리오도 없어요. 스토리보드만 있는데요. 나중에 시나리오도 제가 썼으면 하고요.
그러자 단 한 마디만이 돌아왔다.
― Cool(좋아요).
그쯤 되니 나도 그가 꽤 마음에 들었다.
시원시원한 화법과 유머러스한 코드.
덧붙여 예술적 감수성까지.
더 망설일 것 없었다.
나는 그에게도 스토리보드를 보내기로 했다.
이틀 후.
피터 한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스토리보드의 번역이 끝났다는 것이다.
소설로 번역을 했던 작품이라 그런가.
확실히 번역 속도가 빠르다.
“감사합니다. 급하게 맡긴 일인데.”
― 금홍 학생이 번역을 다 해 왔어요. 손댈 곳이 많이 없어서 살짝 다듬기만 했습니다.
금홍이가 잘 해 준 모양이구나.
왠지 내가 다 뿌듯했다.
― 작가님이 그림도 그리셨다면서요?
비웃는 듯한 특유의 말투.
난 좀 민망해졌다.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 사실 만화는 유치해서 읽지 않는데… 만화 보듯이 스토리보드를 보게 되더군요.
스토리보드는 만화의 구성과 닮긴 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영화인이 아닌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지.
“어떻던가요? 너무 어렵진 않던가요?”
― 어려운 것보다… 제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컬트적인 영화를 만든다고 들었는데요. 그런 영화는 딱 질색이라서요. 튀려고 애쓰는 느낌이 여실히 들어서.
피터 한 교수야 그렇겠지.
장르 소설도 안 보는 사람에게 뭘 바라랴.
뭐, 내가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그래서, 재밌었습니까?”
내 말에 그는 대답이 없었다.
아마 ‘재미’적 측면에서는 생각해 보지 않은 걸지도.
잠시 후, 그가 대답했다.
― 취향을 떠나서, 한 번도 쉬지 않고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더군요. 그 이미지들.
“그게 바로 이미지의 힘이죠.”
― 난 더 말하지 않을래요. 다음에는 순문학을 가져와 줘요.
좋다.
피터 한에게 이 정도 평가면 큰 칭찬이었다.
끝까지 봤다는 것.
그만큼 시선을 사로잡았다는 거니까.
컬트에서 시선을 끄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
피터 한 교수가 보내온 스토리보드의 파일.
나는 그것을 세 권 제본했다.
그리고 국제 우편으로 그것을 미국으로 보냈다.
도착지는 누들 출판사.
먼저 조나단 감독에게 한 권을 보내고.
만약 그가 거절한다면 멜라니 라쉬에게.
그녀 역시 거절한다면 리치 파블로프스키에게 보내 달라 양해를 구한 상태였다.
때마다 한국에서 택배를 보내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테니까.
한편으론 이런 불안이 들기도 했다.
세 명의 감독 모두 <그 집>을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어쨌건 영화는 내 주 장르가 아니니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남은 건 얌전히 기다리는 일뿐.
* * *
틸 버켈과 함께 쓴 에세이 <두 역사>.
며칠 전 독일에서 발간이 됐다.
물론 내게도 국제 우편으로 책이 도착했다.
책을 보고, 난 좀 놀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작은 크기.
거칠거칠한 표지의 느낌.
무채색으로 뒤덮인 색감.
이 책의 의도는… 명확했다.
근현대사에 대한 고발과 애도.
독일어라 알아볼 순 없었다.
다만 모든 왼쪽 페이지에 들어간 사진들.
난 그 사진들을 꽤 신중히 들여다보았다.
1부, 틸 버켈의 <검은 성>.
재로 뒤덮인 드레스덴 대성당.
연합군과 독일군이 대치하는 상황.
전쟁터의 참상과 독일의 만행들이 담긴 사진.
2부, 이상의 <갈림길>.
경성 한복판에서 행렬하는 일본군.
일제강점기의 분위기가 나는 경성의 사진들.
그 당시 지식인들의 어딘지 슬픈 얼굴들.
책장을 넘기다가, 나는 멈칫했다.
그리고 실소를 내뱉고 말았다.
“이게 누구야.”
‘지식인’을 대표하는 문인들을 모아 둔 사진.
그중에는 ‘구인회’도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반가운 얼굴을 찾았다.
바로 전생의 ‘이상’이었다.
비쩍 마른 몰골.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식민지인으로서의 불안함.
그 두 가지가 섞인 듯한 불편한 표정.
내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구나.
나는 호기심에 거울 앞에 섰다.
내 앞에는, 정확히 말하자면 혜경의 껍데기가 서 있었다.
하지만 눈과 표정은 정신을 드러내는 창.
이 얼굴은 분명 나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다.
나는 빤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불안감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삶에 대한 기대와 약간의 긴장감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확실히… 전생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게 됐구나, 나.
나는 <두 역사>를 덮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한번 꽉 쥐었다.
틸 버켈의 제안으로 시작한 이 책.
어느덧 내게 남다른 의미가 되었다.
내 기억과 내면을 이렇게까지 드러낸 적이 없었으니.
또… <갈림길>을 쓰면서 나 역시 위안을 받았고.
나는 <두 역사>를 책장에 소중하게 꽂아 놓았다.
한 가지 욕심이 더 있다면… 일본에도 저 책이 번역되었으면 했다.
이준환 편집위원은 어려울 거라고 말했다.
도마크 출판사에 원고를 보낸 지 오래다.
하지만 미쯔하루 편집장에겐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
내 책이라면 뭐든 발간하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도마크는 내게 상당히 호의적인 출판사다.
역사의식이 문제 된 적도 없고.
그런 출판사마저 책을 내길 꺼린다면, 과연 일본에 <갈림길>을 내보일 수 있을까.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바로 독일 현지였다.
<두 역사>가 발간된 지 며칠 후.
독일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그것도 뮌 출판사를 거치치 않은 채로 말이다.
일단 모두 거절을 하고… 뮌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두 역사>에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두 역사>의 판매 페이지에만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이렇게나 반응이 좋았나?
그랬다면 뮌 쪽에서 말을 했을 법한데?
나는 인터넷 브라우저 자동번역을 이용하기로 했다.
수많은 독일어 댓글들이 어색한 한국어로 변했다.
그 내용은… 대충 이런 식이었다.
― 틸 이야기는 납득이 됨. 결국 역사의 흐름에 대한 거잖아. 그런 거시적 시선은 분명 필요하지. 하지만 이상의 말은 좀 너무했어. 식민지인의 내면? 좋다 이거야.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게 어떻다는 거지? 후손들한테 뭘 바래?
― 난 이상이 저런 글을 쓴 것도 이해해. 한국도 일본한테 괴롭힘을 많이 당했잖아. 하지만 그런 내용을 독일에서 발표하는 저의가 뭔데? 왜 그 책임을 독일에게 물어?
― 이상은 문창과를 나왔다지? 확실히 평생 철학을 공부한 틸 만큼 사유의 깊이가 깊지 않구나….
― 동의.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좁아. 역사에 대해 말하라고. 개인의 슬픈 내면 말고. 지금 우리의 죄책감을 일부러 자극하는 건가?
― 식민지를 당했던 나라 국민들은 다 똑같아. 자신들의 선조가 당했던 문제를 마치 자기가 당한 것처럼 전시하잖아. 독일이나 일본의 죄책감을 자극해서 뭘 얻으려는 거겠어? 결국 경제적 이득 아냐?
충격적인 반응들이었다.
독일은 과거사 문제를 깨끗하게 인정한 거로 유명한 나라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잘못을 인정하는 게 용기라면,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다.
내 글이 독일에서 적잖은 반감을 산 걸까.
<두 역사>의 판매 순위는 벌써 7위.
나온 지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 말이다.
마침 뮌 쪽에서도 연락이 왔다.
도미닉 팀장이 다이앤 통역사를 끼고, 직접 전화로.
― 많이 놀라셨을 거라 생각한 끝에 더 늦기 전에 연락을 드립니다. 독일 현지에서는 작가님의 작품에 대한 다양한 비평과 감상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는 역사적 견해가….
다이앤은 말을 골랐다.
도미닉 팀장이 자극적인 표현을 쓴 것 같았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괜찮아요.”
― 어… 역사적 견해가 상식선과 많이 어긋난 이들의 의견도 적지 않습니다. 사실 아예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책을 낼 때마다 이런 일들을 치르곤 하니까요.
“하지만 이번 일은 다소 심하죠?”
― …네. 아무래도 외국 작가의 글이다 보니 더 반발심을 산 경향이 없잖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반증으로. 틸 버켈에게는 별다른 반감을 보이지 않던데요.”
― 틸이야 워낙에 그런 글들을 써왔으니까요. 이미 만성적인 안티들을 몰고 다닌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뮌은 두 작가님의 글과 견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작가님에게 피해가 갈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거라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니 작가님께서도 저희를 믿고 <두 역사>에 대한 인터뷰나 SNS 언급을 당분간 자제해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그러니까… 상황이 좀 수그러들 때까지 대중을 자극하지 말아 달라 이거군.
“가능한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터뷰는 원래 잘 하지 않는 편이라서요.”
―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뮌은 이상 작가님을 지지합니다. 세상에 빛을 발하기 전에 고초부터 치루는 책들이 있죠. <두 역사>야말로 그런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빛을 발하기 전에 고초부터 치루는 책이라.
그 말을 들으니, 좀 안심이 됐다.
뮌 출판사가 태도를 확실하게 해 주는 것 같아서.
― 아, 오늘 뉴스에서 틸 버켈이 <두 역사>에 관한 인터뷰를 합니다. 그 부분을 녹화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틸 버켈의 인터뷰라.
기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네. 그럼 부탁드리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정말로 뮌은 뉴스 영상 하나를 보내왔다.
친절하게 한글 자막까지 달아 둔 파일이었다.
상황을 알고 있는 지훈이 조심스레 물었다.
“틸은 말하는 게 좀 거칠다고 하지 않았어요? 걱정되는데….”
“거칠면 좀 어때. 틀린 말만 안 하면 되지.”
하지만 그건 정말 안일한 생각이었다.
틸 버켈의 인터뷰는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뉴스 스튜디오에 앉은 틸 버켈.
그는 벌써부터 화가 잔뜩 난 것 같았다.
기자가 틸에게 물었다.
― 틸, 요즘 <두 역사>의 반응이 여러모로 정말 뜨거운데요. 이런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틸은 별안간 카메라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 독일의 무식함에 몸이 떨릴 지경입니다.
130회
― 독일의 무식함에 몸이 떨릴 지경입니다.
기자는 깜짝 놀랐다.
생방송인지라 편집도 못 할 텐데… 또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
“와… 일침 장난 아니네요.”
지훈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왠지 저게 끝이 아닐 것 같은데?”
난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말했다.
그리고 내 말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 틸, 너무 흥분하지 말고 말해 주세요. <두 역사>를 향한 어떤 반응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 첫째, 2차 세계대전과 식민지 문제와 오늘날의 후손들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들이 많던데… 독일이건 일본이건 식민지를 가짐으로써 많은 경제적 이득을 취득하지 않았습니까? 그 이점으로 오늘날 후손이 풍요롭게 살 터전을 마련했고요. 전 독일인들이 제발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들이 다른 나라 국민들보다 좀 더 부유한 나라에 사는 것 같다면, 그 안엔 선조의 침략 전쟁이 남긴 유산이 섞여 있다고요.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침략 전쟁을 당한 나라의 후손에게 빚이 있는 겁니다. 그런 역사가 없었다면 그들은 지금 더 풍요롭게 살고 있었을 테니까요.
…언변도 언변이지만, 대단히 윤리적인 생각이었다.
식민지배를 당한 나라의 입장에선 당연한 생각이라도, 독일인의 입장에서는 쉽지 않았을 텐데.
그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 둘째, 이상 작가의 글은 독일과 관련이 없는데 왜 독일에서 책을 내는 것이냐는 멍청한 소릴 들었습니다. 이보세요. 침략 전쟁이나 학살, 인종차별은 국가적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독일이 심각한 학살 문제를 겪었는데 세계의 모든 나라가 자신의 나랏일이 아니란 이유로 모른 척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습니까?
기자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 절망스럽겠죠.
― 네! 당연하죠. 전쟁과 학살은 인간성의 문제거든요. 인간으로서, 어떻게 인간을 학살할 수 있나? 어떻게 학살의 피해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나? 이 문제라는 겁니다! 만약 이게 인간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람이 있다면….
틸 버켈은 꾹 참아 왔던 한 마디를 내뱉었다.
― 그는 나찌와 다를 바 없는 사람 아닙니까?
“…헉.”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