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writer who lives again RAW novel - chapter 16
지훈이 내게 슬쩍 물었다.
“형…선미 싫어해요?”
“넌 오희라는 싫어하면서 쟤는 괜찮냐?”
“상냥하잖아요. 예의바르고. 비꼬는 것도 없던데?”
“우리한테만 안 그러는 거야, 우리한테만.”
금홍이에겐 분명 무례하게 굴었잖아.
게다가 우리들은 눈치 채기 힘든 교묘한 선에서.
“…그런가…아무튼, 그럼 금홍 선생님이 번역해주시는 거죠?”
“맡겨주시면요. <세사노>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언제부터 모두가 내 소설을 <세사노>라고 부르게 된 걸까.
“네. 부탁드릴게요. 일단 천천히 해주세요.”
나는 금홍이에게 번역료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지훈과 똑같이 오십을 주면 형평성에 어긋나니, 일단 편당 삼십으로. 물론 잡문 번역료는 따로 지급하고.
얘기가 끝나갈 무렵, 금홍이가 말했다.
“방금, 감사했어요.”
“뭐가요?”
“장선미 조교님이요.”
“아. 짜증났죠.”
“항상 미묘하게 굴어요. 남 뒷담화는 하고 싶지 않지만…”
“않지만?”
“저 선배, 제가 김한 선배와 사귈 때부터 제 얘길 많이 하고 다녔거든요. 헤어진 후에는 좀…안 좋은 방향으로?”
“어떤 타입인지 알 것 같네요.”
이 세상에는 특이한 사람들이 있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호감을 느끼거나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불쾌를 느끼는 사람.
혹은 그 반대의 경우들.
요샛말로 무슨 ‘마음의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엮여서 좋을 것 없다는 거다.
다시 사무실의 평화가 찾아왔다.
슬슬 <부활>의 내용이 잡혀가고 있었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그 장면 안에 한 남자가 태어난 시간과 죽는 시간이 조각조각 이어진다.
마치 피카소의 그림처럼.
그리고 그 두 시간을 오가는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늙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로, 죽어가는 남자를 다시 탄생으로 되돌린다.
삶과 시간의 의미를 함께 통찰할 수 있는 주제의식과, 조각보같은 시간을 뒤섞는 스타일.
제대로만 써진다면…둘도 없는 작품이 될 것이다.
“형, 퇴근 안 해요?”
지훈이가 날 불렀다.
벌써 여섯 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소설만 구상했군.
조교와 사무원들과 함께 사무실을 나왔을 때였다.
“저기, 혜경 선배님…”
누가 날 부르나 했더니, 장선미였다.
그녀는 사무실 문 앞에 서있었다.
“…왜요?”
“저기, 드릴 말씀이 좀 있어서요.”
“어…형, 난 먼저 갈게요.”
지훈이가 눈치를 보고는 혼자서 가버렸다.
“무슨 일이에요? 저 퇴근했는데.”
“그게…이쪽으로.”
장선미는 나를 또 비상계단으로 데려갔다.
뭐야. 바빠 죽겠는데.
“뭔데 이러세요.”
“…흑…”
…왜 울어?
장선미는 밑도 끝도 없이 울기 시작했다.
쎄한 느낌이 올라온다.
잘못 걸린 것 같다.
“…왜 우세요?”
“선배님, 선배님이 저 싫어하시는 거 알아요.”
그건 그렇지.
“제가 희라 언니랑 같이 어울려서 그런 거잖아요. 하지만 입학하고 언니가 너무 잘 해줘서 커피 몇 번 마신 게 다예요. 그 언니, 이상한 거 알고 난 뒤론 함께 어울리지도 않아요.”
하고 구슬프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다.
누가 보면 오희라랑 놀았다고 혼낸 줄 알겠네.
“오 선배 때문인 거 아닌데요.”
“네?”
장선미가 울음을 뚝 그치고 날 봤다.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었겠지.
이 여자의 계획대로라면,
‘제가 왜 선미 조교를 싫어해요. 안 싫어해요. 제발 울지 마세요.’
등의 말이 나오길 기다렸을 테니.
그러면 ‘하지만 번역 일도 금홍이에게 맡기고…’라고 말 끝을 흐릴 테고.
물러터진 남자라면 결국 번역을 장선미에게 맡길 거다.
…한심할 정도로 얕은 수.
“전 장선미 조교님한테 아무 감정 없어요. 좋을 것도 싫을 것도.”
“….”
“그러니 그냥 편하게 조교 일 보세요.”
“선배님, 혹시 금홍이가 제 얘길 하던가요?”
여기서 갑자기 금홍이 얘기가 왜 나와?
금홍일 걸고넘어지지 말라고, 한 마디 해주려던 참이었다.
우웅-우웅-
전화가 울려댔다.
지훈이었다.
그새 무슨 일이지?
“여보세요.”
-형. 아직도 선미 만나고 있어요?
“아니. 이제 헤어졌어.”
나는 장선미에게 이만 가보겠단 의미로 고개를 한 번 까딱하곤 비상계단을 나섰다.
“무슨 일이야?”
-형, 대박이에요!
“뭐가?”
-형이 일본어로 번역한 <세사노>, 재일교포들이 보는 한인 뉴스에 소개됐나 봐요!
“정말이야? 어쩌다가?”
-재일교포 기자가 기사를 썼대요. 한국으로 출장 왔다가 형 등단에 관심을 가지게 됐나 봐요.
혹시나 하고 일본어 번역을 했는데…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이야.
“그 뉴스, 메이저야?”
-교포들 사이에서는 Y일보랑 비슷한 급의 일간지예요. 일본어 버전도 있어서, 일본인들도 적잖이 읽고요.
“우리 홈페이지는 소개 됐고? 그게 제일 중요해.”
-당연하죠. 형 이러다가 월드 스타 되는 거 아니에요?
지훈이 낄낄거렸다.
“그래. 그렇게만 되면 내가 너 월급 올려준다.”
-됐어요. 지금도 감지덕지네요.
전화를 끊었다.
“하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작가의 본질은 청탁도 강의도 뭣도 아니다.
바로 글, 글이다.
그리고 그 글을 실은 홈페이지가 부흥하려 한다.
작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작이었다.
***
혼자 남은 장선미는 멀거니 서 있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요즘 우습게 소비되고 있는 말이긴 하지만…
‘그녀에게 이렇게 구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하…누가 저 좋아한대? 왜 저렇게 튕겨?”
짜증난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눈물은 이미 오간 데도 없었다.
‘김혜경이랑 친해지려고 오희라랑 연도 끊었는데…젠장.’
혜경에게 딱히 이성적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친해지고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두고두고 써먹을 인맥이 될 텐데.
장선미의 이런 방식은 한때 김한에게 잘 먹혔다.
상냥하게, 하지만 털털하게.
사귀는 건 아니지만 사귀는 것처럼.
김한은 장선미를 작가들 모임에 액세서리처럼 달고 다녔고, 장선미는 거기서 쌓은 인맥으로 작은 문학잡지에 글을 싣기도 했다.
한 마디로 ‘윈윈’인 관계.
하지만 김한이 무너지자, 그녀의 인맥도 거품처럼 사라졌다.
장선미의 입장에선 문단도 결국 정치였다.
정치의 기본은 강한 편에 붙는 것.
그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이용하는 것.
그리고 지금 대학원의 실세는…단연 김혜경, 아니 ‘이상’이 아닌가.
“그런데 이금홍 걔는 뭐야 진짜…”
김한도 꼬시더니, 이번엔 김혜경인가?
얼굴 좀 반반하다고 괜찮은 남자들만 꿰차려 하다니.
장선미는 손거울로 얼굴을 한번 살피고 비상계단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서 혜경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역시, 저만한 남자가 없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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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 – (15)
다시 사는 천재 작가 15
집에 돌아와 지훈이 톡으로 보내준 링크를 따라 들어갔다.
재일교포 커뮤니티의 뉴스 란 메인에,
내 이름 ‘이상’이 있었다.
<한국의 신인 작가 이상, 한국 문단을 바꾸려 하다>
기사엔 내 등단의 표절 해프닝, <세사노>에 대한 설명, 논란이 된 수상 소감, 그리고 홈페이지 주소까지 나와 있었다.
그 덕에 <세사노> 일본어 번역 페이지의 조회수도 급등했다.
하루 만에 삼천 회.
생각지도 못한 쾌거였다.
커뮤니티 기사에 달린 댓글들도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등단 제도는 꽤 어렵다던데, 그걸 뚫고 작가가 된 거지?
-그렇지. 천재 이상의 이름을 본 따서 필명을 지었네.
-소설이 좀 신기해. 묘한 기분이 들게 한 달까? 번역도 훌륭하네. 누가 한 걸까? 수준급인데.
-약간 옛날 말 같긴 한데, 괜찮네.
-그거 알아? 번역 있잖아, 작가가 직접 했대.
-뭐? 대단하잖아.
-이 작가, 일본인 할아버지랑 사는 거 아냐? 조금씩 그런 말투가 보이는데.
-그런 거 차치하고서라도 이 소설, 대단한 건 분명해.
-내가 자주 가는 일본 커뮤니티로 퍼 나를래. 교포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나도. 한국 작가여도 일본에서 유명해지는지 한번 보자고.
“일본인 할아버지와 사는 것 같다…라고…흠.”
역시.
1930년대에 멈춘 내 일본어는 아직 완벽하게 현대적이진 않다.
재일교포들이 내 글에 관심을 가져준 건 좋지만,
일본어 공부가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우웅-우웅-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대학교 국문과 학과장 김진하입니다.
학과장.
한 과의 교수들 중 수장의 역할을 하는 교수를 뜻했다.
우리 과의 경우는 원로교수인 송 교수가 맡고 있고.
음…올 것이 왔군.
“예, 안녕하세요. 이상입니다.”
-반갑습니다. 이상 선생님. 그…저, 다름이 아니라 저희 한국대 국문과 교수진들이 오늘 조인창 선생님께 다음 학기 특강을 이상 선생님께 넘긴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조인창 교수님께서는 이상 선생님을 적극 추천했으나, 저희 입장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강의 자리를 줘야 하는 제자와 후배들이 줄을 선 처지라서…
되도록 한국대 출신을 쓰고 싶다 이거다.
좀 더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인수대학교라는 내 출신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
하지만 나도 그냥 꼬리를 내릴 순 없다.
이건 조인창 교수와의 약속이기도 했다.
“네. 어떤 입장이신 줄은 압니다. 하지만 저는 이야기가 다 된 줄 알고 타 학교에서 제가 맡기로 한 수업을 캔슬했는데요.”
물론 거짓말.
지금은 세게 나가야 할 타이밍이다.
-허, 참…난감하군요.
“예. 제게도 난감한 일입니다.”
정적이 흘렀다.
나는 그쪽에서 대안을 내놓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일단 저희가 다시 한 번 얘기해보겠습니다. 혹시 교양 강의 자리라도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지.
그런 자리가 있으면 한국대 출신들을 넣으면 그만 아닌가.
왜 적선하듯 교양 강의를 쥐어주고 나더러 물러나라는 거지?
“아뇨. 피차 곤란한 상황이니 같이 말씀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한국대 쪽으로 가죠.”
-네? 선생님께서요? 흠…
“제가 가면 안 되는 자리인가요? 아니면 제가 조인창 교수님께 상황을 좀 설명해보죠.”
-아, 아닙니다. 오십시오. 내일 저녁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학과장이라도 조인창 교수는 무서운 모양이군.
“좋습니다. 6시쯤 찾아뵙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오십시오.
이놈의 학연…
학교마다 학풍이라는 게 있다.
그 학풍이 적절히 섞여야 학문이 더 발전되기에, 원칙적으로는 타학교 강사와 교수를 적극 초빙해야 한다.
하지만 이놈의 대학들은 대부분 이런 꼴이다.
자기 제자들 밥그릇 챙기는 일에만 급급하지.
“6시라… 내일 일정이 빠듯하겠네.”
나는 달력을 찢었다.
벌써 3월이었다.
말인 즉슨,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단 뜻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