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93
193화 희망 2
* * *
톨란과 눈이 마주친 마힌이 마른 침을 삼켰다.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느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분명 그런 경우의 수도 존재했다.
“왜 그러지? 살면서 죽이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을 텐데도 막상 닥치니까 그건 또 아닌 것 같나?”
어딘가 모르게 비웃는 듯한 어투였다. 의도적인 도발이라는 건 마힌도 알고 있었다. 하나, 그는 상대방의 의도를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었다.
“하나만 약속해 줬으면 한다.”
“한번 들어 보지.”
“내가 그만두고 싶을 때 언제든지 그만두고 싶다.”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말끝을 흐린 카인이 마힌에게 검을 쥐어 주었다.
“눈에는 눈.”
카인이 그리 말하자 마힌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대답하며 일어났다.
“이에는 이.”
“아, 아니지? 마힌, 내가 널 먹여 살렸는데 이제 와서 배신하겠다고?”
마힌의 결심을 읽은 톨란이 일갈했다. 하지만 한 번 떨어진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이, 이 배은망덕한 놈!”
“끝까지 구걸은 하지 않는군요, 전하.”
“그거야…….”
마힌은 노예이지 않던가. 노예에게 사과하는 주인은 없었다. 죽음을 앞두고도 톨란의 선입견은 변하지 않았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듣기 싫습니다.”
“너…….”
톨란의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스걱.
이윽고, 원한의 고리가 끊어졌다.
* * *
손거울을 보며 앞머리를 정리한 카르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돌연 어젯밤에 벌어졌던 대소동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충격과 공포, 그리고 혼란이 함께했던 밤.
그녀는 그곳에서 카인이 기신을 멈추는 걸 보았다. 기사단 전체가 몰려가도 흠집 하나 내지 못할 것 같은 코끼리를 상대로 개미 한 마리가 이변을 일으킨 것이다.
이는 결코 얕보아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다. 그와 대적할 수 있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뜻일 테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을 상대로 뻗댔다는 거지.’
참담할 따름이었다.
물론 카인과 비슷한 강자가 없는 건 아니었다. 카르비나도 몇 명 보아서 알고 있었다.
‘십좌의 제자들.’
순간,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쩌면 역사의 주인공을 마주하는 걸지도 몰랐다. 반쪽짜리지만 그녀도 무인인바, 강자에게는 경외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뭐야, 안에 있었나.”
“어, 으응.”
“왜 그러지?”
“내가 묻고 싶은데? 레이디의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오다니. 뻔뻔한 거 아니야?”
“몇 번이고 두드렸다만?”
카인이 털썩 앉자 카르비나는 허리를 쭉 펴며, 무릎을 딱 붙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 조신한 자세에 카인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태도가 바뀌어도 너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고,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거지?”
“여러 가지 있잖아,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겸손한 척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그러했다. 그동안 쌓인 빚을 갚은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나저나 엔지니어에 가입하고 싶은데 말이야. 거기 추천인 가입도 되나?”
“될 리가 없잖아, 사교 클럽도 아니고. 내가 그곳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런 권한도 받은 적 없고, 할 생각도 없어. 도리어 네가 엠이라는 걸 밝혀야 할 판이야.”
“처음에 말했을 텐데,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신기를 확보하는 거지 엔지니어란 세력에 아첨하는 건 아닐 텐데?”
금방에라도 튀어 오를 듯 카인이 팔걸이에 힘을 주자 카르비나는 두 팔을 번쩍 들어 항복을 선언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렇게 협박하지 않아도 어차피 파르발 때문에 빚진 게 있어서 보고하지 않을 생각이었어.”
“그러면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 걸 가지고, 왜 분위기를 잡은 거지?”
“……주도권이라는 걸 가져 보고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카르비나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카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지?”
“가희로 돌아가야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거든. 저번에는 어머니의 꿈 때문에 가희로 활동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노래하는 거 나도 싫어하지 않거든.”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회귀 전에도 카르비나는 종종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냈으니까.
카르비나가 웃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카인은 비로소 자신이 그녀의 미래를 바꾸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 그녀가 조직의 손아귀에 들어가 귀신이 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잘해 준다고 아무 남자나 덥석덥석 만나지 말고.”
“너한테 그런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그래. 지금까지 일어난 스캔들을 보면 죄다 미남에 부자던데, 취향 하나는 대쪽 같아서 좋더군.”
“그런 거면 그쪽도 마찬가지면서.”
카르비나가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카인이 되물었다.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니야.”
본인이 그렇다는데 구태여 들추는 것도 우스운 법. 품속을 뒤적거려 브로치 하나를 꺼낸 카인은 카르비나에게 내밀었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물건인지라 카르비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 이런 걸 주고받을 정도로 우리가 가까운 건 아니잖아. 서로 부담될 뿐이니까, 다음에…….”
“뭐라고 웅얼거리는 거지? 이건 마법 도구다. 리벨리온의 수장이 아닌 공작인 나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 어려운 일이 있으면 사용해라.”
엉겁결에 받아든 카르비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내 팬이라고 했었지.”
“네 노래의 팬이다, 네 팬이 아니라. 그 둘은 확실하게 구분해라.”
“그사이에 마음이 변한 거야?”
“좀도둑은 취향이 아니라고만 해 두지.”
“콱, 죽어 버려.”
그 뒤에도 카르비나와 몇 마디 더 나눈 카인은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며 밖으로 나왔다.
입가에 미소를 지운 그는 마차 위에 올라탔다. 카르비나에게 건넨 브로치엔 말하지 않은 기능이 하나 더 있었다.
‘위치 추적.’
6계위 마법사, 호른이 제작한 마법 도구인 만큼 7계위 마법사나 그에 해당하는 강자가 아닌 이상, 발견될 가능성은 낮다지만 그 확률은 결코 제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인은 주사위를 던졌다.
엔지니어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서.
카르비나는 엔지니어에 소속된 인물. 그녀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의 거점을 발견할 수 있을 터.
아직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없지만, 대비해야 했다. 변수는 통제해야 했으니까.
‘결국 쓰레기에서 벗어날 수 없나.’
카인은 창밖을 바라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 * *
조직의 자금줄 중 한 곳을 격파한 건 더할 나위 없이 고무적인 성과였다. 훈련소까지 통째로 날아간 마당이었다. 귀신들의 활동 범위는 크게 줄어들었을 터.
톨란을 죽이고, 네메시아를 갈가리 찢어 놓았으니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리라.
예상외라면 정작 중요한―
“크롬이 나타나지 않았군.”
나타났다면 상상 이상의 난전이 됐을 테지만, 그래도 어쩐지 섭섭했다. 그를 위해서 준비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뒤늦게 그의 마차가 있었던 장소를 밝혀냈습니다. 조사해 보니 일대에 산불이 일어났다고 하더군요.”
이어지는 오리올의 보고에 카인은 침음을 흘렸다.
“습격이라도 받은 건가?”
“산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이 반쯤 붕괴되었다고 하니 십중팔구 그럴 테죠.”
무언가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 퍼스널 네임에게 시비를 걸 정도로 정신이 나간 이는 몇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시기가 공교로웠다. 마치 리벨리온을 도와준 것 같지 않은가.
‘아니, 조직을 물고 늘어진 것에 가깝나.’
어찌 됐든 원점으로 돌아온 건 변하지 않았다. 카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주어진 운명은 언제나 얄궂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조직에 대한 복수와 아리아 구출.
두 개 다 동시에 이루는 건 무리라는 듯 상황은 급하게 흘러갔다. 그래도 이번이 끝은 아닐 테니,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터.
아무래도 아리아가 무사하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한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지, 다시 가 볼까?’
* * *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시계탑에 오른 카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아니,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아리아가 서 있었던 것이다.
“너, 는……?”
“또 뵙는군요.”
“떠난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그럴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크롬이 오지 못했던 이유와 일맥상통할 거라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름을 알 수 있을까?”
맹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게 그 입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이쪽을 올려다볼 뿐.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공작님은 저를 아는 듯한 눈치군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네.”
쓰게 웃은 카인이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 헤어진 아이와 닮았거든.”
“그때 말했던 소중한 사람입니까?”
“그래.”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아리아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지만,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런 그녀에게 카인이 꽃 한 송이를 건넸다. 언제 만날지 몰라 항상 가지고 있던 꽃 한 송이를.
“아직 피지 않은 꽃이군요.”
“급하게 준비한 거지만 마음에 들 거야.”
“제가 받아도 되는 겁니까?”
“주지 않을 거라면 가지고 오지도 않았어.”
어서 가져가라는 듯, 재촉하는 손짓에 아리아는 반사적으로 받아들었다. 귀신이 되어 처음 받아 본 선물이 얼떨떨한 따름이었다. 그렇게 한참 꽃을 내려다본 아리아가 돌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아리아입니다.”
“아리아, 예쁜 이름이네.”
수백 번은 불러본 듯 자연스러운 어투였다.
‘……성녀, 님?’
그에 아리아는 불현듯 한 사람이 떠올랐다. 착각했을 리 없었다. 지금까지 내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목소리였으니까. 눈앞에 있는 카인과 그 사람을 비교한 그녀는 탄성을 터트렸다.
“혹시…….”
아리아의 말은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가 소리를 내는 것보다 먼저 한 사람이 올라왔던 것이다.
“이야, 벌써 꼬셨어?”
앞머리를 전부 뒤로 넘긴 남자는 건들거리는 몸뚱이를 주체하지 못했다. 카인은 그를 보자마자 짧게 혀를 찼다.
크롬이었다.
퍼스널 네임 중에서도 젊은 편에 속하는 강자. 그리고 꼭 넘어야 할 산이었다.
“엘리제에게 들었을 때만 해도 혹시나 했는데 말이야. 아리아, 설마 이 녀석을 만나러 온 건 아니겠지?”
“우연히 마주쳤을 뿐입니다.”
“그래?”
크롬은 의뭉스럽게 카인을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아리아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용서가 안 돼.”
그리고 그녀를 후려쳤다.
“내가 조용히 다니라고 경고했을 텐데?”
그렇지 않아도 신의 인형에게 당해 내상을 깊게 입은 상태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일단 네메시아에 몸을 숨겼지만, 재수가 없으면 장소가 발각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꼬리를 달고 다니다니.
괜히 솟구치는 분기에 크롬은 아리아의 머리채를 잡았다.
“안 되겠군. 오늘부터 산책은 금지다. 버릇을 고쳐 주지.”
“잠깐.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먼저…….”
카인이 가까이 다가가자 크롬이 거칠게 손을 저었다.
“형씨는 참견하지 마, 이 아이는 내 동생이니까.”
‘이 빌어먹을 새끼가.’
손톱에 피가 배어들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쥔 카인은 크롬이 아리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크롬과 혈전을 벌이면 모든 위장이 들통날 테니까.
그렇게 되면 막상 아리아를 구한다고 해도 뒤가 없게 된다.
카인이 사용한 성절로 말미암아 리벨리온과 슈발체베인가의 연결 고리를 찾을 테니. 그러면 죽을 때까지 조직과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회귀 전과 다를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