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05
205화 이면 1
* * *
“저번에 무제한 가상 현실 시스템, 판게아가 발명되었다고 설명드렸을 겁니다.”
“그래, 백성광 박사가 별세했다는 것도.”
두 눈을 감은 이브가 조용하지만, 강하게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무수한 문화 산업이 발전했습니다.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욕망과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공간이 바로 판게아였으니까요.”
현실과 구분할 수 없는 가상 현실의 출현은 많은 걸 바꿔 놓았다. 작게는 부부의 사생활에서부터, 크게는 정책의 검증까지.
“하지만 아무리 정교하게 구성했다고 해도 가짜는 가짜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판게아를 근간부터 흔들었죠.”
가상 현실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영악하고, 간사하게 변했다. 그 안에는 도리도 인권도 없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직접 비인도적인 실험을 하지 않아도 판게아를 이용하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겁니다.”
가상 현실에서의 실증은 그저 데이터가 되어 쌓일 뿐이니까. 결코 해나 악이 되지 않았다.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실험이 급증하는 건 당연지사. 도덕성이 결여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렇게 판게아는 커다란 놀이동산에서 거대한 실험실이 되었습니다.”
부작용이라고 하면 부작용이라 부를 수 있는 사안.
하지만 카인에겐 당연한 과정처럼 느껴졌다. 말하자면 성장통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를 불러일으키니까.
“완전한 선은 없으니까 인류가 감내해야 하는 현실 아니었을까?”
“공작님의 말처럼 거기에서 그쳤다면 판게아는 위험하지만 유용한 도구로 남았을 겁니다. 하지만 불로불사를 바라는 권력자들이 생기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틀리게 되었습니다.”
“현실에서도 법과 체계를 무시하는 이들이 생겨난 거구나.”
“맞습니다.”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으려면 타고난 운명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려면 유전자 조작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항상 인체 실험에서 막혔다. 그동안 인류가 쌓은 철학과 신념이 배덕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판게아 안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무제한으로 실행할 수 있었다. 더구나 시간 배율을 조절하면 몇 초 안에 결과를 보는 것도 가능했다.
서류에 도장이 찍히는 것과 동시에 0과 1로 이루어진 인간이 갈려 나갔다. 오로지 소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유전자 뱅크, ‘빅 라이트’를 설립해 몸집을 불렸습니다.”
표본을 늘리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반인의 유전자를 수집하는 건 물론이고, 세계 최고의 유전학 연구 기관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를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해당 업계와 관련 학계를 휩쓴 것도 모자라 필요하다면 더러운 꼴을 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황금만능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낳은 희대의 콜라보.
최종 목적지가 불로불사이니만큼, 인간의 능력을 한계까지 밝히는 유전자 조작 기술도 덩달아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2085년 겨울, 텔로미어 무한 분열 공식이 발견되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포가 무한하면서도 안정적으로 분열하는 지점을 찾은 거죠.”
그 뒤로는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유전자 조작이 합법화되고, 복제 인간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었으니까.
“사람들의 반대는?”
“그동안 쌓인 유전자 조작 기술을 세간에 공유하는 걸로 일단락되었습니다.”
“불로불사는 소수만 누리는 특권이 되고?”
“사실 특권이라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불로불사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까요.”
“뭔데?”
“육신과 다르게 마모된 정신은 돌이킬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모두 500세를 채우지 못하고 미치거나 자살했으니까요.”
육신의 수명과 정신의 수명.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자연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기에 아무도 그 한계를 몰랐다.
하지만 신의 영역에 다가간 인류는 기어코 그 편린을 엿보았다. 생명은 고귀하면서도 불완전하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결국, 불로불사는 폐기되고 불로장생이 주류로 떠올랐다.
“2090년에 이르러 인류의 7할 이상이 유전자 조작 기술의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일상생활 속에 녹아들었다는 거네.”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도 더러 존재했습니다. 아무리 상용화되었다고 해도 기본적인 비용이 낮아지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3할이 남는 거였냐.”
카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줄곧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대륙인에 대한 것이었다.
헤브니아에서 태어난 이들은 하나같이 그 성장 한계치가 높았다. 같은 인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미형이 많았던 것도, 이 시대의 인간이 선천적으로 강했던 것도 모두 유전자 조작 기술의 여파라고 하면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변형된 형질이 대를 이어 진화했다는 소리일 테니까.
“혹시 신혈이라는 것도?”
“공작님이 예상한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겁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매몰되었던 열성 인자가 우연히 튀어나온 돌연변이, 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 테죠.”
완전기억능력, 마이크로 수면.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의 한계 내에서 발현할 수 있는 특질이었다. 어디까지나 유전적인 요인이라는 소리.
현대 문명의 시점에서 해석하니 그만큼 설명하기 쉬운 것도 없었다. 구태여 신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변명을 입에 담지 않아도 되었다.
비단, 신혈에 대한 것만 그런 게 아니었다.
헤브니아의 모든 요소가 현대 문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래서야 마소 또한 현대 문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이브의 추론에 힘을 실어 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관련이 있다고 해서 어떻게 변하는 건 아니었다. 마소는 마소일 뿐이었으니까. 유용한 도구가 돌로 만들어졌든, 철로 만들어졌든 무에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관련이 있으면 변하는 것도 있었다.
바로―
‘내 태생.’
2급 살귀였을 때만 해도 카인은 자신이 다시 태어났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묘했다. 친부모라 생각했던 이들이 사실 양부모이지 않나, 기억에도 없는 관리자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나.
마냥 운이 좋았다고 보기엔 석연찮은 점이 많았다.
전생을 기억하는 건 과연 우연일까? 필연일까?
괜스레 그 해답을 보는 게 무서워졌다.
* * *
또각, 또각.
적막한 지하 감옥에 구두 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진다. 때아닌 잡음에 정신을 차린 델리아는 철창에 얼굴을 붙였다. 누군가 오고 있었다.
이윽고, 어둠을 뚫고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중용파의 대표, 발트의 수족인 하슈겔이었다. 권력의 중추도 아니고, 그에 기생하는 벌레가 나오자 델리아는 흥미를 잃고 철창에서 멀어졌다. 하슈겔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동요하지 않겠다는 생각과 함께.
“설마 이렇게 마주 보고 대화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동종 업계에서 일한다고 해도 워낙 팍팍한 사이가 아닙니까.”
하지만 델리아는 하슈겔이 말하자마자 다시 철창에 붙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오토마타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한 어투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하슈겔은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떠벌거렸다.
“하긴 그 누가 신의 인형이 이리 허망하게 잡힐 거라고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조직?”
“그곳에서 나왔다면 죽을 목숨이라는 것도 알겠네요?”
하슈겔이 허리춤에 걸린 검에 손을 가져다 대자 델리아는 슬며시 발밑을 더듬었다. 다행히 걸리지 않고 가져온 단검이 그곳에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 순간, 어깨를 들썩인 하슈겔이 꺼이꺼이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입니다.”
“뭐?”
“농담이라고요. 그냥 한 번 놀려 보고 싶었습니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굳이 말하자면 저는 귀신이 아니라 협상가에 가깝겠군요. 주고받고, 그런 거 좋아하거든요.”
그제야 델리아는 하슈겔이 조직이 아닌 엔지니어에 소속된 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광견이 아니라니 다행이지만, 어째서…….”
“정체를 밝히냐고 묻고 싶은 거겠죠. 뭐, 뻔하지 않습니까. 손을 잡기 위해서입니다.”
“하, 나와 손을 잡고 싶다고?”
“잡지 못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어차피 우리 둘 다 다른 목표를 바라보고 있을 텐데요. 괜히 경쟁하면서 힘 빼는 건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시다시피 제가, 아니 저희가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신기입니다. 반면에 당신은 하샤 왕국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일 테고요. 맞습니까?”
“부정하지 않을게.”
신기와 권력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를 택할 터. 하지만 그것도 여기에서 나가 피아란이란 이름을 되찾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군부파와 중용파의 묵인이 필요했다.
“듣자 하니 지니얼 장군님이 다니엘 경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했다고 하더군요. 정말 이상한 일 아닙니까? 아무리 아들이라지만 깐깐하기로 이름난 지니얼 장군님이 자리에서 물러나다니요.”
델리아를 은근하게 쳐다본 하슈겔이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보아하니 다니엘 경에게 재미있는 장난감을 선물한 것 같더군요. 덕분에 저는 편해졌지만요.”
“빙빙 돌리지 말고 원하는 거나 말해.”
“신의 무덤이 있는 장소를 말씀해 주시면 당신을 변호해 드리겠습니다. 제레미 백작님은 제 말을 잘 듣는 편이니, 다니엘 경과 함께 당신을 꺼낸다는 선택지도 어렵지 않게 고를 수 있을 겁니다. 오토마타는 세력을 넓혀서 좋고, 엔지니어는 신기가 늘어서 좋고. 상부상조하는 길 아닙니까?”
“다 같이 죽자는 식으로 다니엘 경이나 제레미 백작에게 말할 수도 있어. 어차피 네가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도 없잖아?”
“에이,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시는군요. 모르는 척한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조직의 활동 범위도 줄어든 참 아닙니까. 서로 부딪치지 않고, 영역부터 늘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짜증 나는 일이지만 지극히 옳은 판단이었다. 조직이 몸을 움츠린 이때야말로 세상에 나가기에 적합한 시기였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델리아도 마음을 바꿔 먹을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있어 봤자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는 걸 느끼고 있었으니까.
“슈발체베인 공작은 어떻게 처리할 건데. 내가 나가려면 그의 눈은 가리고 있어야 하잖아.”
“그는 신경 쓰지 못할 겁니다. 슈발체베인 공작령으로 돌아가야만 할 이유가 생길 거거든요, 그것도 지금 당장.”
하슈겔의 입가가 벌어진다. 누가 보아도 꿍꿍이가 있는 듯한 미소였다.
하지만 델리아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녀가 지하 감옥에 갇혀 가장 먼저 생각한 게 바로 카인이었던 것이다. 델리아가 보기에 카인은 자신의 모습을 감춘 간웅이었다.
사담을 신청한 것도 그렇고, 보구를 준비한 것도 그렇고, 노렸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얕보지 않는 게 좋을걸? 그는 네게 당할 정도로 무른 사람이 아니니까.”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자기가 이길 거라고 단언하는 사람의 뺨을 후려치는 게 인생의 낙이거든요.”
“정말 못돼 먹었네.”
“당신만큼은 아닐 겁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헐뜯으며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