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25
225화 선별식 1
* * *
아니나 다를까, 우라의 태도가 급변했다.
“그런데 이거 아쉬워서 어쩌나. 보다시피 아리아는 내가 아끼는 아이라서 말이야. 넘겨주기 어렵겠는걸.”
“믿기 어렵군.”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물론 우라가 진심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우라와 카인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자 엘리제는 아리아를 데리고 한 걸음 물러났다. 척하면 척. 사연이 많아 보이는 둘이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우라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설령 카인이 원치 않더라도.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그녀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렇게 긴장하지 말라고. 만난 게 너무 기뻐서 장난친 것뿐이니까. 나는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관여하지 않을 거야.”
한태진.
들릴 듯 말 듯 자그마한 목소리에 카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우라의 반응이 퍽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기만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저 배포가 큰 것뿐인가.
대화가 길어질수록 갈피를 잡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우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 참, 지금은 공작님이던가.”
“뭐하자는 거지?”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준 카인이 조심스럽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해진 그 수발에 우라가 탄성을 터트렸다.
“못 본 사이에 더 강해졌잖아. 성장세가 무서울 정도야.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악동같이 웃은 우라가 카인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내일, 선별식이 끝날 즈음 조직이 움직일 거야. 크롬도 나설 예정이지. 잘하면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도 있을 거야.”
마치 부추기는 듯한 어투였다. 본디 귀신이 취해서는 안 되는, 아니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우라라면 가능했다. 조직이 건 족쇄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는 그녀이기에.
“함정인가.”
“속이려는 게 아니야. 애당초 그런 얕은수가 너에게 통할 리 없잖아.”
이내, 쐐기를 박듯이 덧붙였다.
“그리고 전에 말했지 않아? 나는 미남계에 약하다고. 간절해 보이는 네 모습에 감명받았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말이니까 하는 거지. 그러면 살아서 보자고.”
우라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폭풍같이 사라졌다. 다른 두 명과 함께.
홀로 남은 카인은 두 눈을 감았다.
차라리 적대적이면 모든 걸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어 편하련만, 친근하게 다가오니 거리를 잴 수 없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호의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감당할 수 있는 변수였다. 그때처럼 특별 손님은 모실 수 없지만, 사용할 수 있는 패는 많았던 것이다.
아리아를 데려오기 위해 기나긴 가시밭길을 걸었다.
이제 마지막 한 걸음만 남겨두고 있는 상황.
후퇴는 없었다.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
* * *
나힘달이 자랑하는 대광장에 모인 이들의 수는 물경 4만. 이른 아침임에도 지평선 너머까지 신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공작이라는 계급 덕분에 상석에 앉을 수 있게 된 카인이었지만, 그곳마저도 부산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다른 동료들은 어디에 있나 싶어 아래를 쳐다보았지만, 시선에 들어오는 이는 없었다.
사람들에게 밀린 건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던 이브조차 보이지 않았다. 인파라는 단어는 이를 일컬어 탄생한 말일 터.
시계탑의 시침과 분침이 직각을 이룬 건 그때.
댕, 댕, 댕.
아침 9시 정각이 되자마자 천년동자는 수많은 성기사와 신관들의 보호를 받으며 사열대로 올라갔다. 동시에 그의 목소리가 마법을 통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올해도 모여 줘서 고마워. 마신 제로원께서 설파하신 말씀이 아직까지도 건재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이네. 안심하고 내년을 맞이할 수 있겠어. 모두들 내가 나오기 전부터 서 있느라 고생했을 텐데, 중요한 말만 하고 넘어갈게.”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덕담을 하듯이, 노련한 스승이 미숙한 제자를 꾸짖듯이 훈화를 이어 갔다.
신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대륙을 아우르는 거인이 가르침을 주는 기회는 몇 없기에 모두들 두 손을 꼭 모아 기도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 알렉산더가 천년동자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는 자연스럽게 천년동자 앞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천년동자가 격려하듯이 알렉산더의 어깨를 두드린 건 덤.
수만 명이 보는 앞에서 우애를 공고히 다진 두 사람은 보란 듯이 악수를 나누었다.
여기까지라면 으레 있는 행사 절차 중 하나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알렉산더의 등에서 날개가 돋아나면서 상황이 일변했다.
머릿속에서나 상상했던 천사가 눈앞에 나타나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경탄을 터트렸다.
무리도 아니었다. 크리스탈을 깎은 것처럼 투명하고 얇은 날개는 보는 이로 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카인의 눈에는 조잡한 쇼처럼 보였다.
날개는 신의 기적이 아니라 과학의 총아였던 것이다.
당연히 우스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에게 받은 선물을 다시 인간에게 뽐내고 있으니, 이게 주객이 전도된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거기에 신관처럼 흰옷을 입고 있으니 더욱더 기괴했다.
영락없는―
“비둘기네.”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힘차게 날아오른 알렉산더가 대광장을 가로지르며 기념품을 떨어트렸다. 신자들은 닿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알렉산더를 잡고자 했다.
누군가 진보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대륙인들의 눈에는 알렉산더가 신의 사자로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얄궂은 일이었다.
그들이 현혹된 건 이미 한 번 걸었던 길이었으니까.
* * *
선별식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각.
마리에트의 호출을 받은 비에나가 응접실에 들어갔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미안해요, 비에나 예성녀. 이때가 아니면 말할 시기를 놓칠 것 같아서 말이에요.”
“아닙니다.”
비에나에게 찻잔을 건넨 마리에트가 짐짓 자애롭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선별식 때문에 고민이 많을 거 같은데, 아닌가요?”
“네, 아닙니다.”
마리에트의 속내를 아는바, 비에나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그 말을 끊었다.
칼로 자른 듯 예리한 대답에 마리에트의 미소가 금이 간 건 당연지사. 하지만 수많은 인간 군상과 싸워 성녀 자리를 쟁취한 그녀였다. 금세 깨진 조각을 주워 담은 마리에트는 능청스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가기로 마음먹은 곳이 있나 보죠?”
“슈발체베인 공작님과 함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 슈발체베인 공작령. 좋은 곳이죠. 하지만 비에나 예성녀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군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시사철 눈만 내리는 곳에 비에나 예성녀가 활약할 자리는 없다는 소리예요.”
핵심을 찌르는 말에 비에나는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마리에트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성녀들의 특기가 제각각인 만큼 빛날 수 있는 자리는 정해져 있었다.
예를 들어 그녀가 주역이 될 수 있는 장소는 직접적인 무력이 필요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결코 눈밖에 볼 게 없는 영지가 아니었다.
“차라리 알렉산더 님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듣자 하니 그분은 당신을 눈여겨보는 것 같던데요.”
“누가 될 것 같아 그분은 고려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을까요? 선택지가 많아서 나쁠 건 없잖아요?”
“분에 넘치는 제안입니다. 아직 그분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문도 있고요.”
궁지에 몰아넣고 본론을 꺼내는 솜씨가 제법이지만, 이미 간파된 술수였다. 마리에트와 알렉산더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똑똑히 들은 비에나는 그녀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래, 네 말대로 제값은 하겠더군. 그러니 잠자코 기다려라. 어떻게든 널 데려가 줄 테니.’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기인이 그렇게 단언했는데 마음이 바뀔 리 없었다.
그 모습에 말로 설득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한 마리에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간곡히 부탁하는데도 안 되는 건가요?”
“아쉽지만, 네. 제 결정은 바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비를 맞기 싫다고 굴을 파고 들어가면 영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법이에요. 안타깝지만 그런 면에서 비에나 예성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군요.”
세 치 혀로 성녀가 된 이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으나, 비에나는 감내했다.
“성녀가 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를 거예요.”
그건 비단 장소에 대한 단점뿐만이 아니리라.
거절할 수 없는 강요. 이른바, 최후통첩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못 먹어도 고였다. 설령 성녀가 될 수 있다고 해도 그 본질이 꼭두각시라면 안 걷느니만 못한 길이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비에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성녀님이나 잘 하시길.”
* * *
대강당에 모인 이들의 면면을 살핀 카인이 휘파람을 불었다. 어디를 보나 어떻게 보나 대륙에서 알아주는 인사들뿐이었다. 물론 십좌나 왕족들이 자리한 건 아니었다. 그들이 나서기엔 선별식조차 자그마한 이벤트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는, 카인도 마찬가지였다.
아래에서 세는 것보다 위에서 세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높은 서열에 위치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아예 못 본 척 지나가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구설수에 오르지 않게 몸가짐을 바르게 하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선별식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었다. 무려, 예성녀의 후견인이 될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성녀 후보.
잘만 하면 연을 맺었던 예성녀가 성황교의 차기 실세가 될 수 있는데 가만히 있을 권력자는 없었다. 긁지 않은 복권인 것이다.
하물며 성녀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신성 마법에 능통한 인재를 가까이 두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노예 시장에서 이뤄지는 거래를 예쁘게 포장한 듯한 자리에 앉은 카인은 턱을 괴었다.
오토마타에게 한 방 먹이겠다는 목표가 없었다면 입석하지도 않았을 지루한 자리였다.
그때, 옆자리에 익숙한 얼굴이 앉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이 두 번째였다.
“바울?”
원수는 외다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해야 할까. 카인이 바울을 알아봤듯이 바울 또한 카인을 알아보았다.
배정된 자리를 확인한 그는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짧게 혀를 찼다.
“너도 선별식에 참관한 건가. 불순하기 짝이 없군.”
“가만히 듣고 있자니, 무례하군. 어디까지나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온 거다.”
“누가 너 같은 녀석 밑으로 들어가겠나.”
“글쎄, 네 예상보다는 훨씬 많을 것 같은데 말이야.”
“혹시나 싶은 마음에 말하는 거지만, 예성녀에게 손대는 일은 없도록 해라.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해도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종자가 나온다면 불쾌해질 것 같으니까.”
성녀는 성황교에 모든 걸 바친 몸. 규율에 얽매인 이상, 천년동자의 허락 없이는 혼인할 수 없는 신세였다. 그것은 예성녀 또한 마찬가지.
이성과 가까워지는 게 용납되지 않은 처녀들이 바로 그녀들이었다.
한밤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 마음속 장미는 카르비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순간, 바울의 얼굴이 썩어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