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50
250화 마신 2
* * *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수단.
고딘과 나이아 둘 다 소리에 민감하다는 걸 감안하면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추측이었다.
과연 신기 너머에 있는 이는 누구인가.
아쉽지만 자세한 사정은 이 자리에서 알아낼 수 없었다. 나이아가 들은 게 맞다면 열흘은 더 필요할 테니까.
아쉽지만 그 시간이라면 슈발체베인가에 도착하고도 남았다.
신기를 가만히 내려다본 카인이 고갯짓했다.
“이건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이제 내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니까.”
허락을 맡는 게 쉽지 않을 줄 알았건만, 고딘의 수락은 묻는 것보다 더 빠르게 떨어졌다. 어딘가 모르게 홀가분한 기색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면 다음에 뵙겠습니다.”
* * *
카인과 그 일행들이 나간 뒤, 고딘의 시선은 자연스레 로이나에게로 향했다. 아까부터 말이 없던 그녀였다.
“실망한 게냐.”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지만 로이나는 헤매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요.”
놀라운 진실이 연달아 터져서 어안이 벙벙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것도 할아버지의 능력이니까요.”
“로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던데 말이야.”
“로윈, 그 아이 말이죠.”
뒷이야기를 듣고 나니 로윈이 고딘을 증오한 이유를 얼추 알 것 같았다.
‘누님은 판토마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그런 소리를 한 까닭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자신과 자주 비교당한 로윈이었다.
로이나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당시 배경이 그러했다. 고딘 또한 후계자 자리엔 유능한 이가 올라가길 바랐고.
그런 환경 속에서 우연히 고딘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 비뚤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제 할아버지를 업신여기는 마음이 커졌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세월이 지날수록 견고해졌을 테지.
과거로 돌아가 허심탄회하게 대화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아니면 똑같은 결말이 반복되었을까.
‘모르겠어.’
한숨을 내뱉은 순간, 따스한 온기가 손등에서 느껴지자 로이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로이나, 너밖에 없구나.”
고개를 드니 며칠 사이에 십 년은 늙은 듯한 고딘이 보였다.
“떠나지 않을 거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힘없는 목소리였다.
고딘 판토마라고 불리는 거상의 민낯.
로이나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고딘은 언제 어디에서나 자랑스러운 그녀의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설령 신기의 힘을 빌렸다고 한들, 그가 여태까지 한 노력까지 물거품이 되는 건 아니었다.
상단에 인재들이 모인 건 신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고딘이라는 사람이 지닌 매력 때문이었으니까.
로이나 또한 그 증거였다.
그녀가 배운 건 모두 고딘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였다. 결코 신기가 가르쳐 준 게 아니었다.
고딘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건 불가능했을 터.
그래, 그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고딘의 손을 마주잡은 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제가 할아버지를 두고 어디를 가겠어요.”
* * *
판토마가에서 떠나는 날이 되었다.
중간에 귀찮은 이를 한 명 만난 것 빼고는 모두 예상대로 흘러갔다. 아니, 그마저도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차기 황제에게 똑똑히 제 모습을 새겨 놓을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카인은 여느 때처럼 지팡이를 짚고 절뚝절뚝 걸어갔다.
저택 밖까지 따라간 로이나가 마차 앞에서 입을 열었다.
“일단 저는 가문에 남아 할아버지를 돕기로 했어요. 금방 정리하고 돌아갈 테니까 노여워하지 마세요.”
“천천히 와도 된다.”
“지체되는 시간이 길어지면 손해가 극심할 텐데요.”
“너보다 소중한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예상, 아니 기대도 하지 않았던 답변이 들려오자 로이나는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진심 어린 어프로치가 통한 게 틀림없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는걸요.”
“돈.”
하지만 그런 로이나의 상상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자, 잘못 들은 것 같은데 한 번만 더 말씀해주실래요?”
“돈으로 갚는 게 확실하다고 했다.”
애석하게도 로이나의 귀는 멀쩡했다. 망가진 건 카인의 머리.
솔직하다 못해 노골적인 요구에 로이나는 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공작님은 공작님이네요.”
* * *
판토마가에 검은손을 뻗치던 와중에 삼황자, 하이렌 베리타에게 걸린 한 단체가 도마 위로 올라갔다.
다른 곳도 아닌 5대 상단으로 이름 높은 가문에서 일어난 파문. 제국 내부에서 심각하게 거론된 건 물론이고, 당대 황제까지 그 귀추를 주목했다.
사실 사건 자체는 평이했다. 모략과 모반이 판을 치는 게 기득권층의 일상이었으니까.
눈 감으면 코를 베어 가는 세상에서 그런 단체가 있다는 건 그리 큰 충격은 되지 못했다.
문제가 되는 건 사태가 진전되는 동안, 그 흔적을 잡아낸 이가 한 명도 없었다는 것.
미지와 무지는 공포를 불러왔다.
그만큼 새롭게 드러난 단체, ‘조직’은 여러모로 불분명한 게 많았다. 크기와 규모, 시설, 소속인, 그리고 목적. 모든 게 오리무중이었다.
불씨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장작이 날아왔던 것이다.
[대범람의 흑막으로 지목된 조직, 과연 그곳은 어디인가?] [천년동자의 공식 선언, ‘조직은 이단’.]셀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중립을 유지하던 천년동자가 보기 드물게 지원 사격에 나섰다. 당연히 성황교에서는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교황이 직접 성명문을 발표한 것이다.
사람들의 뇌리에 조직이 반사회적이고, 비인간적인 집단으로 낙인찍히는 건 한순간이었다.
대륙적인 관심이 높아지는 건 당연지사. 이는 회귀하기 전에도 없었던 사건이었다.
“그래, 이렇게 되었단 말이지.”
신문을 반으로 접은 카인이 시원하게 웃었다.
미래가 바뀌어 가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것도 더할 나위 없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조직, 오토마타, 엔지니어.
세 단체가 서로에 대해 몰라서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저 한 번 폭로하기 시작하면 전면전이 되기에 함구하고 있었던 거였다.
말하자면 암묵적인 합의.
그런데 이번에 오토마타가 먼저 룰을 깨부수었다.
직접적인 대립도 불사하겠다는 신호탄.
앞으로 조직이 어떻게 나설지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았다.
조직으로선 거기에 티탄과 아이언을 잃었으니, 한동안 골치가 아플 테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자리에서 일어난 카인이 지팡이를 들었다. 신기가 말했던 열흘 후가 바로 오늘이었다.
즉, 오매불망 기다렸던 상대와 접촉할 수 있는 날이라는 뜻.
아니나 다를까, 지하 정원에 들어가자 먼저 온 동료들의 얼굴이 보였다.
가장 앞에 앉아 있는 건 역시나 나이아, 신기를 구하는데 활약한 일등공신이었다.
“냉큼 앉지 않고 뭐하는 것이더냐!”
흥분한 나이아의 어깨를 누르며 일어난 이브가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고딘에게서 받은 신기, 통신기는 이브가 조정해 일반인도 들을 수 있도록 가청 주파수를 끌어올린 상태였다.
모두가 숨을 죽이는 가운데, 통신기에 불이 들어왔다. 동시에 무언가 잡음 같은 게 들려왔다.
“고딘? 들리나? 들리면 대답해 봐라.”
고딘을 찾는 소리가 나오고 나서야 카인은 제대로 연결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주인이 바뀌었다.”
“너는 누구지?”
중간에 불쾌한 소음이 종종 들려왔지만 듣는 데 이상은 없는바, 카인은 눈살을 찌푸리기보다 여유롭게 맞받아치는 데 주력했다.
“고딘 상단주에게 이걸 선물받은 사람.”
“고딘이? 이걸 네게 넘겼다고?”
“저번에 네가 한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걸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더군. 그 탓인지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었다. 뭐, 나이가 들어 쇠약해진 것도 있을 테지만.”
“그래서 그의 뒤를 너가 잇게 되었다는 건가.”
장내에 적막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사내는 결정을 내린 건지 곧장 서론을 건너뛰었다.
“고딘에게 이걸 받았다면 나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테니, 길게 말하지 않겠다. 뭘 원하지? 금력? 권력? 그것도 아니면 무력인가? 나중에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준다고 약속하면 뭐든지 손에 쥐어 주겠다.”
애석하지만 다 필요없었다. 얻을 수 있고, 후일 얻게 될 것이니까. 지금 당장 궁금한 건 단 하나였다.
“네 정체가 알고 싶다.”
“고딘이 괜한 사람에게 전달한 것 같군. 거래는 없던 걸로 하지.”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지만 카인의 입장에서는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급한 건 내가 아니라 너일 텐데? 대범람을 통해 나힘달에서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수포로 돌아간 상태니까.”
“그게 무슨…….”
“구태여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 거래 같은 말을 꺼낸 걸 보면 뻔한 이야기가 아니겠나. 무사히 빠져나왔다면 이렇게 연락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내 말이 틀린가?”
카인의 머릿속에 수많은 키워드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나힘달이라는 지리적 위치로 볼 때, 조직이나 엔지니어가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곳은 오토마타의 본진이었던 것이다.
신기를 다루고, 5대 상단을 일굴 정도로 뛰어난 지능. 그리고 유사시엔 대범람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까지.
‘신의 인형.’
주어진 단서로 추론할 수 있는 존재는 그거 하나뿐이었다.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면 여기에서 대화를 끝내지. 정체도 모르는 녀석과 거래하는 취미는 없거든. 미리 말해 두지만, 네가 거절하는 즉시 이건 파괴될 거다. 거짓말이라 치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오토마타가 관리하는 신기가 바깥에 나온 것만 해도 기적이라 할 수 있을 터. 눈앞에 있는 통신기가 사내의 유일한 창구라는 걸 알기에 카인은 마음껏 으름장을 놓을 수 있었다.
“……내 이름은 제로원이다.”
그 말엔 카인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듣자마자 연상되는 칭호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마신.’
인류에게 등불을 내려준 선지자.
마탑의 창시자이자 마법사들의 어버이.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사내의 주장을 일고의 가치도 없이 쳐냈을 거다. 신성 모독이라면서.
하지만 카인은 달랐다. 그는 헤브니아가 현대 문명의 산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신같이 초월적인 존재가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다는 것 또한.
마신 제로원이 안드로이드라는 건 놀랍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다. 인간이 신으로 착각할 수 있는 존재는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과학이 진보했던 세계에서는 더더욱.
호른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듯 격렬하게 손을 흔들었지만, 카인은 애써 고개를 돌렸다.
“본인인가?”
“그래, 거짓된 명성에 불과하지만. 아니지, 너는 놀라지 않는 건가?”
“무엇에 놀라야 하지? 신인 주제에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것? 이렇게 말로만 의지를 전달하는 것?”
호른 같은 마법사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광하겠지만 카인은 아니었다.
그보다 그의 관심을 끈 건 제로원을 감금한 이였다.
사실 추측할 것도 없었다.
나힘달에 억류되어 있다면 원흉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그곳은 사실상 한 사람의 의지로 돌아가는 장소였다.
‘천년동자.’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