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353
353화 타파 2
* * *
세트의 말에 호응하듯이 잿빛 액체가 솟구쳐 올랐다. 마력과 섞인 나노 마테리얼은 기묘한 광채를 뿜어냈다.
구시대와 신시대의 완벽한 합치.
‘위험한걸.’
법성이라는 칭호를 거머쥔 호른이기에 알 수 있었다. 십좌전에 출전했던 세트와 눈앞의 세트는 확연하게 다른 사람이라는 걸.
‘가주님이 오기 전에 버틸 수 있으려나.’
특기인 고속 사고로 모의전을 펼쳐보지만, 도출되는 결론은 절망적이었다. 패배하는 그림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다만 언제 패배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이렇게 된 이상, 여기에 온 목적이라도 이뤄야 했다.
호른은 손에 쥔 브로치를 이브에게 던졌다.
“이브. 아리아를 데리고 먼저 가 있어. 곧 뒤따라 갈 테니까.”
그게 의미없는 발언이라는 건 이브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는 듯 한 점의 의심도 품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세트가 히죽거렸다.
“이로써 호른 당신이 이길 가능성은 더욱더 낮아졌네요.”
호른이 두 팔을 활짝 펴자 그의 주위로 일곱 개의 고리가 피어났다.
“하지만 개 같아서 피하고 싶을 정도로 진득하게 싸워 줄 수는 있어. 항상 그렇게 싸우는 사람을 곁에서 보았거든. 아마 재미있을 거야.”
탁.
호른이 손가락을 튕기는 것과 동시에 온갖 마법이 범람했다.
* * *
쿠웅.
벌써 몇 층이나 내려왔음에도 아찔하게 떨리는 진동에 아리아가 우려를 표했다.
“괜찮을까요?”
“괜찮더라도, 혹은 괜찮지 않더라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금방에라도 뛰쳐나갈 듯한 표정인지라 이브는 짐짓 엄하게 아리아를 타일렀다. 애당초 호른을 걱정할 여유도 없었다. 아래층에 내려오면서 분위기가 일변했으니까.
그 연유는 명확했다.
‘공장?’
꽤 깊은 곳에 도달한 건지 신의 병사가 제작되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보여졌다. 컨베이어 벨트에 매달려 이동하는 게 꼭 도축된 고깃덩어리를 보는 듯했다.
생리적인 혐오감은 둘째치더라도 중요한 시설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번 전쟁의 흥망을 결정하는 순간이 지금일지도 몰랐다.
갈 땐 가더라도 뒤처리는 확실하게 하고 가야 했다.
이브의 머리카락이 기판에 꽂혔다. 동시에, 온 공장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장 탱크에서는 부속품을 하염없이 토해 냈고, 자동화 기기는 엉뚱한 곳을 겨냥해 움직였다. 시스템에 접속해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잠근 건 덤이었다.
이걸로 생산 능력은 마이너스를 치고 들어갈 터.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설마 전자 기기를 조작한 건가? 허, 이 시설은 나름대로 보안 체계가 잡혀 있을 텐데 말이야.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내게 가르쳐 주지 않겠나?”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이브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백의를 걸친 노인이 허공에 떠 있는 게 보였다. 이브는 저와 같은 인물을 카인에게 들은 적 있었다.
‘콜몬도.’
엔지니어 소속 연구원. 세트의 할아버지이자 신의 병사를 제작하는데 공헌한 인물이라고.
이브가 가만히 콜몬도를 관찰하는 동안, 콜몬도 또한 은자의 비경에 침입한 불청객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한평생 신기만 붙잡고 살아온 그이기에 이브의 정체를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신의 인형, 그것도 괴성조차 한 수 접어 줄 정도로 특별한 신의 인형이라는 걸.
그야말로 신이 빚은 걸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콜몬도의 눈빛에 탐욕이 맴돌았다.
저것만 있으면 더욱더 높이 도약할 수 있다. 병사 같은 게 아니라 정말 인형을 제 손으로 만들 수 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에 몸을 맡긴 그는 이마를 밀었다.
순간, 봇물처럼 터져 나온 나노 마테리얼이 외골격을 대신했다.
전투 기어, 비슈누.
허공을 밟고 선 콜몬도의 두 손에 인력장과 척력장이 머물렀다.
“다시 묻지.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내게 가르쳐 주지 않겠나?”
“부탁하는 자세가 고작 그겁니까? 아직 멀었군요. 당신 어머니에게 예의라는 걸 다시 배워 오세요.”
“비협조적인 자세로군. 어쩔 수 없지, 직접 해체하는 수밖에.”
“그 전에 제가 당신을 해체하는 게 더 빠를 것 같군요.”
콜몬도를 막아선 이브가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리아, 혼자서 갈 수 있겠습니까?”
“문제없습니다.”
“그러면 어서 가십시오. 여기까지 왔으니 카르비나를 찾는 건 쉬울 겁니다.”
이브에게서 브로치를 건네받은 아리아가 벽을 밟고 내달렸다. 콜몬도가 척력장을 쏘았으나, 허사였다. 그녀는 토끼처럼 가볍게 뛰어넘었다.
“어딜 감히!”
콜몬도가 두 손을 모아 역장을 전개하려고 했으나, 날카롭게 벼려진 은빛 머리카락이 그 앞에 나타나 저지했다.
“약속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빌어먹을 기계 덩어리가.”
“피차일반입니다, 늙은 고깃덩어리.”
* * *
카르비나는 나오지 않는 침을 억지로 삼켰다. 회심의 도주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뒤, 그녀는 독방에 갇혔다. 빛도 한 줌 들어오지 않는 독방에.
배급되는 식사는 제한적이었고, 물 또한 어쩌다 한 모금씩 마실 수 있었다.
극한의 환경.
당연히 살아나갈 수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 열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문이 폭발하듯이 열렸다.
“데리러 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온 건 가슴팍에나 올까 싶은 소녀였다. 카르비나는 서둘러 뻣뻣하게 굳은 기억의 늪을 뒤적거렸다. 분명 루드니아 공작령에서 스쳐 지나가듯이 보았다.
그러니까 이름이―
“아리아?”
“네, 맞습니다. 공작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아직 날 잊지 않았나 보네.”
아리아가 다가와 흡귀에 손을 대려고 하자, 카르비나는 황급히 제지했다.
“잠깐, 대비도 없이 만졌다가는……!”
“만지면 어떻게 되기라도 하는 겁니까?”
고개를 갸웃거린 아리아의 손에는 이미 흡귀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리아의 어깨에 팔을 걸친 카르비나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른 사람들은?”
“일단 여기까지 온 건 저뿐입니다.”
그 말만으로도 은자의 비경 내부에서 얼마나 많은 격전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끼리 올라가야 한다는 거네.”
한 번 도주해 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바깥으로 나가려면 수많은 난관을 타파해야 한다는 걸.
솔직히 말해 아리아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가녀린 인상은 그렇다고 해도, 어린 나이가 걸렸다. 이때 지닐 수 있는 실력은 뻔했으니까.
하지만 흡귀를 맨손으로 푼 건 요행이 아니라는 듯 아리아는 어렵지 않게 신의 병사를 상대했다.
그녀의 손에서 쏘아진 단검은 여지없이 놈들의 미간을 꿰뚫었고, 발에 걷어차인 녀석들의 머리는 통째로 날아갔다.
자그마한 체구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굉장한 괴력에 놀란 게 한 번, 하염없이 뿜어져 나오는 마력에 한 번 더 놀란 카르비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리아는 공성추 못지 않은 추진력으로 벽과 벽 사이를 누볐다. 신의 병사들은 볼링공이라도 된 건지 그녀를 제지하지 못하고 부딪치자마자 뒤로 쓰러졌다.
카르비나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자 아리아는 뒤를 돌아 그녀의 안색을 확인했다.
“어디 아프십니까? 업어드려야 합니까?”
“아니, 내 발로 갈 수 있어.”
“그러면 갈 길이 머니, 서둘러 주셨으면 합니다.”
* * *
쿠아앙! 쾅!
흐릿한 하늘에서 소닉 붐이 연달아 터졌다. 그 충격에 미친듯이 쏟아져 내리던 눈이 한순간에 증발했다. 공백 지대가 된 허공 위를 카인과 후딘이 내달렸다.
두 궤적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빙산이 여럿 허물어졌다.
쾅!
섬광과 섬광이 부딪치며 거대한 절삭음이 천지를 뒤덮고 사라진 건 그때.
잘려져 나간 쿠로도 산맥의 단면은 유리라도 되는 듯 매끈하기 그지없었다.
모든 게 무너지고, 스러졌다.
산사태를 뚫고 하늘 높이 치솟은 카인이 만천도를 깨부술듯 후려쳤다. 하나, 무의미한 발악이었다.
전투 기어, 시바의 보조를 받은 후딘은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푸쉬익, 푸식.
지속 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삿바늘이 그의 목덜미를 뚫었다.
“이, 약쟁이 새끼가!”
“적재적소에 기물을 사용하는 것 또한 실력이다.”
“아주 잘났군.”
어금니를 꽉 문 입술 사이로 끓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천변만화하는 보구, 만천도와 어떤 상황에든 적응할 수 있는 무인의 조합은 카인이 겪은 그 어떠한 고비보다 드높았다.
한 번 싸워 보았기에 전보다 수월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건 오만에 불과했다.
‘이게 진정한 광성의 실력인가.’
블랙 미러의 특성상, 어디를 어떻게 노려도 완벽한 카운터가 날아왔다. 더구나 이미 한 방 먹은 뒤였다. 후딘이 꺼낸 건 색다른 개념이었다.
재생 불가의 저주.
그야말로 급소를 치는 일격이라 할 수 있었다. 마냥 밀어붙이는 게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정련정심 최대의 장점이 사라진 셈.
물론 급속 회생은 그조차 무시한 채 꾸물거렸지만, 극단적으로 느려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십검을 발휘해야 하는 손가락도 온전치 못했다. 벌써 4개나 잘린 상태였던 것이다. 출력이 낮아지니, 사용할 수 있는 선택지도 저절로 줄어들었다.
그러니 카인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조금씩 밀려나고 있다는 걸.
“저번에 보여 주었던 그 비정상적인 속도는 어디로 간 거지?”
“비장의 수를 예고하고 꺼내는 것만큼 볼품없는 행동은 없지 않나. 채근하지 않아도 볼 수 있을 거다.”
짐짓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카인이었으나, 후딘은 그 안에 담긴 뜻을 읽을 수 있었다. 사실, 여기까지 오면 더 볼 것도 없었다.
“역시 그때만 보여 줄 수 있는 거였나. 이거 누가 누구를 비난하는 건지 모르겠군. 약쟁이는 내가 아니라 네가 아닌가.”
짧게 혀를 찬 카인이 후딘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쾅!
빙산에 날아가 처 박히면서도 후딘은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차피 승자는 정해져 있으니, 천천히 즐기겠다는 태도.
‘개 같은 자식이.’
카인이라고 용의 인자를 꺼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성률이 낮아 부스트 드러그가 없으면 무용지물이었다.
즉심통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든 건 그때.
‘정말로 낮나?’
의식하지도 않았건만, 그런 의문이 뇌리를 관통한다. 순간, 바퀴벌레를 먹어 억지로 그 인자를 일깨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제노바에 대항하기 위해 카인이 내놓았던 묘수에 용의 인자는 응해 주었다.
돌이켜 보면 처음 얻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비록 인위적인 자극이 가해졌다고는 하나, 용의 인자가 나온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깨어날 때가 머지 않았다.’
빠르게 내려진 결론에 전투 논리가 눈을 떴다.
가지고 있는 개념, 영구적으로 변환한 체질,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 그리고 지금까지 보고 듣고 경험한 것 일체가 상호 작용한다.
‘맞아, 그 수가 있었나.’
즉심통으로 인해 발현된 본능이 최단 경로로 정답을 도출해 냈다.
초월 감각이 미래 예측으로, 혈류 가속이 혈류 배속으로, 급속 재생이 급속 회생으로.
여태 얻은 개념들은 허물을 벗고 한 단계 나아갔으나, ‘한계 해제’는 아직 그 끝을 보여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