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352
352화 타파 1
* * *
“자신의 역량을 과신하는군.”
팔뚝을 들어올린 후딘이 검지를 치켜세워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순간, 무미건조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시스템 체크] [구동 확인 완료] [반발성 필드 전개]그의 품 안에서 흘러나온 나노 마테리얼이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전투 기어, 시바.
대인 섬멸 지향형 외골격 장갑. 크기의 한계가 있기에 전체적인 출력은 기신에 미치지 못하지만, 일개 개인을 초인의 영역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말 그대로 인간을 상대함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신기였다.
머나먼 신의 시대에서도 보기 힘든 명품이었다.
후딘이 여태껏 엔지니어에게 도움만 주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는 동맹의 상징이자 우애의 증표로 이렇게나 완벽한 전신 갑주 한 벌을 양도받을 수 있었다.
푸쉬이익.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회로도처럼 생긴 바늘이 후딘의 목덜미에 꽂혔다. 등 뒤에 연결된 용액이 차츰차츰 줄어드는 건 한순간.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카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부스트 드러그의 일종인가.’
용의 인자를 일깨우기 위해 약물을 사용한 그이기에 알 수 있었다. 후딘이 사용한 방법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걸. 그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그렇지 않아도 장대한 후딘의 기골이 반 배 더 부풀어올랐다.
완벽하게 짓밟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애용하는 보구, 만천도를 꺼낸 후딘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네가 이길 확률은 없다. 눈꼽만큼도.”
한순간에 턱밑까지 치달은 카인이 주먹을 내질렀다.
쾅!
후딘이 반격하고 나서자 둘 사이에서 커다란 충격파가 터졌다. 주변 지형지물을 뒤집어 놓을 정도로 강렬한 파동은 한 번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격돌할 때마다 일어났다.
설전은 필요치 않았다.
필요한 건 그 말을 입증할 강함뿐.
“후딘 맥시모스, 나를 정련시켜라.”
* * *
대륙의 북부 쿠로도 산맥. 그 깊은 협곡 사이에 빙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점에 따라 빛깔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그곳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일게 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도 곧이어 사라졌다. 눈과 얼음뿐인 지역인지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던 것이다.
쉽사리 방향을 정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으나, 호른은 정확하게 자신이 가고자 하는 산을 짚었다.
“다 왔어, 바로 저기야.”
착각하는 일은 없었다. 카르비나에게 건넸던 브로치가 이정표가 되어 주었으니까.
얼마나 걸었을까.
거리가 가까워지는만큼 빗발치는 폭설 또한 강해졌다. 오리올이 위화감을 인지한 건 그때쯤이었다. 부자연스럽게 쌓인 눈을 쳐다본 그가 반사적으로 창을 들었다.
“모두 경계해라!”
그 말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눈밭에서 기다란 총신이 차례대로 올라왔다. 길목 사이사이에 배치된 레일건에서 전격이 뿜어져 나온 건 한순간.
창을 휘둘러 에너지 덩어리를 양단한 오리올은 입도 뻥긋하지 않고 그대로 내달렸다. 일행은 미리 짜놓기라도 한듯, 진형을 갖추어 그 뒤를 엄호했다.
아리아가 단검을 던지면, 호른은 그 쇳덩이를 피뢰침 삼아 번개로 내리갈겼고, 두 사람의 공격이 미쳐 닿지 못한 곳은 머리카락을 날카롭게 벼린 이브가 몸소 분쇄했다.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며 각자의 위치를 전환해도 그 순환은 끊기지 않았다.
본디 리벨리온이라는 이름 아래 대륙을 누비던 그들이었다. 이 정도 연계 정도야 눈 감고도 맞출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쾅!
지면을 헤집으며 튀어나온 사내는 모두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바울.”
“초대장을 보낸 기억은 없는데 말이야. 이렇게 떼를 지어서 오다니, 슈발체베인가는 기본적인 예의도 없나 보지?”
송곳니를 드러낸 바울의 등 뒤로 신의 병사들이 하나둘씩 집결했다. 눈밭에서 새로운 무장이 나온 건 덤.
오렌 왕국의 수도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구도였다.
창을 꼬나쥔 오리올이 고갯짓했다.
“모두 가라. 저 녀석은 내가 맡도록 하지.”
“혼자서 가능하겠어?”
“못 할 것도 없지.”
여기에서 발목을 붙잡힌 채 허송세월을 보낼 수만도 없는 법. 더구나 호른은 엔지니어의 본거지로 일행을 안내해야 했다.
시간은 금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그러면 믿고 맡길게.”
그렇게 동료들을 보낸 오리올은 바울과 마주했다.
십좌전에서 만났을 수도 있었던 상대.
블랙 미러에 대한 악명은 익히 들었다. 어떠한 개념도 모사해서 사용한다고. 성절을 사용하는 무인에게는 치명적인 적수였다. 수를 읽힌다는 건 패배로 직결될 수도 있는 사안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같은 패배자끼리 잘해 보자고.”
“내가 패배자라고?”
“이러쿵저러쿵 변명해도 결국 둘 다 십좌가 되지 못한 건 사실이지 않나.”
“그래도 너처럼 처참하게 진 기억은 없는데 말이야.”
비릿하게 웃은 바울이 자세를 다잡았다. 순간, 그의 피부가 묵빛으로 짙게 물들었다. 마치 광석이라도 된 듯 겉표면에는 광택까지 흘러 넘쳤다.
폭성 블루워드가 익힌 성절, 철광호포의 개념 중 하나.
‘묵광.’
마력의 수준에 따라 신체 강도가 한없이 강해지는 능력이었다.
바울이 이 개념을 모사한 이유는 간단했다.
십좌전에서 본 오리올의 환상도요는 변(變)과 환(渙)이 극에 달한 성절. 때문에 위력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뒤떨어졌다. 묵광을 뚫지 못하는 건 당연지사.
‘그 점을 노린다.’
바울은 오리올이 제 풀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기다려줄 셈이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어렴풋이 읽은 오리올이 가당찮다는 듯 창을 한 바퀴 돌렸다. 바울의 선택은 최악의 자충수였다. 차라리 다른 동료를 불렀어야 했다. 어줍잖은 기계 친구들이 아니라.
순간, 오리올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바울의 코앞에서 다시 나타났다.
“숨을 거면 끝까지 숨었어야지.”
기다렸다는 듯 주먹을 내지른 바울이었으나, 그의 일격은 오리올에게 닿지 못했다. 아니, 그 전에 몸을 뺄 수밖에 없었다. 묵광이 깨지지도 않았건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격통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바울이 화들짝 놀라자 오리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환상도요 다섯 번째 개념이자 마지막 개념, 환상통.
현실을 침식한 환상은 기어코 그 고통마저 진실로 만들었다.
* * *
엔지니어의 본거지는 빙산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접근은 물론이고, 들어가는 것조차 여의치 않는 곳. 입구에서부터 쏟아지는 포탄의 비를 피해가며 아리아는 질주했다.
핵심 시설이라 할 수 있는 곳이라 그런 걸까.
사방에서 내리치는 집중 포화에 사각 지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필연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 있었다.
투둥, 퉁.
하지만 그런 때는 항상 마나 방벽이 함께했다. 호른이 보내 준 성의에 힘입어 마지막 레일건을 처리한 아리아가 지면에 착지했다.
난장판이 된 눈밭, 그 너머에 집채만 한 철문이 있었다.
“이래서 여태까지 걸리지 않았던 거였군요.”
엔지니어는 신의 무덤을 통째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조직도 신의 무덤 하나를 훈련소로 활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으나, 들어가는 게 문제였다.
이브가 앞으로 나선 건 그때.
“위치가 들통난 이상, 이런 건 아무런 장애물도 되지 않습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단말기에 꽂힌 순간, 붉게 물든 표시등이 꺼졌다. 이내, 굳게 닫힌 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들어가시죠.”
별거 아니라는 듯 손짓하는 이브의 뒤를 따라 입장한 아리아는 침음을 삼켰다. 내부에는 신의 병사들이 득시글거렸다.
복도마다, 시설마다, 구역마다.
없는 곳을 찾는 게 더 빠를 정도였다.
호른마저 질색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브는 태연하게 손을 앞으로 뻗었다. 동시에 솟구친 머리카락이 주위에 녹아들었다.
전장이라면 몰라도 도망칠 곳이 한정된 통로는 이브의 주무대나 다름없었다. 신의 무덤 안이라면 더더욱.
나긋나긋한 손짓을 따라 격벽이 올라갔다 내려오고, 신의 병사는 방패막이가 되길 자청했다. 일대가 그녀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제 집을 찾아온 주인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자태.
이브는 기세를 몰아 밀고 내려갔다.
“카르비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조금 더 아래에 있어. 앞으로 조금만 가면 될 것 같아.”
브로치에서 전해지는 정보를 해석한 호른이 희망적인 관측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얼마 가지 않아 불빛이 꺼지며, 사위가 보다 거뭇해졌다. 바닷속에 들어온 것처럼 어둡고 탁한 푸른빛이 은은하게 맴돌자 아리아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어딘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질적인 음색이 섞여 든 건 그때.
또각, 또각.
선명한 구두 소리에 이브는 임전 태세를 갖추었다. 마소를 감지하는 능력은 없지만, 수많은 난관을 헤쳐온 논리 회로가 위험을 인지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림자를 뚫고 익숙한 실루엣이 비쳤다.
“역시 이곳으로 올 줄 알았어요.”
분위기와 다르게 명랑한 목소리였으나, 안심하는 이는 없었다. 카인에게 모든 걸 들은 뒤였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청년은 엔지니어에서도 가장 주의해야 할 인물.
이 모든 사달의 원흉이자 엔지니어의 수장―
“세트.”
“맞아요, 호른. 당신과 같은 십좌인 세트예요.”
키득키득, 웃은 세트가 보란듯이 브로치를 꺼냈다.
“처음에는 평범한 장신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마법에 조예가 깊은 건 아니었다. 여느 무인들처럼 기본 소양으로 몇 가지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다른 이들에게 없는 능력이 있었다.
“냄새가 나더라고요, 인위적인 냄새가.”
세트가 그렇지 않냐는 듯 호른을 쳐다보았다.
“위치 추적 마법을 걸어 놓다니. 악질적인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보기보다 카인은 소유욕이 강한가 봐요? 이런 것까지 남길 정도면. 아니면 이런 상황을 예견했다던가? 어느 쪽이든 음흉하긴 마찬가지네요.”
“공작님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카인의 의도를 제멋대로 해석하는 세트의 말에 발끈한 아리아가 나섰으나, 그는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일갈했다.
“저는 호른에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이름도 모를 제삼자는 빠지세요.”
참다 못한 아리아가 뛰쳐가려고 했지만, 이브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호른이 입을 연 건 그때.
“알고 있으면서 방치했다는 거야?”
“당연하죠. 그래야 여러분이 여기까지 오지 않겠어요?”
“유도했다는 거네.”
하긴 비밀 결사의 보금자리라고 하기엔 방비가 여러모로 부족한 편이었다. 어느 정도 자물쇠를 열어 줬다는 것이리라.
“토벌대에서 제일 거슬리는 건 당신들이라 판단했거든요.”
“주도권 좀 잡겠다고 포기한 게 좀 많지 않아? 우리가 여기에서 쓰러지더라도 토벌대는 멈추지 않을 텐데 말이야.”
“상관없어요. 이제 엔지니어는 음지가 아닌 양지로 나갈 테니까요.”
이때를 위해서 수많은 선조들이 치욕을 감수하고 지하에 숨어든 거였다.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진 이상, 숨거나 도망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