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99
099화 계승 1
* * *
분위기가 일변했다.
진지하게 지난 삶을 되돌아보던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
이곳에 있는 건 마지막을 직감한 무인뿐.
라프만이 검지를 들자마자 혈관 몇 개가 막힌다. 가슴이 뻐근하다고 느낀 순간, 검이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장난이나 경고가 아니었다. 정말 죽일 기세로 휘두르는 게 느껴졌다.
라프만이 장담한 이상, 시험은 시험이었다.
그 이상의 가치도 그 이하의 속셈도 숨어있지 않았다.
검 끝이 눈꺼풀을 스치고 지나간다.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순간, 몸이 먼저 반응한다.
혈류 가속.
한없이 감속하는 세상 속에서 카인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분명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는데도 뺨 위에 기다란 실선이 그어졌다.
무서울 정도로 섬뜩한 예기.
그건 경지에 다다른 무인만이 내비칠 수 있는 기술의 극치였다.
“혈액의 순환은 곧 마력의 흐름이니, 혈관과 경맥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이용해 외부의 위험을 타파하고자 했구나. 가장 간단하지만, 가장 좋은 선택이다.”
즐거운 표정이었다. 당하는 쪽은 전혀 즐겁지 않았지만.
“오거라, 카인. 너를 정련시켜주마.”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현실을 외면하는 건 불가능했다.
‘언제는 그런 걸 따졌다고….’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들이박고 보지 않았던가. 마침,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하는 법.
마음을 다잡은 카인이 자세를 잡은 순간, 섬광이 번쩍였다.
인지의 사각에서 날아오는 검격.
초월 감각과 혈류 가속을 혼용해도 궤적이 보이지 않았다.
라프만이 숨긴 게 아니었다. 숨길 필요가 없을 정도로 빠를 뿐이었다.
무언가 다가오는 것 같다고 막연히 추측하는 게 카인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순전히 감.
온전히 운.
이 뒤는 무의식의 영역이었다. 잘 벼려진 육감과 강철처럼 제련된 육신이 끝까지 버텨주길 바랄 뿐이었다.
외줄을 타는 심정으로 카인은 거리를 좁혔다. 아차 하는 사이에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개의치 않는다. 목숨을 내놓고 나서야 비로소 볼 수 있는 활로가 있는 법이다.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이고, 몸을 웅크린다.
어떻게 하면 대응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던 찰나 검격이 허벅지를 베고 지나간다.
라프만의 공세는 끝날 줄 몰랐다. 아니, 끝낼 마음이 없는 듯했다.
금방에라도 쓰러질 듯한 품새로 검을 휘두르지만, 그 안에 담긴 묘리는 기기묘묘하기 짝이 없었다. 아마 비슷한 경지에 이르러 검의 궤적을 볼 수 있다 해도 변하는 건 없으리라.
라프만이 사는 세계는 카인이 볼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반격은커녕 자세를 잡는 것도 급급한 상황.
마주하는 건 폭풍이요, 파도였다.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남은 불씨를 태우고 있음에도 이 정도.
전성기가 한참 지났다는 걸 감안하면 본래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팅―
팔과 검이 부딪치며 청명한 소리를 자아낸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공방.
라프만은 아슬아슬하게 따라오는 카인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때를 위해 지난 5년을 기다렸다.
그래, 원래대로라면 라프만의 지도를 받는 카인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져야 했다.
그게 정련의 요체였으니까.
하지만 실상 그렇지 않았다. 두드리는 자의 경지에 따라 성취가 오른다고 한들 이론상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는 분명 존재했던 것이다.
당연히 사제 간의 압도적인 격차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 경지의 고하가 확연한 탓에 적용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두드릴 수 있었다.
죽음을 목도한 라프만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성장기에 오른 카인의 힘이 점점 강해지면서.
하강 곡선과 상승 곡선이 교차한 지금이야말로 적기.
죽기 전에 명리를 다할 수 있어 그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스승이 되어 제자에게 이런 자그마한 선물 하나 남겨줄 수 없다면 죽어서도 가슴에 남았을 테니까.
검격이 온통 스승의 마음으로 물들었다.
이것은 진정한 정련. 처음이자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쿵, 쿵.
충격과 연격이 계단을 올라가듯 점점 높아졌다.
두툼하게 쌓인 눈이 증발하며, 메마른 땅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라프만은 개의치 않고 그저 우직하게 두드렸다.
“쿨럭.”
목구멍 위로 올라오는 핏물을 억지로 삼킨다.
끝까지 보고 싶었다. 아끼는 아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하지만 그건 부질없는 소망이었다.
남겨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 라프만,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마무리해야 할 때.
‘그렇다면 선택은 단 하나.’
라프만이 검을 치켜들자 카인은 침음을 삼켰다. 간담이 서늘해지며 솜털이 곤두섰다.
역류하는 마력이 꿈틀대자 그는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라프만이 무엇을 꺼내고자 하는지.
오의.
개념 중 하나를 극대화한 기술.
같은 유파라도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경험의 총체로 성절을 완벽히 익힌 자만이 펼칠 수 있는 비기 중 비기였다.
숙련도가 높은 개념에 따라, 익숙한 패턴에 따라 오의가 정립되니 개인마다 그 색채가 다른 기술이기도 했다.
마냥 위력적인 오의가 나오는 건 아니란 소리였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십좌 중 하나이자 오더 링크를 정립한 사람.
그렇지 않길 바라는 건 자만이자 오만이었다.
카인이 대비하는 것과 동시에 높이 올라간 검이 내려왔다.
위에서 아래로.
개념 중 하나인 전력 전개가 한계까지 해방되며 하늘이 갈라졌다.
허공에 아로새겨진 궤적을 따라 빛무리가 맥동한다.
‘저건…….’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이곳에서 봤던 빛이었다.
[오더 링크 ― 만천 부상]“크흑.”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힘이 온몸을 뒤덮는다.
일찍이 자연재해였던 프로잔조차 무위로 되돌린 힘이었다.
아직 정련정심의 개념도 채우지 못한 카인에게 오의는 머나먼 경지였다.
저항하는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환각이 보였다. 아니, 정말 조금씩 바깥쪽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검을 막고 있는 팔뚝이 갈기갈기 찢기고, 경맥이 들끓었다.
몸 전체가 무거운 게 꼭 천근을 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그대로 짜부라질 터.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아득한 열량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것이 바로 대자연마저 굴복시킨 인간의 검. 신의 힘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자비를 바라고 허리를 수그릴 뿐.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기하지 마라.”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든다.
다시 보니 라프만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창백하게 뜬 피부는 미라처럼 건조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건 생명을 불태워 일으킨 일격. 버티지 못하면 라프만의 유지는 이어지지 못하고 평범한 죽음으로 남을 뿐이라는 걸.
뜯어져라 입술을 짓씹고 깨물었다.
스승이 각오했는데 제자라고 못할까. 경맥에 돌아가는 마력을 밑바닥까지 긁어 저항한다.
라프만의 의지가 헛되지 않도록.
찰나의 순간, 가슴에 검이 들어와 꽂힌다.
갈비뼈와 갈비뼈 사이를 정확하게 노린 한 수.
화들짝 놀란 카인의 얼굴을 보며 라프만은 씁쓸하게 웃었다.
제자가 가진 목표가 높고, 명확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 길은 고행의 길. 중간에 멈추지 않는 한, 항상 피 냄새만 나겠지.
예나 지금이나 대륙은 어지러웠다.
기인이사가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건 물론이고, 이름 모를 신화와 전설이 지금까지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과연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도 제자가 제 길을 갈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생각했다. 긴 여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싶다고.
검을 비틀어 공간을 확보한 라프만은 평생 모았던 마력을 흘려보냈다.
혈관과 경맥이 일치한 정련정심이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별도의 대책이 없어도 심장이 온몸에 마력을 전달할 테니까.
버티지 못할 수도, 어쩌면 대부분 소실되고 일부분만 남을 수도 있었다.
확률은 반반 혹은 그 이하.
실낱같은 가능성이지만 라프만은 모든 걸 걸었다. 어차피 다음은 없었다.
우웅.
가슴을 타고 흘러들어 온 미증유의 힘이 사지 백해를 내달리자 카인은 라프만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모든 걸 맡기고자 했다. 아마, 본신의 마력을 전부 사용케 한 것도 이때를 위한 안배였으리라.
혈관과 함께 형성된 경맥의 길이는 12만 킬로미터.
이는 다른 성절과 비교해도 독보적인 규모였다. 하지만 라프만의 마력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하나도 빠짐없이 밝혔다.
그러나 인간의 몸이 한순간에 이렇게나 많은 마력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자연에서 나고 자란 영약을 섭취해도 한도가 있다. 하물며 사람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미처 스며들지 못한 마력이 허망하게 흩어지려던 찰나, 두 번째 개념이 자연스레 눈을 떴다.
혈류 가속.
두근두근두근.
미친 듯 심장이 뛰었다. 체내의 시간이 가속한다. 이내, 수십 일에 나뉘어 변화해야 하는 사건이 단 몇 분 만에 처리된다.
그 과정에서 혹사당한 혈관이 피부를 뚫고 나올 듯 거칠게 맥동했지만, 카인은 감내했다.
가슴의 상처는 라프만이 준 선물이었다. 허투루 흘러가게 놔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달칵.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마력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 뒤에 남은 건 알 수 없는 개운함이었다. 무언가 바뀌었다는 느낌이 들지만 길게 살펴볼 시간은 없었다.
검을 놓친 라프만이 허물어지듯 쓰러진 것이다.
허겁지겁 달려가 라프만을 끌어안는다.
“……스승님.”
항상 커다랗게 보이던 사람이 지금은 한없이 작게만 보였다.
손이 덜덜 떨린다.
라프만은 지금까지 쌓은 전부를 주었다.
그 누구도 베풀지 않을 자비.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제 이곳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것도 내가 아닌 네가 해야겠구나.”
카인의 얼굴이 길 잃은 아이처럼 일그러지자 라프만이 옅게 웃었다.
세월이 흘러 몸은 자랐지만, 표정은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왜 그런 얼굴이지?”
뺨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쏟아진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되었다. 라프만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며 토해내듯 읊조렸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있었는데 네가 우는 건 처음 보는군.”
“처음 우는 거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카인은 라프만의 손을 꼬옥 잡았다.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너와 내가 만났을 때부터. 슬퍼할 필요도 동정할 필요도 없다. 웃어라, 가는 길엔 네가 웃는 모습만 보고 싶으니까.”
하잘것없는 소망에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다. 하지만 올라가지 않아 경련이 일어난다.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고.
얼마나 우스운 꼴일지 보지 않아도 훤했다. 그래도 좋았다. 그걸로 라프만이 기쁜 마음으로 떠날 수 있다면.
점점, 손을 잡고 있는 힘이 약해진다. 온기 또한 따라서 사라진다.
라프만이 스르륵 눈을 감자 카인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여행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아버지.”
어색하게 그 말을 입에 담는다.
라프만에게 닿았는지 닿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카인은 어째서인지 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내려다본 라프만은 살며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