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rn Man Who Got Transmigrated Into the Murim World RAW novel - Chapter 13
13 章>
짙은 흑색의 장포를 펄럭이며 자신의 앞을 나아가는 사내.
그의 등을 바라보는 조휘의 얼굴은 한껏 복잡했다.
저 흑색 장포의 사내는 무림맹 감찰원 직속 무력대인 정천단(正天團)의 단주.
무림맹 감찰원, 그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미 전해 들은 터라 조휘로서도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전에도 남궁세가로 호출되어 잔소리를 들은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어느덧 조휘가 남궁세가의 정문을 지나고서 배첩을 받기 위해 방명록에 이름을 적으려고 하자, 이미 마중 나온 내원의 무사가 이를 만류하고 나섰다.
“접견첩의 배부를 생략하시라는 내원주님의 명입니다. 따라오시지요.”
“음? 알겠습니다.”
조휘가 가볍게 놀랐다.
남궁세가는 웬만해서는 가법이나 절차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접견첩을 생략한다는 것은 그만큼 뭔가 일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조휘가 무사의 안내를 받아 내원에 들어섰을 때 함께 왔던 정천단주가 정중히 포권했다.
“부디 옳은 뜻을 세워 주길 바라겠소.”
옳은 뜻?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조휘가 얼떨결에 마주 포권했다.
“살펴 가시지요.”
인사를 마친 조휘가 창룡전(蒼龍殿)으로 들어서자 그 압도적인 분위기에 가슴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허? 이건 뭐 거의 다 모인 것 같은데?’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자는 최상석(最上席)의 세가주 남궁수.
그의 우편으로는 내원주 남궁백이, 왼편으로는 외원주 남궁우가 시립해있다.
또한 창천담로원주이자 자신의 사부인 남궁성찬이 가주의 뒤편에 서 있었고.
소검주 남궁장호 또한 강렬한 안광을 빛내며 가주의 곁을 호위하고 있었다.
거기에 각 단(團)과 대(隊)를 대표하는 단주와 대주들이 그야말로 풀무장으로 좌우로 도열해 있었다.
과연 대(大)남궁세가!
안휘의 지배자, 오대세가 중에서도 수좌를 다투는 남궁세가의 신위(身位)는 실로 거대했다.
한데 눈에 띄는 사람이 또 있었다.
‘제갈운?’
익살스러운 평소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는 냉랭한 얼굴. 그 싸늘함이 왠지 모르게 불길하다.
곧 제갈운의 사무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조가대상회를 대표하는 그대에게 우선 맹(盟)의 입장부터 전하겠습니다.”
이어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
그렇게 남창의 첩보 조직이 궤멸당한 사건과 그 일이 뜻하는 상황, 합비를 향한 흑천련의 심각한 동태와 무림맹의 입장 등을 간략하게 웅변하고서 그는 곧 굳게 입을 닫았다.
복잡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무림맹의 뜻은 간단했다.
네놈의 모든 사업체를 남궁세가에 편입시켜라.
그리고 무림맹의 관리 감독을 받아라.
또한 정해진 상납금을 매월 바쳐라.
아니면 흑천련의 마수에서 우리가 널 보호해 줄 이유가 없다.
협박을 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심플해서 오히려 조금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백도정파의 하늘.
정의의 화신이라는 무림맹.
하지만 이건 뭐 거의 조폭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조휘의 차가운 시선이 제갈운을 향한다.
“맹(盟)의 어르신들께서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제갈운이 되물었다.
“무슨 착각이란 말입니까?”
“강호의 잣대만으로 저를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조휘가 좌중을 훑어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제가 남창을 합비처럼 만들지 못할 것 같습니까?”
그런 조휘의 대답에 제갈운은 등줄기에서 소름이 좌르르 돋아났다.
남창을 지금의 합비처럼 만든다?
그 말은 흑천련에 날개를 달아 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게 무슨!”
“기본적으로 저는 장사치입니다. 이문을 위해서는 위험한 모험을 마다하지 않지요. 한데…….”
조휘의 음성이 더욱 깊게 가라앉는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이룬 부(富)를 날로 먹으려는 자들이 참 많군요. 그와 같은 상황에서 장사치들은 대부분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다음 말은 모두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누가, 어떤 자들이 내게 더 큰 이문을 안겨 줄 것인가?”
그 충격에 도저히 분을 참을 수 없었던 내원주 남궁백이 거칠게 소리쳤다.
“지금 자네의 그 말은 돈만 더 벌 수 있다면 흑천련의 개(犬)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다 빼앗겠다는데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조휘가 내원주 남궁백을 끈질기게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인간의 욕심이란 참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내원주님. 혹시 제가 남궁세가의 이익에 피해를 주었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자네가 본 세가의 사업장들을 한 번이라도 훑어봤으면……!”
“아니지요.”
조휘의 비웃음 어린 얼굴이 좌중을 훑고 있었다.
“삼 년 전 합비의 인구는 대략 팔만 육천 명이었습니다. 현재는 십칠만 명이지요. 다시 묻겠습니다.”
또다시 조휘가 남궁백을 쳐다본다.
“이 조 모가 남궁세가의 사업에 피해를 주었습니까?”
남궁세가의 수입은 사실 삼 년 전보다 조금 늘었다. 조휘의 말대로 합비의 인구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반드시 상대적인 것이다.
조가대상회가 합비를 장악하고 얻는 이문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니 당연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보게 자네…….”
“세가의 어르신들께서 저더러 양보를 해 달라고 요구하시면 저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비록 성은 다르지만 저는 분명 남궁세가의 사람이니까요.”
조휘의 북극성처럼 시린 두 눈이 제갈운을 향한다.
“하지만 맹(盟)은 아닙니다. 가서 그대의 상관에게 전하세요. 저는 정파와 사파,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생각이 없습니다.”
문득 들려오는 침중한 음성.
그는 바로 세가주 남궁수였다.
“정사지간(正邪之間)이라…… 강호의 역사 이래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자들은 극소수였네. 그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지.”
조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어른도 늘 말씀하셨죠. 타협이라는 늪에 빠진 인간은 필연적으로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사람, 자신의 가치를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만이 강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순간, 조휘의 두 눈에서 검은자위가 사라졌다.
그의 백안(白眼)이 광대무변한 신광(神光)으로 물들자.
쿠구구구구구구-
거칠게 진동하는 대전!
“저는 강자의 길을 갈 것입니다.”
소름 돋을 만큼 차가운 흑백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공기의 흐름.
햇볕에 일렁이는 먼지들.
무인들이 내뿜는 기파.
찻잔 위로 솟구치는 아지랑이들.
바라보는 세상이 모두 물리학적 도식(圖式)으로 화(化)해 있다.
사방에 흩날리는 온갖 함수와 방정식들.
수많은 물리 연산식의 정보가 자연스럽게 뇌리 속에 파고든다.
처음에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아경(無我境).
심상세계에서의 열락, 그 황홀한 깨달음의 시간은 고작 십여 분에 불과할 정도로 짧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심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몸을 확인하고서는 황당함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빛바래져 낡아 버린 학창의.
온몸에 수북하게 쌓인 먼지.
검신 어르신께서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삼 년이 지났다고 말해 줬지만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달라진 자신의 육체.
인간의 몸으로 도저히 구현할 수 없는 어떤 잠재적인 능력들. 그 이능력들이 모두 깔끔하게 개화(開花)되어 있었던 것.
검신 어르신께서는 이와 같은 경지를 검천전능지체(劒天全能之體)라고 부르셨다.
귀신처럼 동공이 허옇게 변하는 부작용이 좀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조휘는 담담하게 좌중을 훑어보고만 있었다.
눈치가 있다면 이 기세가 모든 전력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중간자(中間子).
오직 강자만이 취할 수 있는 포지션.
당대의 강호에 자신을 능가하는 고수는 채 열을 넘지 않는다고 검신 어르신께서 확언해 주셨다.
자신은 충분한 강자다.
그런 조휘를 가장 경악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자는 세가주 남궁수였다.
‘대체!’
한 인간의 무혼(武魂)이 눈빛에 아로새겨지는 경지.
자하신공과 같은 특수한 무공을 제외한다면, 저 현상은 틀림없는 절대(絶大)의 경지를 말하고 있었다.
저 조휘라는 청년의 경지가 남궁세가의 창천안(蒼天眼)과 맞먹는다는 뜻.
지금까지 천재라 불렸던 수많은 무인들이 있었다.
그런 그들조차 불혹에 화경(化境)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을 기적이라 말했다.
한데, 이제 약관을 지난 청년이 화경도 아니고 절대경이라고?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강호 역사에 그런 무인이 있었던가?
본인의 무혼(武魂)을 드러낸 채 오연히 서 있는 조휘를 향해 창천검선(蒼天劒仙) 남궁성찬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저런 놈을 제자?
아무리 무기명이라지만 웃기는 소리!
진신실력을 모두 드러내지 않고서도 자신을 능가하는 존재감을 뽐내는 녀석이다.
이제 막 절대의 초입에 들어선 자신조차도 읽을 수 없는 경지의 무인.
그런 자가 무슨 자신의 제자란 말인가!
남궁성찬이 희미하게 반개한 눈으로 소제갈 제갈운을 응시했다.
“우리 감찰소교위께서도 느껴지시는가?”
“아?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마주하게 되면 항상 뇌가 정지하는 제갈운.
남궁성찬이 푸근하게 웃는다.
“그는 절대(絶大)라네.”
“저, 절대경!”
절대경의 고수, 그 보유 유무에 따라 한 문파의 흥망성쇠가 달라지는 마당이다.
그 대단한 구대문파 중에서도 절대의 고수를 보유한 곳은 단 네 곳.
소림과 무당, 그리고 화산과 곤륜뿐이다.
운남성의 패자이자 강호일절의 극쾌검인 사일검법의 점창(點蒼)도 칠십 년째 절대의 고수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었고.
화산과 함께 섬서를 양분하고 있는 전통의 도문 종남(終南) 역시 백 년째 깜깜무소식이었으며.
고명한 비구니들의 처소 아미(峨嵋)는 개파조사 멸절사태 이후 아예 배출조차 못 하고 있었다.
이렇듯 한 문파의 당대(當代)에서 한 명조차 나오기 힘든 것이 절대경의 무인.
그 한 명의 무인이 갖는 가치와 파괴력은 필설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다.
한 사람의 무인이 오롯한 문파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의지를 꺾으려면 맹주나 부맹주쯤은 모시고 와야겠지.”
남궁성찬의 그 말에 제갈운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임무를 잊을 수는 없는 노릇.
“……일단 맹에 복귀하겠습니다.”
그렇게 제갈운이 창백한 얼굴로 황급히 대전에서 나가자 무겁게 닫혀 있던 세가주 남궁수의 입이 드디어 열린다.
“남궁(南宮)은 자네에게 어떤 의미인가?”
조휘가 서서히 백안을 갈무리한 후 잠시 생각하다 대답한다.
“삼촌 같은 느낌입니다.”
무슨 사고를 쳐도 수습해 주는 고마운 삼촌!
떼를 쓰면 무엇이든 다 사다 주는 착한 호…… 아니 삼촌!
조휘에게 남궁세가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가족처럼 여긴다라.”
세가주 남궁수가 조금은 오해하고 있었지만 뭐 나쁘지만은 않았다.
남궁수의 깊은 두 눈이 내원주 남궁백에게 향했다.
“저 청년을 봉공(奉公)의 위(位)에 봉함이 어떻소이까.”
가주의 그 말에 남궁백의 두뇌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가주의 의도를 한 방에 읽은 것이다.
남궁백은 머릿속에 가법을 떠올리고는 샅샅이 훑고 있었다.
결격 사유가 될 만한 요소들을 모조리 찾아보고 있는 것이다.
곧 생각을 정리한 그가 입을 열었다.
“세가의 직계가 아닌 자에게 봉공의 위를 내리려면 한 가지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가주.”
“무엇이 충족되어야 한단 말이오?”
남궁백이 침을 꿀꺽 삼킨다.
“혼사(婚事)입니다. 본 세가의 여인과 맺어져야 가능합니다.”
“음…….”
그 말에 세가주 남궁수는 침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세가의 여식을 시집보내는 일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문제는…….
“……불가능합니다. 아버지.”
남궁장호의 대답에 대전의 모든 무인들이 동의한다는 듯 깊게 탄식한다.
그들이 첫 번째로 떠올린 세가의 여식은 당연히 남궁소소.
하지만 소소는 그 근육 사내에게 홀딱 빠져 매일매일 상째 밥을 가져다 바치는 상황이다.
“으음…….”
침중한 기색이 역력한 세가주 남궁수.
그러나 한 문파의 동시대에 하나도 나오기 힘든 것이 절대경이다.
이미 남궁성찬 어르신께서 창천안을 이루는 경사가 일어났지만, 가문을 이끄는 자의 욕심이 어디 멈춰서야 될 일인가?
조휘까지 포섭할 수만 있다면 무려 셋이다 셋.
화산도 둘이고 소림도 둘인데 남궁세가만 셋이란 말이다!
이건 결코 놓칠 수 없는 일!
“……소미(少美)가 있지 않소?”
모두의 고개가 부서지듯 세가주를 향해 꺾어졌다.
아니 저 양반이?
절대경의 무인을 포섭하려는 노력이야 이해하는 바지만 그렇다고 양심까지 팔아먹으셨나?
남궁장호가 식겁하며 아버지를 만류했다.
“아버지, 아니 가주님. 소미의 나이는 이제 겨우 아홉 살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조휘가 발악을 했다.
“미친! 아니 이 어른들이? 날 뭘로 보고! 그건 너무 아청아청해!”
“아청아청?”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가주 남궁수를 향해 조휘는 일언지하에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그런 게 있습니다. 아무튼 안 됩니다. 절대 안 해요!”
그런데 한술 더 뜨는 사람이 있었다.
“봉공의 위를 받아들이기 싫다면 창천검패를 도로 내놔야 할 게다.”
비릿하게 웃고 있는 남궁성찬.
“치, 치사합니다!”
줬다가 다시 빼앗겠다니?
저리도 아무렇지 않게 노양심일 수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조휘다.
물론 본신의 무력도 갖췄고 관부와의 유대 관계도 돈독하게 만들어 놓았다.
허나 창천검패가 없다면 온갖 성가신 일을 마주하게 될 터.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무력으로 해결하거나 관부에 일러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안휘의 제왕은 엄연히 남궁세가다.
남궁성찬은 그런 자신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네 입으로 남궁을 가족같이 여긴다 하지 않았느냐?”
“하…….”
세가의 봉공이란 것은 말만 그럴싸하지 결국은 종속된다는 의미다.
“네놈은 여전히 그 잘난 장사를 그대로 하면 되고 세가는 결코 네 이문을 탐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남궁성찬의 두 눈이 다시 반개했다.
“생사를 함께하는 것, 그 운명의 공동체가 바로 가족이자 세가가 아니겠느냐?”
네네. 참 가 족같네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창천검패 없이 장사를 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
조휘의 어깨가 축 늘어진다.
“봉공…… 하겠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 혼사는 할 수 없습니다!”
세가주 남궁수가 흡족한 얼굴로 내원주 남궁백을 쳐다본다.
“원로원과 가율각을 소집하여 회의를 준비해 주시오.”
“예? 갑자기 무슨 일로?”
세가주 남궁수가 푸근하게 웃었다.
“가법을 바꾸면 되지 않소?”
“아?”
그 간단하고도 명쾌한 논리에 순간적으로 멍해져 버린 내원주 남궁백.
그렇다.
세가의 절차상 원로원과 가율각이 협의하여 만장일치만 이뤄 낼 수 있다면 가법은 변경될 수 있었던 것.
절차를 그토록 중요시하는 남궁세가가 가법까지 바꿔 가며 자신을 영입하려 하고 있었다. 새삼 자신이 이룩한 힘의 위력을 자각하게 되는 조휘였다.
“그럼 이제 저는 가 봐도 되는 겁니까?”
남궁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지. 못 가네.”
“또 무슨 일입니까?”
조휘의 짜증 섞인 음성에 남궁백이 더욱 눈을 부라렸다.
“오면서 접객당을 보지 못했는가?”
“접견첩도 못 받고 헐레벌떡 뛰어왔습니다만?”
남궁백의 시선이 접객당을 가리킨다.
“안휘의 유력자들이 죄다 몰려왔네. 모두 자네의 합빈관 때문이야.”
“왜죠? 합빈관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당연히 문제가 있지! 쟁쟁한 유력가의 자제들이 가문의 재산을 모조리 합빈관에서 탕진하고 있지 않은가! 이젠 학문에 힘써야 할 현령(縣令)의 자제들까지 합빈관에서 흥청망청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네! 그뿐인가? 장가를 앞둔 사내들의 총각 잔치? 곧 시집갈 여인들이 뭐? 처녀 잔치? 합비에서 합빈관 때문에 파혼한 집안이 얼마나 많은 줄 알고 있는가?”
조휘가 한 차례 움찔하는 듯하더니 오히려 당당하게 배를 쭈욱 내밀었다.
“아니 내가 무슨 비싼 술을 강제로 팔아먹는 놈도 아니고, 본인들 멋대로 물 쓰듯 은자를 쓰는데 저더러 어떡하란 말입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또다시 지끈지끈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남궁백.
이 빌어먹을 놈은 체면을 중요시하는 중원 사내의 속성을 철저하게 사업에 이용하고 있었다.
그 장삿속이 얼마나 철두철미한지 보고서를 읽으면서도 몇 번이나 감탄을 거듭했었다.
“일단 당분간만이라도 영업을 중지해 주게. 그래야 저들을 되돌려 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적당히 좀 하란 말일세.”
“흐음…….”
조휘가 하는 수 없다는 듯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오늘부터 보름간 조가대상회는 휴업하도록 하지요.”
그 말에 대전의 간부들이 모두 거친 노성을 내뱉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이오! 합빈관만 닫으면 되지 다른 곳은 왜?”
“조가성심당은 안 됩니다!”
“조가객잔도 안 되오!”
“어허! 조가양조장은 상관없지 않습니까?”
조휘가 의뭉스럽게 말한다.
“저희 조가대상회의 사업장들은 결코 따로 휴업하지 않습니다. 공평해야죠. 누구는 일하고 누구는 쉬고 그게 뭡니까? 직원들의 사기마저 꺾으려고 하십니까?”
이젠 남궁백도 다급해졌다.
“이, 일을 더 한 사람은 자네가 특별히 품삯을 챙겨 주면 되지 않는가?”
조휘가 황당하다는 듯이 눈을 부라린다.
“아니 누구 때문에 문을 닫는데요? 그 품삯을 남궁세가가 줄 겁니까? 조가대상회가 하루를 쉬면 그 손해가 얼만 줄은 아세요?”
“아, 아니 이보게. 조 소협.”
보름 동안 조가성심당의 음식을 못 먹는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질 지경이었다.
특히나 흑청수의 꿀맛, 그 인생의 단비에 이미 중독되어 버린 몸이다.
대전의 다른 모든 간부들도 마찬가지.
“크윽! 조가객잔의 냉차 없이는 못 사는데!”
“우리 아들은 육겹면포 아니면 밥도 먹지 않는다네.”
“한빙주를 맛볼 수 없는 삶…… 그게 어디 사람의 인생인가?”
가장 가관은 세가주 남궁수였다.
“그…… 한정판 운차가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이번에는 받아 볼 수 있겠는가?”
조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하신 개천운차 말씀하시는 거죠?”
“그, 그래! 그거네!”
“아, 제가 보고받기를 아마도 인도일이 이레 정도 남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레!”
안휘철방에서 일 년에 서너 대만 생산하는 극한정판 운차인 개천운차(開天雲車).
세가주 남궁수는 현대의 오픈카처럼 지붕이 젖히는 개천운차의 그 모습에 매료되어 한시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일주일만 있으면 드디어 그 영롱한 자태를 인도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데, 조가대상회가 보름이나 영업을 중지한다면?
돌연 세가주 남궁수가 남궁장호를 쳐다본다.
“유력자들이 모여 있는 접객당이 어디냐?”
“청룡당입니다.”
그 말에 남궁수가 뒷짐을 지며 길을 나섰다.
“창천대연신공 한번 운기하고 옴세.”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남궁백의 눈 그늘이 턱밑까지 내려앉았다.
아아, 도대체 남궁은 어디로 가고 있단 말인가.
* * *
감찰원 원행 마차의 마부가 한참이나 기다리며 서 있는데도 후원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제갈운은 출발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힘없이 풀려 있는 제갈운의 동공.
원래 내정되어 있었던 의별감(義別監)이 아닌 감찰원으로 발령받은 것은, 자신이 조가대상회의 조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번 일은 중요한 사안이었다.
조가대상회는 이미 중원제일의 상단이라는 만금상단의 아성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그런 조가대상회를 무림맹의 휘하에만 둘 수 있다면 삼패천과 양립하고 있는 강호의 판도마저 바꿀 수 있는 상황.
그래서 합비행이 결정된 그 순간부터 수많은 변수를 상정하고 대처 방안을 준비해 왔다.
남궁세가의 모든 주요 간부들의 성향과 심리 파악은 물론이요, 조가대상회의 약점, 설득의 논리 구성, 적당한 으름장 등 어느 하나 허투루 준비한 것이 없었다.
한데 예측하지 못했던 단 하나의 변수로 인해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절대경(絶大境)!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그 어떤 자가 이제 막 약관을 넘은 청년이 절대경의 경지를 이룩했을 거라고 예측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는 강호문파가 아니라 상계(商界)의 인물이지 않은가?
아무리 소제갈이라 불리는 자신이지만 이런 변수는 도저히 대처할 수 없는 일.
이런 처참한 기분은 그때의 일 이후 처음이다.
필법 겨루기.
지금이 딱 그때 느꼈던 감정이랑 비슷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어이없는 상황. 지금도 딱 그와 같은 상황인 것이다.
한데, 둘 다 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인간의 경지가 아닌 것 같은 고명한 필법의 대가도 조휘고, 갓 약관을 지난 자가 절대경이라는 것도 조휘다.
도대체 그놈은 인간이 맞기나 한 건가?
이제는 황당함을 넘어 화가 날 지경이다.
“와! 사람이 어쩜 그래요?”
제갈운이 고개를 홱 하고 돌아보니 조휘가 떨떠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개천운차 설계비로 소협에게 준 돈이 얼만데! 자그마치 금화 백 냥이요 백 냥! 사람이 말이야 양심이 있어야지, 어떻게 맹에 취직하자마자 곧바로 뒤통수를 칩니까? 왜 제갈세가가 그리도 욕먹고 다니는지 이제야 알겠네.”
그때, 저 멀리 유력자들이 몰려 있는 청룡당 근처에서 거대한 제왕의 기세가 몰아쳤다.
쿠구구구구구-
발밑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진동파.
우아악!
아아아아악!
이 먼 곳까지 사람들의 찰진 비명 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지만, 조휘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휘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아, 저쪽은 신경 쓰지 마시고. 어디 변명이라도 들어 봅시다.”
제갈운이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맹에 속한 이상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모두 맹의 뜻인 거죠 뭐.”
“내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어휴.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내 장사를 방해할 생각이겠네요?”
흠칫.
예사롭지 않은 기세에 제갈운이 본능적으로 한 발자국 물러난다.
“마, 말로 하시죠. 이래 봬도 전 맹의 감찰소교위입니다만?”
조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직장인(?)이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뭐 별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간적으로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은 이 찝찝한 기분만큼은 도저히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암튼 더 이상 귀찮은 일은 만들지 마시고 알아서 맹에 잘 보고해 주시면 저도 없던 일로 해 드리죠. 그것보다 전에 제가 제안했던 건 생각 좀 해 보셨습니까?”
“그건 안 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조가대상회의 부회장직 제의.
그 월봉이 무려 이백 금이었다.
조휘 입장에서는 제갈운만 한 인재를 영입할 수만 있다면 결코 아깝지 않은 금액이었다.
“왜요? 맹(盟)에서 받는 월봉보다는 훨씬 많지 않습니까?”
제갈운이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권력이란 오직 돈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조휘는 무림세가의 속성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월봉이 문제가 아니에요 조 소협. 맹과 우리 제갈세가는…….”
“조 봉공!”
어느덧 후원에 나타난 남궁장호.
그 찐득하고 열정 어린 눈빛에 조휘가 흠칫하고 뒤로 물러난다.
저 강렬한 눈빛.
왠지 소룡대연회 때 화산소룡 청운소를 바라보던 눈빛과 흡사하다.
“봉공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하겠소!”
정중히 예를 다해 포권하고 있는 남궁장호.
그 얼굴이 얼마나 진지한지 조휘의 팔뚝에 난 털이 모조리 서 버린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직 확정된 일도 아닌데요?”
남궁장호가 경이에 찬 눈빛으로 끈덕지게 조휘를 응시한다.
“아버지께서 움직이셨으니 반드시 이뤄질 일이오! 아무튼 본 세가의 봉공이란 원로와 동등한 위치라 할 수 있소! 당연히 세가의 원로는 후학에게 가르침을 베풀 의무가 있소이다!”
명분만 그럴싸하지 결국은 싸우고 싶단 얘기다.
평소에 그 열정적인 소문은 듣긴 들었다.
세가의 고수란 고수는 모조리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청하는 무공에 미친 검귀, 소검주.
남궁장호의 두 눈에는 지극한 존경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나와 비슷한 동년배에 그런 경지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소이다. 진심으로 찬탄하는 바이오.”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조휘가 슬금슬금 후원을 빠져나가려고 하자.
남궁장호가 다시 한 번 깊숙이 몸을 숙인다.
“봉공에 비해 나는 모자람이 많은 사람이외다. 하나 내 무혼(武魂)마저 무시하지는 말아 주시오.”
-검수의 진심을 외면하지 말거라.
뇌리 속에서 검신 어르신의 잔잔한 음성이 들려오자 조휘도 진중한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흠…….”
잠시 동안 고민하던 조휘가 먼저 연무장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알겠습니다. 가시죠.”
남궁장호의 얼굴에 한껏 화색이 돌았다.
“고맙소이다 조 봉공!”
* * *
조휘와 남궁장호의 비무 소식은 세가의 모든 검수들에게 빛처럼 빠르게 전달됐다.
그 소식은 창룡전에 있었던 간부들에게는 흥밋거리로 손색이 없었지만, 하급 무사들에게는 황당함 그 자체였다.
외원의 하급 무사 하나가 황망한 얼굴로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아니, 비록 조가대상회의 조휘 소협이 대단한 사람이긴 하지만 소검주님과의 자그마치 ‘비무’라니? 제정신이란 말인가?”
“예끼 이 사람아, 아직도 소식을 못 들은 겐가? 조휘 소협이 절대경이라고 하네! 절대경!”
“뭐, 뭣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두고 보면 알겠지! 일단 구경이나 하자고! 어이! 앞에 머리 좀 치우라니까!”
어느새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수많은 무사로 꽉 차 버린 연무장을 둘러보며 조휘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그때.
“그럼 한 수 부탁드리겠소이다!”
그렇게 남궁장호가 소검주의 신위(身位)를 드러냈다.
창천대연신공의 도도한 기의 흐름이 온몸을 휘감아 돌자 남궁장호가 초연한 눈빛으로 검을 곧추세웠다.
그런 그를 검은자위가 사라진 백안(白眼)으로 묵묵히 응시하고 있는 조휘.
“오시죠.”
조휘는 이왕지사 시작한 비무를 허투루 하고 싶진 않았다.
그것이 상대의 진심에 대한 예의.
곧 남궁장호가 묵직한 제왕의 검로를 그렸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장대한 검로.
그간 그의 수련이 얼마나 엄정했을지 단숨에 느껴진다.
상대의 눈을 속이지도 않는다.
잔재주로 농락할 생각도 없다.
제왕의 검은 오롯이 뜻을 세우고 오직 묵직하게 나아가고 또 나아갈 뿐.
제왕검형(帝王劒形).
전이식(前二式) 제왕지세(帝王之勢).
군집된 검기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밀물처럼 도도하게 밀려온다.
그런 검기의 파도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조휘.
곧 그가 가볍게 보법을 일으켜 최단 거리의 회피기동 벡터 값을 구현해 낸다.
‘이형환위(移形換位)?’
남궁장호의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아니, 저런 게 이형환위일 리가 없었다. 이형환위는 희미한 잔상이라도 남으니까.
단 한 번의 보법을 일으켜 가볍게 제왕검형의 검세를 피해 버린 조휘가 곧바로 남궁장호를 향해 파고들었다.
짓쳐 들며 이어진 삼검(三劒).
횡 베기 하나, 우변 찌르기 하나, 상단 쳐올리기 하나.
순간 남궁장호의 두 눈에 기이함이 일렁인다.
기묘한 이질감.
인간의 움직임은 반드시 어떤 사전 동작을 수반한다.
한데 조휘의 동작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마치 허공에서 검이 순간적으로 나타난 것만 같았다.
하나 그 삼검(三劒)에는 그다지 큰 위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베기는 느렸고 찌르기도 물렀으며 쳐올리기 역시 힘이 없었다.
그렇게 남궁장호가 가볍게 검을 놀려 조휘의 검세를 뿌리치려는 찰나.
까깡!
가가가각!
울컥 피를 토하는 남궁장호!
그가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나며 검세를 와해하고 있는 것이다.
“쿨럭!”
단순한 베기와 찌르기, 쳐올리기.
분명 삼재검도 뭣도 아니었다.
허나 그건 베기이면서도 베기가 아니었고, 찌르기면서도 찌르기가 아니었다.
이건 직접 검을 섞어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물론 노련한 검수라면 상대의 눈과 어깨, 그리고 발을 보며 그 움직임을 미리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상대는 기(氣)를 보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내부를 휘감아 도는 창천대연신공의 진기를.
그것이 아니라면 이 현상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베기를 쳐 냈을 때 자신의 검에 담긴 내력은 창천대연신공의 육성(六成)이었다.
한데 베기에 담긴 경기(勁氣)가 자신이 쳐 내던 그 내력의 힘과 거의 동일했던 것.
이를 악물고 구성(九成)의 내력을 일으켜 찌르기를 비꼈을 때도, 십성(十成)의 모든 진기를 짜내 쳐올리기를 막았을 때도 그 힘은 항상 동일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문제가 되진 않았다.
문제는 타점(打點)이었다.
정확한 힘의 충돌이 일어나자 그 모든 타점의 반작용들이 내부에 엄청난 충격파를 일으킨 것.
가장 소름 돋는 것은 그 원형의 충격파가 단전만 자극했을 뿐 심장을 비껴간 것이었다.
그것은 내부를 관조하며 내상을 살피던 남궁장호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이게 인간의 무공으로 가능한 것인가?
의문도 잠시 또다시 날아드는 조휘의 삼검(三劒).
이번에도 역시 횡 베기 하나, 찌르기 하나, 쳐올리기 하나.
그 느릿한 궤적도 전과 똑같다.
온몸에 소름이 좌르르 돋아나는 남궁장호.
미련하게 또다시 당할 수는 없었다.
남궁장호는 오히려 공격에 공격으로 맞섰다.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검으로.
제왕검형(帝王劒形).
후일식(後一式) 제왕진천무(帝王震天舞).
제왕의 막강한 검기가 사방에서 무거운 기세를 일으키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가주 남궁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스러져라 말아 쥔 주먹!
제왕검형의 후삼식(後三式)은 사백 년 남궁세가의 모든 것이다.
벌써 저만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다니!
아들의 경지가 초절정의 벽을 넘어 화경(化境)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남궁장호와 평생을 함께 무공을 닦아 온 휘룡단의 부단주 남궁여상이 비명을 질렀다.
“안 됩니다 소검주!”
깨달음은 분명 얻었지만 육체의 수준이 아직 따라 주지 않았다.
지금 남궁장호는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결코 만만치 않는 푸르스름한 검기의 파도.
조휘가 검을 고쳐 잡는다.
비로소 검신의 독문 검식이 오랜 세월을 격하고 강호에 오연히 드러난다.
쏴아아아아아!
남궁장호의 세상이 검게 변했다.
제왕의 검무, 그 막강한 경기의 파도를 뚫고 들어오는 빛의 무리.
그 광대무변한 성광(星光)들이 눈부시게 세상을 메우고 있었다.
어떤 것은 느리고 어떤 것은 빠르다.
고아한 포물선을 그리는 만곡과, 너울거리다 빛살처럼 쏘아지는 직선.
아지랑이처럼 사라지다 폭발하는 점과, 찬란하게 다시 반짝이며 흩날리는 선형.
그것은 세상 모든 형(形)의 환상이었다.
마치 장난처럼 자신의 제왕진천무를 휘젓고 다니는 그 빛무리들.
이제 막 기운을 떨치기 시작한 제왕진천무의 막강한 검력이 마치 사그라지는 눈처럼 아래로 주저앉는다.
울컥!
검에 몸을 지탱한 채 피를 쏟아 내는 남궁장호.
일시적이지만 화경에 근접하는 힘을 내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남궁장호의 경이에 찬 두 눈이 조휘를 향한다.
“크으윽…… 봉공의 검…… 그 성명(成名)을 알 수 있겠소……?”
조휘가 씻은 듯이 검력을 거두며 담담하게 남궁장호를 바라보았다.
“저의 성명검법은 천검류(天劒流).”
조휘가 검을 검집에 갈무리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은 천하유성검(天下流星劒)이라는 검식(劒式)입니다.”
쨍그랑!
얼마나 놀랐으면 내원주 남궁백이 찻잔을 떨어뜨린 것도 모르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무학의 천재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곁에 있던 창천검선 남궁성찬이 나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천재가 아니네. 오히려 우리 장호 쪽이 천재라 할 수 있지. 비록 미완성이라 할지라도 화경의 문턱에 이르지 않았는가? 저 나이에 참으로 놀라우이.”
오히려 승리한 조휘보다 쓰러져 있는 남궁장호를 더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남궁성찬.
방금 그 엄청난 조휘의 신위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인가?
남궁백의 의문으로 가득 찬 시선이 다시 남궁성찬에게 향했다.
“그렇다면 우리 장호를 단 두 수만에 패퇴시킨 저 녀석은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남궁성찬이 씁쓸하게 웃으며 조휘를 응시했다.
“내원주께서 한번 설명해 보시게.”
“네? 무슨 말씀이신지……?”
남궁성찬의 두 눈이 침잠한다.
“저런 녀석은 누구의 안목으로도 해석될 수 없네. 그 어떤 고절한 무학의 고수가 와도 마찬가지일 걸세.”
그가 시선을 돌려 세가주 남궁수를 쳐다본다.
자리에 앉아 있는 남궁수는 두 눈을 반개한 채 깊은 고뇌에 빠져 있었다.
“단 한 수의 검초만으로 칠무좌(七武座)의 일인인 우리 세가주를 심상(心象)의 세계에 던져 버리는 놈일세. 이는 단순히 무공의 경지가 문제는 아니라는 뜻이지.”
남궁성찬의 시선이 다시 조휘를 향한다.
“저놈의 검이 부린 조화는 언뜻 화려해 보이나 그 속의 무리(武理)는 강호의 그것이 아닌 것 같은 묘한 뭔가가 들어 있네. 뭐랄까…… 인간 세계의 것이 아닌 그런 위화감?”
그때, 세가주 남궁수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백부님께서 제게 보여 주신 논검록(論劒錄)의 상대가 저 청년이군요.”
남궁성찬의 두 눈에서 이채가 발했다.
선입견을 가질까 봐 일부러 알려 주지 않았는데 곧바로 자신의 논검 상대를 알아본 것이다.
“백부님께서는 저 청년의 삼검(三劒)을 뚫고 수세를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침중하게 얼굴을 굳히던 남궁성찬이 나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담할 수 없지.”
세가주 남궁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삼검은 완벽(完璧)입니다.”
이에 곁에 있던 남궁백이 커다랗게 눈을 뜨며 경악했다.
저 칠무좌가, 저 창천검협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아쉽지만 제왕검형(帝王劒形)은 미완성의 검(劒)이다.
남궁세가의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 지고의 검법 제왕검형마저도 미완성의 검이라고 격하하는 검수다.
그런 그가 상대의 검초를 ‘완벽’이라 말한다고?
“저 삼검은 모든 궤적을 선점하고 있습니다. 상대의 그 어떤 변초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공간 지배. 상대로 하여금 오직 수세만을 강요하는 완벽한 공격 검식…….”
다시 두 눈을 지그시 반개하는 남궁수.
“만약 저 청년이 절대경 본연의 경지인 의념의 공부로 저 삼검을 펼쳤다면…….”
“그 자체로 이미 신검(神劒)이네.”
“으음…….”
그렇게 세가주 남궁수가 다시 심상의 세계로 빠져들자 남궁성찬이 나직이 읊조렸다.
“저런 건 천재가 아니네. 천재란 것도 엄연히 인간의 잣대.”
강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존재.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처럼 느껴졌던 무인들.
“신인(神人). 저놈을 보고 있자니…… 나는 왠지 삼신(三神)들이 떠오른다네.”
유구한 강호의 역사 이래 존재했던 단 세 명의 신.
남궁성찬이 그들을 떠올린 것이다.
이에 남궁백이 경악한 얼굴로 굳어 있었다.
조휘를 향한 세가 최고 검수들의 평가.
그가 진정으로 신(神)의 후보라면 남궁세가는 결코 그를 놓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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