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
001. 전생이 떠올랐다
“백작님, 이번 분기 피후원자들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고령의 집사 일페르소가 두툼한 종이 뭉치를 턱, 하고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내가 태어날 적부터 나의 손과 발이었던 그가 휠체어를 천천히 끌어 책상 앞에 멈춰 주었다.
그제야 그가 가져온 종이 뭉치가 간신히 내려다보인다.
후욱, 후욱.
살짝 숨이 가쁜 것을 꾹꾹 누르며 작게 미소지었다.
다양한 모양의 실링으로 봉해진 편지들.
내가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음악가들이 보내온 편지였다.
그리고 나는, 하루 중 이 순간을 가장 고대하고 사랑했다. 늘상 있는 통증 따위야 가볍게 무시할 정도로.
찌익-.
일페르소가 가장 위에 있던 편지를 열어 손에 펼친다.
“첫 편지는, 토마스 브로드우드입니다.”
영국 왕실의 초청받아 런던에 방문했을 때 발견한, 길모퉁이의 공방.
그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나무를 깎아내던 피아노 제작자.
아름다운 소리를 빚어낸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뛰어난 음악가였고, 그래서 곧장 후원을 시작했었다.
그를 떠올리며 기다리자, 일페르소가 그 옛날 머리맡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듯 차분한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내려간다.
∬
브리너 프리드리히 백작님께.
바덴바덴(-독일 남서부 도시)은 날씨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여긴 여전히 우중충합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요. 런던이니까요.
편지를 쓰는 지금도 비가 참 많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무 상태가 안 좋겠는데?”
걱정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일페르소가 푸근하게 웃으며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읽어내려간다.
······백작님의 후원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음악가들이 피아노를 제작하고 싶다며 공방으로 찾아옵니다.
그 중엔 백작님께서 예전부터 후원하신 이름 높은 거장들도 있었답니다!
이것도 모두 백작님 덕분이지요.
실은, 그래서 제가 백작님께 드릴 작은 선물 하나를 계획 중에 있습니다.
지난번 뵈었을 때, 기존 포르테 피아노에 대해 답답하다고 하셨던 걸 기억합니다.
그걸 제가 한 번 고쳐보려 합니다. 오직 백작님만을 위한 새로운 피아노를 만드는 것이지요.
혹 제안하실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혼신을 다해 완성 시켜 백작님께 선물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부쩍 공기가 서늘해지고 있으니,
부디 작은 병환도 없이 건강하시길 바라며.
토마스 브로드우드 올림.
∬
편지의 주인공, 토마스는 아름다운 소리의 피아노를 만드는 솜씨 좋은 장인이다.
그것만으로 후원의 이유는 충분한데, 무슨 선물씩이나.
피아노 하나 만드는데 그가 들이는 노력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 심지어 새로운 피아노를 만드는 일이라면 더 큰 심력이 들겠지.
‘어차피 받는다 해도 건반을 누를 수조차 없는 것을······.’
새로운 피아노에 대한 단상은 그저 내 욕심인 것 같아 거절하려 마음먹는 순간,
불현듯 한 사람이 떠올랐다.
브로이닝 가문의 사교모임에서 달빛 아래 피아노를 치던 남자.
휠체어를 타고 있던 나에게 서슴없이 다가와 긴 시간 음악과 운명에 대해 토론했던 피아노 교습 선생.
그 사람 이름이······.
“루드비히.”
“네?”
“루드비히 판 베토벤. 혹시, 기억나?”
내 물음에 일페르소가 작게 읊조리더니 끄덕인다.
“······아, 예. 브로이닝 가문에서 피아노 교습을 하는 선생이었죠. 그때 사교모임에서 보시고 다음 분기 후원 목록에 넣으라 하셨습니다.”
“응. 그건 예정대로 진행해주고, 토마스에겐 건반을 한 옥타브 정도 늘리 되 크기는 두 옥타브를 늘린 것처럼 만들어보면 좋을 것 같다고 답신해줘. 그리고 완성된 피아노는 루드비히에게 보내주면 내가 받은 것처럼 기쁠 것 같다고도 덧붙여주고.”
주억거리며 깃펜에 잉크를 묻히던 일페르소가 마지막 말에 놀란 듯 홱 하고 날 보았다.
“······네? 그 귀한 피아노를 고작 한 번 본 사람한테요?”
“앞으로 우리가 후원할 사람이잖아. 그때 파티에서 보니 루드비히 선생이 음계를 넓게 쓰더라고. 그런데도 손가락의 움직임이 새장에 갇힌 것처럼 답답해 보였어. 아마 더 많은 건반이 주어진다면 더욱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을 거야.”
그의 손에서 탄생할 음악들을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꼭 듣고 싶었다. 그러려면 좀 더 힘을 내야겠지만.
“······.”
가만히 나를 보는 일페르소에게 내가 물었다.
“왜?”
“항상 놀라워해 왔지만, 저는 또 놀랐습니다.”
“또 날 낯부끄럽게 하려고.”
“진심입니다. 그리고 진실이죠. 백작님이 뛰어나다고 한 음악가들은 모두가 거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은 백작님께 편지를 써서 고민을 말하지요. 솔직히 곁에서 지켜본 저로선, 백작님이야말로 진정 음악의 천재라 느껴집니다.”
그의 열변에 나는 그만 웃어버렸다.
“원래 훈수는 쉬운 법이야. 실제로 하는 건 또 다르지. 그래서 그들의 재능이 찬란한 거고······.”
그러니 가당치도 않다.
내 한계는 시선을 살짝 내리는 것만으로도 명확해지니까. 내 뜻대로 움직이긴커녕 하루하루 돌처럼 굳어가는 몸뚱어리.
음악을 할 수 없는 음악의 천재라니.
세상에 그런 게 어딨겠나.
내가 조금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었을까? 일페르소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 같길래 얼른 재촉했다.
“다음. 다음 편지 읽어줘. 이번엔 누구야?”
“킁. 아, 네. 네······프란츠 페터 슈베르트가 보내온 편지입니다.”
“아! 지난번 편지에서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뭉텅이로 빠진다고 그랬었는데, 좀 괜찮아졌을지 모르겠네?”
그는 나보다도 어렸다. 이제 고작 17세라 했던가. 그런데 탈모라니.
비록 백발이지만 머리숱만큼은 풍성한 일페르소가 고개를 젓는다.
“불행히도 아닐 것 같네요. 여전히 음악적 고민이 가득한 모양입니다. 편지 내용은······.”
나는 웃으며 프란츠의 편지를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우고 진지하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얼마나 고뇌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편지였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답장할게. 그대로 적어줘.”
“예.”
“너의 걱정을 이해해. 가곡의 특성상, 선율과 가사에 집중되다 보니 반주의 존재감이 옅어지곤······하지······.”
갑자기 목이 따끔거린다. 어젯밤, 벽난로가 꺼진 채로 책을 너무 오래 읽었나?
“···?”
“큼큼. 아냐, 아냐. 계속할 게. 그러니 이제는 반주도 멜로디처럼 이야기의 영역으로 가져와 보는 건 어떨······큼. 어떨······.”
“백작님?”
“어, 일페르소, 미안. 근데 숨이 좀······.”
턱하고 막힌 숨통이 트이질 않는다.
누군가 내 목을 조르고 있는 것처럼.
순간,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다리, 허리, 가슴······.
이젠 목이 굳을 차례였나?
······흐억. 흐억.
아무리 숨을 쉬려 해도 괴상한 소리만 튀어나올 뿐이다.
“백작님! 백작님!”
일페르소의 비명이 쩌렁쩌렁 울린다.
이윽고, 복도에 가까워지는 사람들의 발소리.
그러나 시야는 이미 뿌옇다.
가장자리부터 타들어 가듯 검게 물든다.
꼭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덮쳐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죽는 걸까?
죽으면, 어떻게 되려나?
성직자들은 육신이 자유로워질 거라 그러던데······.
그러면 나.
혹시, 음악을 할 수 있는 건가?
의식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생각했다.
와.
그거.
‘행복하겠다.’
#
“서호야! 한서호!”
······뭐지?
고풍스러운 무늬가 가득한 책상.
나도 모르게 뻗었던 손을 깜짝 놀라 떼었다.
차단봉엔 손대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걸려있다. 오래된 거라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단다.
그러니까··· 독일어로. 이게 어떻게 읽히는 거지?
“그거 만지면 안 돼. 200년도 더 된 거라 아주 중요한 거야. 여기 살던 백작이··· 근데 얘 며칠 전부터 왜 이렇게 넋이 나갔지? 어디 아프니?”
“첫 해외여행이잖아. 신기한 것들 투성이니 그럴 만도 하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아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눈높이를 맞추는 엄마.
서서히 감각이 돌아온다.
그럴수록 방금 전에 느꼈던 슬픔이 또렷하게 살아난다.
“서호야, 너 우니?”
“으, 응?”
엄마의 말에 팔을 올렸다.
볼을 간질이며 미끄러지는 눈물을 소매로 슥슥 닦아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나갈까?”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지금 여기서 나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중요한 걸 두고 가는 기분. 아니, 그걸 넘어서 나 자신을 두고 가는 기분이랄까.
“아뇨. 여기 더 있고 싶어요.”
“응?”
“투어 끝날 때까지 여기 있어도 돼요?”
의뭉스러운 엄마의 시선을 잠시 미뤄두고 고개를 돌렸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방안을 훑기 시작했다.
이상한 소리지만, 이 이국적인 광경이 너무나 익숙하다.
보이는 것뿐만 아니다.
벽난로의 불꽃이 탁탁 튀는 소리, 휠체어 바퀴가 바닥을 긁으며 내는 소리, 일페르소의 노크와 그가 날 부르는 목소리까지도 생생하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12살의 몸으로 회귀한 지 3일 차.
그 당혹스러움이 가시기도 전에 나는,
······전생(前生)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