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09
109. 여행의 이유 (1)
복작거리는 대학 강의실의 풍경은 오랜만이었다.
물론 기억 속의 강의실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공간의 크기만해도 배는 넘을 것 같았고, 반원형 계단식에, 강의대 앞에는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자리잡고 있었다.
게다가 옆으로 살짝만 고갤 돌리면 마법사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고풍스러운 건물과 정원이 펼쳐진다.
비가 내리면, 물이 조각조각 고여서.
낙옆이 떨어지면 울긋불긋한 카펫이 깔려서.
눈이 내리면, 눈이 생크림처럼 덮혀서.
사계절 언제든, 아름다울 것 같다.
‘왜 그토록 오고 싶어하는지는 알겠네.’
이곳에서 수학한다면, 다를 것 같다.
영감이 마구 샘솟을 것 같고, 대학생활이 마냥 즐거울 것 같고, 스스로가 클래식이란 악보의 한 획이 된 것 같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할 수 있겠지.
나였어도 그랬을 거다.
······브리너의 기억이 떠오르기 전이라면, 분명히.
“교수는 홀랜드 팰머라는 사람이야.”
레오의 설명에 내가 끄덕였다.
저기 커다란 배너에 얼굴과 함께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었다.
“미국인 피아니스트인데 유럽 스타일의 우수성을 아주 강력하게 주장하는 교수중 하나지. 조금 과한면이 없지 않지만 고전에 대해서만큼은 심도 깊게 연구해온 거장이라 학계에서도 인정하는 분위기야. 스승님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만.”
“스승님은 왜?”
“스승님도 여기 출신이시거든. 홀랜드 교수는 여기서 20년을 넘게 있었고. 과가 다르니 수업을 들으셨을 것 같진 않은데 또 모르지······어. 오셨네.”
마침 5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백인 남자가 문을 활짝 열며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강단 중앙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피아노에 기대어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홀랜드 팰머 교숩니다. 공개 특강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
“레오도 참 특이해. 쉬라고 했더니 특강을 들으러 갔네. 평소에 노래 부르던 클럽을 먼저 갈 줄 알았는데.”
안나가 커피 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손바닥만한 책을 읽고 있는 장을 보며 덧붙였다.
“너도 의외고.”
“음?”
“그 수업을 듣는 걸 허락했잖아. 너 그 교수 싫어하지 않았어?”
장이 책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안나를 보며 말했다.
“싫어한다기 보단, 너무 본인만이 정답인 양 강요한다고 생각했지.”
“그게 그거지. 근데 왜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한 거야?”
“레오가 보여주고 싶다잖아.”
“···맞아, 그랬지. 그래서 대체 같이 보러간 친구는 누군데?”
안나의 물음에 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말하지 않았어? 영감 그 자체인 친구라고.”
“······.”
얄밉다. 한대 쥐어박고 싶을 만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장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솔직히 처음에 강의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을 땐,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궁금해져서 말이야.”
“뭐가?”
“팰머 교수의 수업을 들은 그 친구 반응이.”
갸웃 거리던 안나가 시간을 확인하곤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어깨에 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일단 가봐야겠다.”
“예전에 기억나?”
“어떤 거?”
“학교에서 유명했잖아. 수업 받다가 쫓겨난 동양인 세명. 정원을 빙빙 돌면서 울분에 찬 그 표정이 기억나네.”
“팰머 교수가 한 두번 그랬나. 그래서 동양인들이 꺼려하는 교수 중 한 명이잖아. 충분히 논란이 될만도 했는데 잠잠한 거 보면, 클래식계가 참 폐쇄적이긴 해······근데?”
“그 친구는 다를 것 같아서.”
“뭔···.”
의문을 표하려던 안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그 친구 동양인이야?”
#
“오늘 특강의 주제를 아는 사람?”
홀랜드 교수의 물음에 학생들 중 한명이 대답했다.
“‘유럽 클래식의 고전’이요.”
그러자 그는 웃으며 뒤편에 매달린 배너를 가리켰다.
“이런, 정답이 너무 큼직하게 걸려 있었네.”
학생들의 웃음소릴 들으며 그가 강의를 시작한다.
“자, 우리가 지금 어디있는지 봅시다. 거기 앞에 앉은 학생.”
“강의실이요.”
“내가 설마 그걸 물어보려고 질문했을까.”
“유럽이요.”
“주제가 유럽의 클래식이라서 그래? 근데, 너무 극단적이잖아.”
“프랑스요.”
“그렇지 프랑스! 그럼 프랑스에서 유명했던 연주자 누가 있을까?”
그의 손가락이 학생들을 훑었다.
대답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모리스 라벨이요.”
“좋아. 훌륭한 연주자지. 고전파에 속하진 않지만, 현대의 기점으론 그도 고전이라 불러야 마땅해. 밤의 가스파르. 아주 기괴하면서도 유쾌한, 명곡이지. 자, 또?”
“드뷔시도 있어요.”
“좋아. 그럼 유럽 전역으로 범위를 넓혀본다면?”
“······.”
툭툭 나오던 대답들이 멈췄다.
떠오르는 음악가가 없어선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고르기 어려운 거다.
“이제 말하기도 어렵지. 왜일까?”
“너무 많습니다.”
홀랜드 교수가 만족스레 끄덕였다.
“클래식의 연주 스타일을 양분하면 유럽과 미국을 꼽지만, 사실 전통으론 미국보다 우세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클래식을 하는지, 재즈를 하는지 가끔 헷갈려하거든. 교육의 문제야. 물론, 그래도 그들은 양반이지. 저기 바다건너 엥엥— 모기 소리나는 악기를 다루며 그게 음악인 줄 아는 사람들에 비하면.”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온다.
한편, 레오가 슬쩍 내쪽을 바라본다. 불편한 기색이고, 미안한 표정이었다.
“뭐, 동양의 신비는 제외해두고, 우린 미국과 유럽을 기준으로 다시 한 번 보······.”
“하지만 이미 세계 곳곳에서 우수한 연주자로 인정받고 있는 걸요.”
홀랜드 교수의 말을 끊은 건 레오였다.
그러자 홀랜드 교수가 입꼬릴 올린다.
“이런 반박도 환영이라네. 하지만 잘 못 알고 있어. 대체 누가? 누가 우수한 연주자로 인정받고 있지? 설마, 한서호?”
“······.”
내 이름이 튀어나오자 레오도 당황했는지 멈칫거렸다. 하지만 이내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국제 콩쿠르 최초로 두 부분에서 동시에 입상을 한 연주자죠.”
“글쎄. 난 인정할 수 없는걸. 내가 채점한 게 아니라서 말이야. 아, 동양 사람들한테 칭찬할만한 점이 하나 있긴 해. 하라는대로 열심히 하거든. 수학과 과학을 동시에 가장 잘하는 것과 같지. 하지만 항상 노벨상은 그들의 몫이 아니었어.”
“하지만···!”
“아, 그러고보니 옆에 친구가 그쪽 사람인 것 같은데 말이야.”
홀랜드 교수의 서신이 어느새 나를 향해있었다.
“좋은 예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 와서 한곡 연주해주겠나? 피아노를 칠 줄 안다면 말이지.”
레오는 아차 싶었는지 얼굴을 굳혔고 당장이라도 모자를 벗어던질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레오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짧게 고갤 저었다.
“재밌을 거 같은데?”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생들의 시선을 받으며 피아노 앞으로 내려가자, 풀풀 웃으며 친히 피아노 의자를 빼주는 홀랜드 교수.
“아무거나 연주해도 돼. 문제점이 뭔지 확실히 짚어줄테니.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거야.”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지만 당연히 문제가 있을 거라는 듯 말하는 그에게 나는 건반을 슥, 쓸며 되물었다.
“교수님은 확신하세요?”
“뭘 말이지?”
“본인이 알고 있는 게 고전의 전부라고.”
“뭐?”
그가 뭐라도 대답하기도 전에.
나는 건반을 내리쳤다.
#
——!
가소로운 연주의 시작이었다.
홀랜드는 팔짱을 끼고서 어디 한번 보자는 듯이 피아노와 자신이 지목한 학생을 내려다 보았다.
마지막에 꽤나 건방진 소릴 한 것 같지만, 개의치 않았다. 곧 무참히 깨부실 테니 그런 태도 쯤이야 잠시 참아줄 수 있었다.
그런데.
——!
예상 외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은 선곡부터였다.
지금 연주가 몇 마디를 훌쩍 넘어서고 있는데.
당최 무슨 곡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쯤 머릿속으로 지적할 것들을 나열해 놓고, 쏘아붙일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는데, 난생 처음 듣는 곡이라 비교할 게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
작은 감탄이 학생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유명하지 않은 곡을 연주해서 비교할 답안지가 없더라도, 실력이란 건 상당히 절대적인 기준이라 판별이 가능했다.
그리고, 지금 이 연주는······.
훌륭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아름다웠고 대단했다.
가벼운 터치감으로 귓가에 오일을 바르듯 매끄러운 느낌을 내다가도, 갑자기 건반을 다그치며 돌진한다.
타건의 힘을 아주 세세하게, 그리고 대조적으로 조정하며 음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대체······.’
홀랜드 교수의 얼굴에 붉은 꽃들이 피어났다.
그는 금방이라도 일그러질 것 같은 표정을 꾹꾹 참으며 연주를 들었다.
게다가 이제 구조가 파악이 가능한 정도까지 연주된 저 이름모를 곡은 또 어떤가.
여전히 누구의 곡인지, 어느 시대의 곡인지 알 수 없지만.
곡의 선율이며 형식, 그리고 구조까지도 고전의 그것을 답습하고 있었다.
예를들면, 제시부의 조성이 재현부에서 다시 반복된다던가.
음계에서 1도와 5도의 사용이 빈번하다던가.
쉽게 나눌 수 있는 프레이즈, 그리고 짤막한 선율들의 변화까지도.
고전을 연구해온 홀랜드이기에 더욱 잘 알수밖에 없었다.
이 곡은 제목이 ‘고전’이라 불려도 좋을만큼 완벽하다는 걸.
······불편함이 끓었다.
학생들의 감탄어린 시선이 쏟아져 내려오는데, 그 물길을 막고서 지적할 수 없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곡의 형식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8마디마다 끊어지는 형식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던 곡이 갑자기 7마디씩 나뉘어진다. 당연히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율을 마무리할 마지막 마디가 사라졌으니까. 그렇게 절뚝거리는 연주는 별안간 또다시 6마디로 줄며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5마디, 4마디, 3마디······.
선율은 점점 더 짧아지고, 프레이즈는 점점 축소되었다. 그 사이, 폭넓게 사용하던 음계마저도 좁아져 있었다. 양손을 딱붙이고 연주할 정도로.
결국 두개만 남은 건반으로 트릴(Trill)——.
그렇게 연주가 끝났다.
‘마무리가 왜 이런거지?’
홀랜드는 의아했다.
완벽하던 곡을 망친 수준 아닌가.
그래서 건방진 학생에게 벌컥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누구 곡이지?”
“즉흥연주였어요.”
“뭐?”
주변이 술렁댄다.
홀랜드 교수가 벌컥 외쳤다.
“거짓말 하지마. 이런 수준의 곡을 즉흥적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해.”
“어떤 수준이죠?”
“······.”
홀랜드 교수는 멈칫하며 입을 꾹 닫았다.
자신도 모르게 건방진 학생을 띄웠다.
그리고 건방진 학생은, 대수롭지 않게 공백 사이로 말을 이어간다.
“그게 교수님의 실수죠. 선을 그어놨잖아요. 이건 안 돼. 저건 돼. 고전 시대를 겪어보지도 않은 사람이 고전을 단정짓네요.”
“그러니, 이곡의 제목을 지금 지어보죠. 우물··· 아니, 정원 안 개구리 정도가 맞겠네요.”
처음 논쟁을 벌인, 독특한 차림의 학생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홱 돌아보자, 웃음을 참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젠장!’
이 곡은 자신을 향한 곡이었다.
진짜 고전을 보여주고, 네가 지금 알고 있는 고전은 고작 요만큼이라며 축소시켰지.
마지막엔 건반 두 개만 남을 정도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이런 곡을 그 자리에서 만들 수 있는 연주자가 현대에 몇이나 있을까?
모르겠다. 고전을 완벽하게 표현해내면서도 그 와중에 조롱을 섞다니.
홀랜드 교수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자네···. 너, 누구야.”
나는 홀랜드 교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구 흔들리는 눈빛이 촛불처럼 위태로워보였고, 나는 생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천천히 목도리를 풀었다.
안경을 빼고, 모자를 벗어 눌린 머리를 정리한다.
그다음엔.
그저, 기다리면 됐다.
“······!”
후—.
촛불이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