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31
131. 5월 (1)
······올해는 벚꽃이 언제부터 피기 시작하고, 중부 지방엔 언제쯤 올라온다.
뭐 그런 내용의 뉴스가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어김없이 고개를 치켜들 무렵.
바다 건너, 독일의 연방 문화 미디어부가 직접 초연에 관한 발표를 전했다.
전 세계 음악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
내용인즉 이러했다.
불과 한 달여밖에 남지 않은 5월 13일에, 바덴바덴의 성 앞에서 음악회가 열린다는 것.
그곳에서 초연이 연주될 것이고, 많은 이들이 예상했던 대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이를 주도할 것이란 것.
초연이 끝나면 26개의 악보들을 전부 공개할 것이란 것까지.
사람들은 예상보다 이른 날짜에 환호하며 반겼고, 몇몇 곡은 미공개로 아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희소식에 열광하는 이들에게 곧이어 새로운 소식을 전한 건, 초연을 맡은 베를린 필하모닉이었다.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더욱 그랬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상당수의 유럽인들이 독일의 결정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든, 현 상황으로 보나 정치적으로 보나 탁월한 선택이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잡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렇듯, 곱지 않은 목소리도 당연히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자체가 순수 유럽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럽에 속한 단체인 것만큼은 분명했고, 그 본질 또한 뼛속 깊이 유럽이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한서호의 경우는 달랐다.
유럽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그저 유명한 음악가일 뿐.
게다가 객원 연주자라는 포지션 자체가 무언가 두드러지는 역할이 주어질 확률이 높았기에 불편한 시선은 더욱 극단으로 치달았다.
인터넷에선 종종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이게 노이즈 마케팅이라도 된 건지 초연에 대한 이슈는 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고 이 소식에 한국이 떠들썩해졌을 땐 이미.
······한서호는 한국에 없었다.
#
“자, 다음 비평은······.”
주인호 교수가 지난 수업 때 걷은 비평지를 넘기며 도움이 될만한 내용을 읊었다.
그러면서 같은 학생에게 지적을 받는 게 익숙하지 않을 학생들을 지켜보았다.
화원 예고나, 선림 예고 등. 최고의 예고에서도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을 아이들은 대체로 자부심이 비대해져 있다.
그게 결코 나쁜 건 아니지. 자부심이 없이 음악을 한다는 건 더욱 끔찍한 일일 테니까.
하지만 비평을 수용할 자세를 길러야 했다. 그래야 자부심을 갖되 자존심을 부리지 않고 더 큰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게 바로 연주와 비평이란 과목의 존재 의의였다.
역시나, 비평을 들으며 당혹스러워하는 얼굴들.
하지만 여느 때처럼 얼굴이 붉어지거나 입술을 꽉 깨무는 이들은 없었다.
예상대로라고 생각하며 주억이는 주인호 교수에게 한 학생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지난 시간에 연주했던 김진성이란 학생이었다.
“교수님, 누구의 비평인지는 알 수 없는 건가요?”
안경을 툭 올린 주인호 교수가 당연하다는 듯 끄덕였다.
어쩐지 아쉬워하는 학생들. 씩 입꼬릴 올린 주인호 교수가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며 휘적휘적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남겨진 학생들은 평소처럼 자리를 박차고 강의실을 나서지 못했다.
주인호 교수가 논스톱으로 쭉 비평을 읽어버렸기에 몇 명의 비평이 섞여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상황.
다들 받아 적은 비평들을 훑으며 복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중에 한서호가 쓴 비평도 있겠지?”
김진성 주변에 앉아있던 무리 중, 긴 생머리 여학생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김진성의 노트에 빼곡히 적힌 비평 내용에 닿아 있었다.
“그렇겠지.”
문제는 어떤 게 한서호의 비평인지 모른다는 거지만.
#
“왔는가.”
솥뚜껑만 한 손이 흔들거린다. 바이킹을 연상케 하는 거구의 노인. 프랑코가 차에서 내린 내 손을 잡았다.
묵직한 악수를 하면서 내가 말했다.
“공항에서 조금 지체되어 늦었어요.”
“냄새 맡고 온 기자들이 있었나 보네.”
공항이 무슨 세렝게티라도 되는 것마냥 먹잇감을 노리는 카메라들 천지였지.
다시 생각해도 눈앞에 섬광이 번쩍이는 것 같아 고개를 흔들었다.
“비행기보다 여기까지 오는 게 더 힘들었을 것 같군. 얼른 들어가지.”
프랑코가 클클거리며 걸음을 옮긴다.
시선을 들자 앞서가는 프랑코 너머로 커다란 대문과 덩굴, 그리고 우뚝 솟은 나무들이 보인다.
그 사이로 보이는 건물은 백한길 회장의 저택과 비교해도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 크기였다.
프라이빗에 모든 설계를 집중한 듯한 백한길 회장의 저택과는 달리 상당히 자연친화적인 느낌이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숲처럼 우거진 나무와 식물들이 건물이 쉽사리 보이지 않도록 감싸 안았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며 프랑코를 따라 걷다 보니 정원에 나와 있는 노인이 보였다.
“어서 와요.”
다소 터프해 보이는 프랑코와는 달리 고상함이 물씬 느껴지는 그의 아내였다.
“안녕하세요.”
“오는 길에 불편한 건 없었죠?”
“네, 괜찮았습니다.”
“있는 동안, 편하게 지내요. 웬만한 호텔보단 훨씬 나을 거예요. 집이 듬성듬성 있어서 밤에 연주하기에도 전혀 문제가 없거든요.”
옆집 지붕이 저 멀리 보이는 걸 보면, 정말 그럴 것 같다. 이쯤 되면 옆집이라고 부르는 게 맞나 싶을 정도.
그렇게 멈춰서서 남의 집 지붕을 구경하고 있자, 프랑코가 피식 웃으며 나를 재촉했다.
“일단 짐부터 풀고 오게나. 배고플 테니 저녁부터 먹자고.”
······.
“호텔 말고 집에서 머무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셨을 땐, 솔직히 이렇게 클 줄은 몰랐거든요.”
포크로 슈니첼 한 조각을 뜨며 말했다.
그러자 샐러드를 우물거리던 프랑코의 아내가 빙그레 웃으며 묻는다.
“그래서 고민했었군요?”
“네. 근데, 마에스트로님과 많이 대화하면서 초연을 준비하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오겠다고 말씀드렸는데······.”
포크에 올려진 튀김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오길 잘했네요. 음식 때문이라도요.”
“정말요?”
아내의 입가에 미소가 만개했다.
정성스레 만든 음식이 칭찬받는 건, 잘 준비한 연주 끝에 박수를 받는 느낌과 비슷하려나.
“네, 정말요. 그리운 느낌이 나요.”
“응? 그리운?”
“아. 음. 지난 여행이요. 지난 여행이 그리웠거든요.”
“아~.”
약간의 말실수를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이럴 땐 외국인이란 게 엄청난 도움이 된다.
갑자기 모국어 못하는 척하기—.
“그나저나, 독어가 굉장히 자연스럽네요.”
“독일인 친구가 있었거든요.”
이것도 굉장히 뻔한 변명이었지만, 이만한 게 없지.
그렇게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가는데, 어느 샌가부터 프랑코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아내 눈치를 본다.
“여보, 뭔가 허전하다 싶었는데 말이야.”
프랑코의 말에 아내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연주자님이랑 와인 한잔할까요?”
“좋지! 내가 가져올게.”
프랑코가 히죽 웃으며 벌떡 일어난다.
여기도 우리 집과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 웃음을 흘리는데, 아내가 인자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연주자님도 함께 가봐요. 저 양반이 음향만큼이나 신경 써서 만든 창고니까. 가서 제일 비싼 걸로 달라고 해요. 맨날 쟁여놓기만 하면 뭐해.”
그녀의 말에 멈춰서서 날 기다리는 프랑코. 창고를 자랑하고 싶은지 한껏 어깨가 치솟아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움직였다. 넓은 집 한쪽에 빙글빙글 내려가는 원형 계단이 지하실로 이어져 있었다.
난간을 잡고 내려가며, 속에 있던 걱정을 슬쩍 꺼내어 물었다.
“···단원들은 반응이 어때요?”
“왜. 걱정되나?”
“아무래도, 그렇네요.”
자랑스러워해 주는 국내 상황과는 달리 유럽의 반응이 극과 극으로 나뉘고 있다는 것쯤은 자주 인터넷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물론 지지해주는 쪽(-혹은 별생각 없는)이 훨씬 더 많다는 얘길 들었지만, 그럼에도 단원들은 걱정이 된다.
“나한테 미안해하라던 그 당당한 남자는 어디 갔지?”
“하하, 그때랑 다르죠.”
함께 연주할 사이가 아니었다면 사실 별 신경 안 썼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초연을 잘 해 보이고 싶다는 욕심이 마구 샘솟는 중이란 말이지.
혹시나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리고 오랫동안 곡이 발견되길 기다렸을지도 모르는 작곡가들에게, 제대로 된 초연을 보여주고 싶었다.
“뭐 자네처럼 다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 악보들은, 분명 자네 덕에 세상에 나왔어. 그렇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그 밀실에서 숙성되었을지 상상도 안 되는군. 일단 그것부터가 자넨 자격이 있는 거야.”
그러면서 양쪽에 술병이 진열된 좁은 통로를 지나 가장 끝 벽에 도착했다.
“게다가 능력도 있지. 자격이 있는 거랑 능력이 되는 건 또 다른 문제거든. 마치 자격만 있는 왕이 있고 능력 있는 왕이 따로 있는 것처럼.”
돌아보며 호탕하게 웃는 프랑코.
문득, 공항에서 이곳으로 오는 길에 인터뷰 하나를 본 게 생각난다. 내가 비행기에 있는 사이, 프랑코가 한 인터뷰였지.
[믿든 말든 자유지만, 나는 못난 제자의 실수에서 벗어나려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니다.]의혹에 대한 반박이자.
[나는 그의 연주를 신뢰한다. 그의 연주를 애정한다.]의문에 대한 대답. 그리고.
[솔직히. 반했다.]설득과······.
[5월엔 모두가 그렇게 될 거다.]기대감.
하나의 인터뷰로 그는 음악인들을 물론이고 큰 관심 없던 이들까지 초연을 고대하게 만들었다.
그는 나를 신뢰하고 있다. 아니, 내 연주를 믿고 있다.
그리고, 함께 연주할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반대로 나도 그들을 믿을 거고.
그래야 오래 숙성된 만큼, 좋은 향이 날 테니까.
“반가운 손님이 왔으니 그에 걸맞은 술을 따야겠지. 마침 왕 하니까 이게 생각나는군.”
그러면서 프랑코가 와인 한 명을 꺼내 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병을 감싸고 있는 라벨을 훑었다.
라피트 로칠드.
일명 5대 샤또라고 불리는 최고급 와인이자, 과거엔 베르사유 궁전에 납품되었던······.
“왕의 와인.”
전생의 아버지에게도 저 와인이 선물로 온 적 있었다. 나 때문인지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던 아버지도 이 술만큼은 한잔 따르셨고, 순간 퍼져나오는 향이 엄청나 대체 무슨 맛일까 궁금했던 기억이 있다.
입맛이 절로 다셔지네.
쩝쩝거리고 있는 날 본 프랑코가 껄껄거리며 웃는다.
“자네 뭘 좀 아는군. 그럼, 오늘은 이걸로 할까.”
나는 슬그머니 미소만 지어 보였다.
#
다음날.
거대한 황금빛 천막을 연상케 하는 베를린 필하모니 건물로 들어선 나는 한쪽 벽에 걸린 초상화들 사이에 내 얼굴이 있는 걸 보곤 멈칫했다.
정확히는 브리너의 초상화였다.
“이게 왜······.”
“음? 아, 이거.”
부슬부슬 웃은 프랑코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내가 부탁했어. 단원들이 지나다니며 한 번씩 봤으면 해서.”
확실히 그럴 수밖에 없겠다.
이렇게 지나다니는 통로에 떡하니 붙어있으니.
그런데 대체 왜?
고개를 기울이며 프랑코를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어간다.
“우리가 연주할 곡들 전부, 이분 덕분에 탄생한 곡들이잖나. 난 요즘 그 악보들을 볼 때마다 감사해. 감탄과 전율을 마디마다 느낄 수 있는 이토록 위대한 곡들이 세상에 나온 게.”
그건 일종의 감사 표시이자, 잘 해내 보이겠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그래서 난 이분을 납득시키고 싶네. 아니, 납득시켜야만 하네.”
묵직한 목소리로 말하는 프랑코를 보았다.
그의 갈색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입꼬릴 천천히 올렸다.
이미 납득했지만.
백번이고 납득해줄 수 있지만.
그걸 전할 순 없으므로······.
“저도 도울게요.”
나는 그저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