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30
130. 클래식이 사랑받게 될
실기실 안은 평소보다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대학생이 된 음악가들이 처음으로 악기가 있는 방에 들어와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다른 이유가 더 커 보였다.
그들의 시선이 한 곳을 자꾸만 힐끔거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뭘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걸까?”
“오선지인 걸 보니까 작곡 중인가 본데?”
“저렇게 아무것도 없이?”
“전에 기사에서 본 것 같아. 악기를 연주하면서 곡을 쓸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있다고.”
“그거 진짜 어렵던데···.”
작곡과 학생들이 커피 한잔을 옆에 두고 쉴 새 없이 연필을 움직이는 한서호를 보며 숙덕거린다.
“궁금해 죽겠네. 사운드클라우디에 올릴 곡일까? 아니면 새 영화? 그것도 아니면 다음 앨범?”
“저렇게 집중하고 있으니 가서 물어보기도 겁나네.”
“심지어 다음 앨범 곡이기라도 해봐. 유출될까 봐 엄청 예민할걸?”
벌써 학교가 개학 한 지 3주 차.
달에 한 번은 올까 싶었던 예상을 깨고 한서호는 매일같이 학교에 얼굴을 비쳤다.
그 모습이 의외였지만, 선뜻 다가가 말을 걸고 아는 체를 하는 학생은 여전히 드물었다.
“그나저나, 진성인 연습은 좀 했어?”
한 학생의 물음에 가만히 있던 남학생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떨리냐? 나 고딩 때도 한 번을 안 떨었는데. 이게 대학생의 무게인가?”
“그런 것도 있고, 한서호 때문도 있겠지.”
“······티 나냐?”
“응 무지. 근데 뭐, 너뿐만 아니라 오늘 연주 발표인 애들 다 안절부절못하면서 한서호 힐끔거리고 있으니까.”
“친구 중에 연영과 애 한 명 있는데, 천만 영화 찍은 배우가 동기라 그 앞에서 연기하는데 엄청나게 부담스러웠다는 거야. 그땐 그래봤자 같은 학생끼리 그 정돈가 싶었는데, 막상 내가 하려니까 떨리네.”
“심지어 한서호는 천만 배우 이상 아니냐.”
“그치. 월클이잖아, 월클.”
남학생이 끄덕거리며 우황청심환을 꺼내 들었다. 바스락거리면서 입안에 털어 넣는데, 문이 열리며 연주와 비평 주인호 교수가 실기실로 들어왔다.
빙그레 웃어 보인 그가 학생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자리를······ 오늘 연주하는 친구들이 앞으로 나와보자.”
#
역사적인 초연을 앞에 두고도 학교생활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루하루 흘러간다.
머지않아 내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초연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또 한바탕 시끄러워지겠지만.
그렇기에 지금 평범하게(?) 수업을 듣는 시간들이 내겐 소중했다.
“비평을 적을 용지를 나눠줄 테니까, 각자 6장씩 가지고 뒤로 넘겨요.”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하고 허겁지겁 내 바로 앞자리에 앉은 학생이 종이를 받아 뒤로 넘기다가 날 보곤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헙.”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꾸벅 인사까지 한 학생이 삐거덕대며 앞을 보자, 옆자리 친구가 낄낄거리며 속삭이는 게 들려왔다.
“야, 아닙니다가 뭐냐. 아닙니다가.”
“으아, 몰라··· 당황해서···.”
픽 하고 웃으며 내 몫을 제외한 나머지 용지를 뒤로 넘겼다.
그러는 사이, 트레이드마크인 파마 머릴(-학생들 사이에선 브로콜리라고 불리는) 정리하고, 손수건을 꺼내 반듯하게 접은 주인호 교수가 우리에게 말했다.
“오늘은 사실상 본격적인 첫 수업이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쭉쭉 느낀 점들을 적으면 됩니다. 연주하는 친구들도 너무 긴장하지 말고~. 종이 안 받은 사람 없지? 자, 그럼 먼저 여기······.”
“김진성입니다.”
“그래요. 김진성 학생부터 시작합시다.”
주인호 교수의 호명에 한 남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위로 향했다.
성큼성큼 무대에 올라선 남학생은 마른 체형에 머리엔 노란빛이 남아 있었다. 지난번에 음악론 최 교수가 머리에 대해 물었더니, 졸업과 입학 사이에 잠깐 일탈을 했었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나는 흥미롭게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바짝 상기된 얼굴만으로 남학생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윽고, 시작되는 연주.
알레그로 모데라토(Allegro moderato).
소나타(Sonata)다.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5번.
동시에 곳곳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보면 비평을 하는 쪽은 듣고 느낀 점만 적으면 되니 편하지 않나? 라고 생각이 들겠지만.
저렇게 학생들이 머리를 쥐어뜯는 이유가 있다.
곡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면, 비평만큼 어려운 게 없으니까.
어떤 곡인지 제대로 모르는데, 어떻게 제대로 된 지적을 하겠나.
그러니 곡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연주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듣는 건 내가 누구보다 자신 있는 일이었다.
연필을 빙빙 돌리며 연주를 감상한다.
마침내 연주가 끝나자 주인호 교수는 우리에게 10분의 시간을 주었다.
“쓸 얘기가 많다면 짧은 시간일 거고, 할 말이 없다면 너무나 긴 시간이겠죠?”
주인호 교수가 안경을 닦으며 씩 웃는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에겐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떠오르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넘칠 것 같다. 하지만 황급히 옮겨적지는 않았다.
연주를 들은 직후라, 내 주관이 너무 짙은 것 같아서였다.
어디까지나 프란츠의 곡이잖나.
비평을 하는 데 있어서 원작자의 생각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작곡의 의도가 분명한 곡에서, 그걸 완전히 거스르는 해석은 결코 정답일 수 없듯이.
그러니, 나는 뭔가를 적기보단.
프란츠를 먼저 떠올렸다.
과거, 그가 내게 보냈던 편지를 떠올렸다.
[······음악이란 어떤 걸까요?]음악가가 나에게 음악이 뭔지 묻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게, 그 당시 슈베르트의 나이는 고작 14, 15살쯤.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이 타고났다 해도 음악을 정의하긴 어려울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음악에 대해 고민하기에 천재인 걸지도.
어쨌든, 나는 나름 어른스러운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말을 떠올렸지만, 장고 끝에 내린 결론은 그냥 단순하게 말 하자였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나에게 음악은 주관 속에서 객관을 찾는 일이야. 누군가에겐 그게 ‘공감’이란 단어가 될 수도 있겠고, 혹은 ‘대중성’이란 뜻이 될 수도 있겠지.]그때 난, 이렇게 말해놓고 일페르소에게 말했다.
‘나도 내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하지만 다시 쓰겠냐는 일페르소의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순간 떠오른 생각을 그냥 보내기로 한 거다.
그리고 얼마 후, 천재 소년은 답신을 보내왔다.
[비로소, 음악이 선명해집니다. 이젠 제가 뭘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스치고.
나는 주관적인 감성은 잠시 밀어둔 채로 좀전의 연주를 복기했다.
김진성이란 남학생의 소나타 5번은 여러모로 탁월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뻔하지 않은 곡이라서도 그렇지만, 곡이 가진 특성도 그랬다.
가벼운 연주라고 해서 흔히 터치감만 가벼우면 될 거라고 오해하는데, 오히려 그러다 곡이 힘없고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잖나.
하지만 저 김진성이라는 연주자는 그런 함정을 피해 꽤나 잘 해냈다.
듣기 쉽고, 편안하게.
······그렇지 않아?
내가 물었다.
당연히 소리내어 뱉은 말은 아니었고, 생각일 뿐이었다.
그렇게 편지를 쓰듯 프란츠에게 물었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프란츠였다면 이렇게 답신을 보내왔으리라 생각하며.
연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한서호 학생이 음악회 준비로 5월 초부터 빠진다더군.”
조교에게 말을 전해 들었는지, 양세종 교수가 툭 하고 말했다.
“대체 어떤 음악회길래 그러는지 궁금하단 말이지.”
“······.”
함께 차를 마시던 이종범 교수가 움찔거리더니 괜스레 차만 홀짝였다.
비밀을 지켜달라는 말은 없었지만, 검색해보니 기사 한 줄 없었다. 아직 오피셜이 나기 전이란 것.
그렇기에 이종범 교수는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괜스레 입을 열었다가 말이 퍼지고, 그러다 기사가 번지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지 않나.
이토록 대단한 일에 코를 빠트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편, 이런 그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양세종 교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교수, 무슨 일 있나? 오늘 유난히 말이 없군.”
“아닙니다. 차가 오늘따라 맛있네요.”
“호오, 역시 이 교수. 미식 쪽에도 일가견이 있다니까? 차 어제 바꾼 건 또 어떻게 알고.”
“······.”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마치 구조대원처럼 주인호 교수가 등장했다.
“학장님, 저 왔습니다. 이 교수, 나 왔어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은 주인호 교수가 찻잔을 들어 양세종 교수가 따르는 차를 받았다.
“근데, 뭘 들고 온 거지?”
“아, 이거······.”
양세종 교수가 소파에 내려놓은 파일을 보며 묻자, 주인호 교수가 파일을 집어 든다.
“오늘 처음으로 실기실에서 수업했는데, 이거 한서호가 쓴 비평들입니다.”
그러자 안도하느라 정신없던 이종범 교수가 눈을 빛냈다.
“봐도 될까요?”
“안 그래도, 같이 보려고 가져왔습니다. 워낙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아서요.”
한서호의 비평지가 교수들 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학장실엔 때아닌 침묵이 찾아왔다.
차가 식어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여섯 개의 눈들이 비평을 탐독했다.
작은 감탄이 흘러나오기도,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한숨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연신 눈가의 주름을 꿈틀거리며 묘한 표정을 짓던 양세종 교수가 갑자기 비평지를 내려놓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전공 실기를 가르치는. 즉 작곡을 가르치는 이종범 교수가 있었다.
그리고 앞을 돌아보니, 연주와 비평의 주인호 교수.
“그러고 보니······ 둘 다 실기 위주의 수업이군.”
담담하게 말하는 듯했지만.
“내 인생 처음으로 서양 음악사를 가르치는 게 후회되는군.”
어느 때보다 부러움 섞인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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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발견된 편지에도 그다지 뭐가 없네요.”
뮌헨 대학교 연구실.
조수가 양손에 커피잔을 들고서 밀란 교수 옆으로 다가갔다.
“안부를 물으면서 건강을 계속 언급하는 걸 보면, 몸이 병약했던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떤 상태였는진 알 길이 없고요.”
현미경으로 고서를 확인하던 밀란 교수가 눈이 피곤한지 끔뻑거리며 끄덕였다.
발견된 영수증과 헌정곡들로 그가 얼마나 대단한 후원자인지는 밝혀졌지만, 여전히 브리너 백작에 대해선 자료가 별로 없었다.
결국, 발견된 자료들 안에서 파고 또 파서 뭔가를 알아내야 한다는 것.
물론 성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손을······.”
“···?”
“손을 못 썼을지도 몰라.”
“누가요? 브리너 백작이요?”
“아직 추측일 뿐이지만, 여기 백작의 집사라는 사람의 필체가 영수증과 편지의 것들과 동일해. 결국, 브리너 백작은 손 하나 까딱 안 했다는 건데······.”
“그럼, 서명은요?”
“이건 좀 더 대조가 필요하겠어. 브리너 백작이 한 건지, 집사가 한 건지.”
그렇게 말한 밀란 교수가 눈을 벅벅 문질렀다.
아쉬운 마음에 한숨이 새어 나온다.
“자료들이 더 있다면 좋을 텐데.”
비단 브리너 백작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럽이 문화재가 잘 보존된 곳처럼 인식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유럽을 휩쓸었던 세계대전. 폭격으로 불탄 고서들이 얼마나 많은지 사람들은 모른다.
서양의 역사를 모두 아는 것 같지만, 결국 빙산의 일각을 보고 연구하는 것뿐이었다.
모차르트만 해도 그가 생전에 작곡한 곡이 600여 개에 이른다고 전해지는데, 결국 악보로 우리에게 남은 건 3분의 1도 안 되잖나.
미술품은 나 비싸다고 광고하듯 전시라도 되어 있었지. 악보나 편지 같은 것들은 민가나 미술품 수집가들의 가게, 도서관이나 수도원 같은 곳들에 있어서 폭격을 제대로 맞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조수가 건넨 커피만 홀짝이는데, 조수가 미소하며 말한다.
“음악사가 점점 더 흥미로워져요.”
“그래?”
애초에 고문서에 관심이 있어 연구실로 들어온 학생.
음악이나 악보 같은 것엔 관심도 없던 녀석이 최근 들어 이런 쪽으로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 같잖아요. 어쩌면 몸이 불편했을지도 모르는 백작과 그를 보좌한 집사. 너무 멋지네요.”
조수가 현미경 앞에 놓인 고서, 집사의 일기를 보며 말했다.
밀란 교수조차도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빙산의 일각을 보는 거다.
어렸을 적 읽었던 판타지 소설보다도 더 장엄하고 찬란한 이야기가 유럽의 역사라는 빙산 속에 숨겨져 있으니까.
“그나저나, 참 신기하단 말이지.”
“어떤 게요?”
“최초 발견자.”
“최초 발견자? 한서호요?”
“그래. 한서호는······.”
언뜻 봐선 정말 일기일 뿐이다.
고서 중에서도 널리고 널린 일기.
게다가 서두가 너무나 길다. 자신의 고향을 묘사하고, 그날의 날씨부터 대낮부터 마신 술맛까지 주저리주저리 적어 놨으며, 한탄과 하소연을 길게도 늘어놨다.
“대체 어떻게 이게 브리너 백작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 확신했던 걸까?”
이미 여러 인터뷰를 통해 나온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밀란 교수는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곧 온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지. 곧 오겠지. 초연이 코앞이니까.”
조수의 물음에 대답한 밀란 교수가 기대감이 두둥실 떠오른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였다.
그렇게 5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클래식이 사랑받게 될, 5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