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29
129. 가장 유명한 신입생 (8)
“흐아아아아! 끝났드아···.”
“왜 벌써 강의 세 개는 들은 것 같지?”
“너무 지루해서···. 편의점 좀 가자. 그새 출출하네.”
“진성아, 다음 주 연주와 비평 연주 뭐할 거야?”
“난 슈베르트 소나타 중에서 생각하고 있긴 한데···.”
악기론을 가르치는 최 교수가 나가자마자, 학생들이 각자의 반응으로 몸부림쳤다.
가뜩이나 지루한 과목인데, 최 교수란 사람 자체가 목소린 나긋나긋하고, 말까지 느린 데다가 유머라곤 모르는 교수였으니 설상가상이었다.
솔직히 나도 살짝 졸음이 몰려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전공 서적 덕분이었다.
악기들의 공명 방식을 나타내는 에어로폰, 멤브라노폰, 일렉트로폰, 이디오폰 등등···.
교수 목소린 졸려도, 책 내용만큼은 나에게 마냥 흥미로운 내용들이었다.
이 분야만큼은 윤 교수에게도 자주 듣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악기의 유래부터 각 악기가 소리를 내는 원리. 공명 방식에 따른 분류. 그리고 특성까지.
오로지 귀로 느끼고 짐작했던 것들을 모두 자세하게 풀어 설명하고 있었다.
내가 어렴풋이 생각해온 것들에 마침표를 찍어주는 느낌이랄까.
‘편곡할 때 여러모로 도움이 되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악기론 전공 서적을 책가방에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핸드폰을 확인하자, 무음으로 바꿔놓은 덕에 톡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양한길: 와 수업 너무 지루하다······.]뭐야, 나랑 같은 수업 들은 줄.
실없는 소리들에 웃으며 답장을 보내려는데.
[양한길: 이거 봐ㅋㅋㅋㅋㅋ]기사 링크 하나가 톡방에 떠올랐다.
들어가자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그래 매일 보는 익숙한 실루엣. 나다.
카페에서 전화를 받고 있을 때인 걸 보니, 아까 프랑코와 통화했을 때인 것 같았다. 저 때 정신이 없어서 주변 신경도 못 쓰고 독어로 떠들어댔지.
[이호익: 누가 SNS에 올린 걸 그대로 긁어와서 기사 썼네.] [양한길: 완전 연예인이라니까.] [나: 연예인은 무슨.] [양한길: 오, 나타났구만!] [이호익: 여~.] [채이연: 서호야 오랜만!]쏟아지는 반응에 피식 웃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졸업하고 유럽 여행 다녀오랴, 기자들 피해 숨어있다가 좀 잠잠해지니 개학이라 학교 다니랴.
안 본 지도 오래됐다.
‘보고 싶네.’
조만간 한 번 모이자는 말을 남기고서 학과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슬며시 문을 열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잠깐 어디 갔겠지, 라는 생각으로 잠시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한쪽에 잔뜩 프린트되어있는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학과 MT?
가만, 날짜가······대략 초연 끝나자마자일 것 같은데?
날짜를 계산해보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조교가 들어왔다.
“누구, 어! 서호 학생?!”
그녀가 날 보더니 놀란 눈으로 총총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그 뒤로 전공 실기 이종범 교수가 한 손에 노트북을 들고 함께 들어오는 걸 보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끄덕인 이종범 교수가 안쪽 프린터기에 쌓여있는 용지를 챙기는 사이,
나는 조교에게 다가가 학교 규정에 관한 질문들을 물어보았다.
“제가 아무래도 일이 좀 생길 것 같아서요.”
“어떤 일인데요?”
“연주회에 서게 되었어요.”
“음~전공과 관련된 일이면 출결은 문제 없을 거예요. 물론 과제를 못 해서 학점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빙그레 웃는 조교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며 학과 사무실을 나서는데, 용지를 한가득 챙겨서 나온 이종범 교수가 나를 불렀다.
“서호 학생.”
“아, 네.”
“어떤 연주회에 서게 되는 건지 물어봐도 되나요?”
“독일에서 이번에 발견된 악보들 초연이 준비 중인데, 거기에 초대를 받아서요.”
“초대라면······.”
나름대로 뭔가를 생각하는지 말꼬릴 흐리는 이종범 교수에게 내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객원 연주자로요.”
#
“서호? 굉장히 얼떨떨해하더군. 상상도 못 했던 모양이야.”
한편 프랑코는 뉴욕에 있는 알버트와 통화가 한창이었다.
그가 한서호의 반응을 설명하자 알버트가 크게 웃는다.
-그럴 만도 하지. 그나저나, 자네도 참 대단하군. 어떻게 그 노인네들을 설득한 거야?
“다들 황당하다는 반응이었지.”
-안 봐도 그랬을 것 같아. 근데도 용케 한서호를 허락했군.
“일단, 자네들 이름을 좀 팔았지.”
-뭐?
프랑코가 호탕하게 웃으며 그날의 일을 전했다.
한서호의 연주에 세계적 거장들이 경악하고 감탄하고 울기까지 했다는 이야기.
이에 알버트가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잘했군. 뭐, 전부 사실이니까. 헌데 그것만으로 장관씩이나 되는 양반이 설득된 거야?
“말로는 궁금해서라는데, 최근 유럽에서 인종 관련 사건도 있었으니, 독일은 그렇지 않다. 발 빼기 좋은 구실이었을 수도 있고.”
-그건 자네 제자 덕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게. 이놈이 처음으로 스승을 돕는군.”
킬킬거리는 프랑코에게 알버트가 물었다.
-그래서, 초연은 어떤 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라고?
“초연에서 연주될 곡은 총 9곡이라네. 하이든 두 곡, 모차르트 세 곡, 베토벤 한 곡 등등······. 스물여섯 곡을 전부 하기엔 공연 시간도 문제고, 나머지 곡들엔 대중들도 딱히 관심이 없으니까.”
-그렇겠지. 전부 연주되긴 현실적으로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어. 아무튼, 장소는 바덴바덴이라고 했고.
“맞아. 일시는 아마 곧 공표가 되겠지만··· 5월 둘째 주. 무더위가 오기 전에 하게 될 거야.
-5월···둘째 주···.
알버트가 필기를 하는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덤 속 대가들이 가장 오랫동안 안타까워하고 기다렸을 음악회가 되겠군.
“그렇지. 역시적인 순간이 될 거야. 그들의 음악이 바쳐진 곳에서.”
-반드시 가야겠군.
“자네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음악가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걸?”
그때, 커피를 홀짝이던 프랑코가 종업원을 불러 자작하게 남은 잔을 리필한다.
이에 알버트가 의아한 목소릴 냈다.
-갑자기 웬 이탈리아어? 자네 지금 베를린이 아니야?
“모험 중이야, 지금.”
-뭐?
“흐흐, 농담이고. 지금 제노바에 있는 노천카페야.”
-음? 거긴 왜?
“서호가 여기 커피 맛있다더라고.”
-커피 마시러 제노바를 갔다고?
알버트의 물음에 프랑코가 끌끌거리며 커피잔을 들었다.
“설마 그러려고.”
-그럼?
“생각해보니 그 곡들을 위해서 객원 연주자만 필요한 게 아니더라고.”
-···?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고민하던 알버트가.
잠시 후, 대경했다.
-자네, 설마······.
#
······이종범 교수의 경악 어린 표정을 뒤로하고.
남은 수업까지 모두 마친 나는 곧장 작업실로 향했다.
“저 왔어요.”
곧장 직원들에게로 다가가 인사하자, 김윤주 실장이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호 왔니! 커피는 맛있었어?”
“커피? 아, 기사 보셨어요?”
“당연하지. 우리들 아침마다 네 이름 한 번씩 검색해보는 게 루틴이라니까.”
“그러니까요. 왜 다른 좋은 루틴도 많을 텐데 그런 루틴을···.”
이를테면 스트레칭이라던가. 명상이라던가.
“몰라. 아침부터 좋은 기사 보면 왠지 마음이 평안해지고, 업무 효율이 상승하는 것 같아. 그치?”
덩달아 끄덕이는 직원들. 날 놀리려는 게 분명하지.
고개를 내저으며 아버지 자릴 확인했다. 초연 소식을 말할까 했는데, 안 계신다.
‘이따 얘기해야겠네.’
직원들과 다시 한바탕 인사를 하고서, 작업실에 들어섰다.
“흐아.”
소파에 넘어지듯 드러누웠다.
수업 4개를 연달아 들으니 확실히 피곤하긴 하다. 오랜만에 작업실을 왔으니, 해야 할 것들이 많은데 말이지.
기타 연습도 좀 해야 하고, 만든 곡들도 녹음해서 사운드 클라우디에 올려야 한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게다가 초연 날짜가 정해졌으니 이제 마음 놓고 다음 앨범 준비에 박차를 가해도 되었다.
“초연.”
소파에 얼굴을 묻은 채로, 짧게 뱉었다.
감회가 새롭달까.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브리너 백작과 대가들을 위한······.”
프랑코의 말이 생각나 그대로 읊조렸다.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나를 위해서 내가 연주를 한다니.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울적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파가니니도, 프란츠도, 하이든도······.
그 누구도 자신들이 만든 헌정곡을 내가 연주하게 될 줄은 몰랐겠지.
심지어 200년이란 시간을 견디고 세상에 첫선을 보이는 무대에서.
······그렇게 생각하니 꽤 즐거운 일이 될 것 같았다. 아마 깜짝 놀랄 거다. 자신들의 곡이 울려 퍼져서 슬쩍 내려다봤는데, 그곳에 내가 있다면.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고.
곧장 녹음 부스로 향했다.
늘 그렇듯 도배를 해도 될 것처럼 널브러져 있는 악보 더미 속에서.
나는 내 일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시계ꠕ가 없다면 지금이 늦은 밤이란 것도 모를 작업실에서 나와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컴컴한 복도 끝의 사무실에선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분명 아버지겠지.
아니나 다를까, 복도로 난 창문으로 일 처리가 한창인 이 회사 대표님이 보였다.
역시 일이 많으시구나······.
돌아가서 조금 더 있다가 올까 생각하는데, 아버지가 나를 발견했다.
“어, 서호야.”
그리곤 손목을 확인하며 너털웃음을 흘린다.
“어후, 벌써 시간이······ 집에 갈까?”
“일 끝나셨어요?”
“대충은. 나머진 내일 하면 될 것 같아.”
방금 전까지 전투적으로 훑던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한 아버지.
슬며시 다가간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요즘도 많이 바쁘시죠?”
“바쁘기야 하지. 요즘 영화 산업이 호황이라 더더욱.”
“······.”
“왜?”
아버지의 물음에 고갤 저었다.
“아녜요. 아 참. 저, 독일에 다시 갈 일이 생길 것 같아요.”
“음? 무슨 일로?”
“이번에 발견된 악보들 초연 때문에요.”
순간 멈칫한 아버지의 고개가 나를 향한다.
“설마······.”
아버지는 살짝 놀란 눈으로 내게 물어왔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시를 보냈다.
그러자 한껏 커진 눈으로 날 바라보는 아버지.
나는 설명을 이어갔다.
“일단 초연은 5월 둘째 주쯤 바덴바덴에서 할 예정인데, 저는 보름 전에 베를린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연습 때문이구나?”
“네, 맞아요.”
그러자 아버지가 책상을 정리하던 손을 뻗어 캘린더를 집어 든다. 휙휙 하고 5월로 넘기더니 이내 내려놓으며 주억였다.
“좋아, 알겠다. 가능할 것 같아.”
“···?”
“시간 될 것 같아. 돼야지. 엄마와도 아빠가 얘길 해보마.”
지금 내가 잘 못 들었나?
나는 눈을 깜빡이며 아버질 바라보았고,
그는 책상을 비추는 스탠드만큼이나 밝은 미소로 내게 말했다.
“다음엔 같이 가기로 했잖아. 우리 가족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