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88
188. 사상 최고의 결선 (1)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날카로웠던 눈빛이 무뎌지고, 입이 굳게 닫혔다.
제대로 한 방 먹인 것 같지만, 결코 유쾌하진 않다. 오히려 더 입맛이 쓰다.
내가 괜한 소릴 했나? 김세진이 알면 분명 기분 나빠하겠지···.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나는 그저 느릿하게 인사를 하고서 먼저 로비로 나섰다.
공연장에서 나온 사람들로 로비는 시끌벅적했다.
그 사이로, 근처 관광을 하다가 다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돌아온 부모님과 신수아 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얘기 했어?”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나를 본 것인지 엄마가 내게 물어왔다.
“그냥··· 별 얘기 안 했어요.”
“세진이 아버지시라며.”
“어, 아셨어요?”
갸우뚱하다 자연스레 아버지쪽을 보았다.
하긴, 아버지라면 알 법도 하다. 같은 세대의 피아니스트였으니까.
물론 아버진 스스로를 피아니스트라고 하지 않는다. 나도 그런 얘길 할 때마다 왜 피아니스트가 아니냐고 묻진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아무튼.
아버지가 시선을 내 너머로 둔 채로 말했다.
“유명하신 분이지.”
나도 다시 고갤 돌렸다. 여전히 공연장 안에서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는 김세진의 아버지가 보인다.
“누나, 나 배고파······.”
때마침, 신수아 막내 동생, 신호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아이의 참을성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모두가 알기에 우리는 곧장 건물을 나섰다.
장 오슬로의 공연을 따라다니며 바르샤바에도 몇 번 와본 적 있다는 레오.
그가 파이널리스트 일행과 함께 근처 맛집에 자리를 잡아두었다기에 그곳으로 향했다.
맨앞에서 엄마는 신호찬과 손을 잡고서 걸어간다.
그 뒤로 신수아와 그녀의 둘째 동생이 수다를 떤다. 물론 수다의 90%는 동생이 떠들고 신수아는 반응만 해주는 정도.
그런 광경을 보며 가장 뒤에서 나와 아버지가 함께 걸었다.
발걸음이 여전히 무거웠다.
“세진이 공연은 어땠니?”
“···대단했어요.”
“그럼 네 얼굴에 그늘이 진 건 세진이 아버지 때문이겠구나.”
“······.”
말문이 막혔다. 애초에 거짓말할 생각도 없었지만, 앞으로 그런 생각이 생기더라도 속일 수가 없겠어.
느릿하게 끄덕이자 아버지가 대충 어떤 문제인지 어림잡은 듯 말했다.
“과거, 각광받는 피아니스트였고, 지금은··· 김세진의 아버지로 유명하지. 아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기로 악명높은.”
“아시네요.”
“이 바닥이 좀 좁아.”
주억이며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불쑥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어 잠시 입을 닫았다.
아버진 그걸 기다려주었고, 이내 내가 궁금한 걸 물었다.
“아버진 욕심 안 났어요?”
내 질문에 피식 웃는 아버지.
“욕심? 났지. 악기 모양의 장난감은 전부 사다가 네 옆에 놓았을 정도로. 네 엄마한테 많이 혼났다~소리 퀄도 안 좋은 장난감이 뭐 그리 비싼지.”
“근데 뜻대로 안 돼서 애타셨겠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그건 또 아니었던 것 같아. 예전에 다짐했었거든. 내 아이에게 만큼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게 하고 싶다고. 그래서 피아노를 치웠다. 네가 너무 울더라고.”
“지금 돌이켜보면, 왜 울었는지 알 것 같기도 해요.”
“왜?”
“너무··· 그리웠거든요.”
“그게 뭔소리냐.”
“감사하단 얘기에요.”
“뭐가?”
괜스레 쑥쓰러워져 머릴 긁적이며 툭 던지듯 말했다.
“한번도 재촉하지 않으셔서요.”
그러자 아버지가 푸스스 웃으며 답한다.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더라.”
“맞아요. 결국 돌아돌아서···하게 되더라고요.”
내겐 음악이 그랬지.
골목을 벗어날즈음. 아버지는 회사에서 온 전화를 받기 위해 걸음을 늦췄다. 내 앞에 있던 둘째 동생은 어느새 막내 옆으로가 엄마와 수다중이었다.
자연스레 혼자 남은 신수아와 발이 맞춰졌다.
그리고, 옆에선 신수아가 대뜸 작게 말했다.
“멋지다.”
“네?”
“엿들으려던 건 아닌데, 굳이 들리는 걸 귀를 막는 것도 좀 웃겨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왼쪽이요, 왼쪽! 핸드폰으로 지도를 보며 앞 사람들에게 가게 방향을 알려준 그녀가 계속 화면에 두눈을 올린 채로 말한다.
“아무튼. 나까지 기분 좋아지고. 좀···.”
말을 삼키듯 작게 중얼거린 그녀의 끝말이, 내겐 선명하게 들려왔다.
“부럽네.”
#
탁—.
탁자 위로 악보들이 떨어져내렸다.
김세진의 시선이 그 위를 천천히 훑었다.
이어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연주를 들으면서 심사위원 성향에 따라 거슬릴만한 부분을 몇몇 부분 표시해놨다. 결선 곡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부분도 있으니 검토해봐라.”
“네.”
“그리고 이건 매스컴에서 우승 후보랍시고 떠들어대는 두 사람의 연주를 분석해 놓은 거다. 그들이 가진 강점으로 맞붙어 이기려하면 절대 못 이길 거다. 그들의 부족한 점을 찾고 거길 파고들어서 네가 두각을 보여줘야해. 다행히 벨라 타멜리아는 장단점이 확실하다. 강렬한 음색을 내고, 테크닉도 수준급이지만 대신 자신만의 피아니즘이 없다는 지적을 받아왔지.”
귓구멍을 타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목에 걸린 듯 답답하다.
“문제는 한서호인데······.”
숨이 점점 더 막혀왔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숨을 참듯 그의 말이 끝나길 바라는 수밖에.
마침내 방으로 들어온 김세진은 무너져내리듯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들고 들어온 악보를 모두 쇼팽 콩쿠르 측에서 준 디지털 피아노 앞에 얹어놓고서 시선을 밖으로 내던졌다.
새로운 숙소의 방에선 쇼팽 콩쿠르가 열리는 바르샤바 필하모닉 콘서트홀이 정확히 내려다 보였다. 이것마저 아버지의 뜻이었다.
그렇기에 탁 트인 하늘마저 그에겐 투명한 덮개를 씌운 듯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마치 영화 ‘트루먼 쇼’ 같았다. 그것도 오로지 아버지 한 사람을 위한.
그럼에도.
사락——.
크게 숨을 들이쉬며 악보를 넘긴다.
아버지의 글씨들이 들러붙어 괴롭히지만 그래도 계속 악보를 넘긴다.
‘우승을 해라. 그게 네 피아니즘이다.’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쇼팽 콩쿠르 우승.
그건 내 오랜 꿈이기도 하니까.
#
부른 배를 두드리며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을 뒤적였다. 백한길 회장의 전화번호를 누르려다가 다시 뒤로가 박 실장의 번호를 찾았다.
전화를 걸며 마른 침이 삼켜지는 건, 백한길 회장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얘길 그에게 들어서였다.
발신음이 길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들려오는 박 실장의 목소리.
-어, 서호야. 나와서 받느라 조금 걸렸다.
“그러실 것 같았어요. 회장님은 좀 괜찮으세요?”
-괜찮아지셨다가 또 안 좋아지셨다가 반복하셔. 그래서 아예 최 교수님이 상주하고 있어.
상태가 생각보다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지금 주무세요?”
-아니, 좀 전에 일어나셔서 오늘 있었던 경연들 몰아 보시는 중이야. 들어가서 바꿔드릴게.
잠시 후. 박 실장의 목소리보다 크게 들려오는 음악이 멈추고, 백한길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호텔이냐?
“네. 오늘 경연 보는 중이셨어요?”
-그래. 지금 한 두 놈 정도 봤는데, 다들 실력이 지난 번 쇼팽 콩쿠르보다 나은 것 같아.
“특히 마지막 순서가 엄청났어요. 회장님도 깜짝 놀라실 걸요?”
-그래? 누군데?
“김세진이요.”
-그 녀석도 잘하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때는 비교도 안 돼요.”
-기대되는군. 넌 좀 어때?
“저야 뭐······.”
말을 끌다가 답했다.
“즐기고 있죠.”
-잘하네. 잘해.
껄껄 웃는 백한길 회장. 그가 뒤이어 묻는다.
-끝나면, 바쁘지?
“아마도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투어도 돌아야하고, 만약에 쇼팽 콩쿠르에서도 입상을 한다면 그것도 따로 스케줄이 생길 거고요.”
-돌아와선 좀 쉬어라.
“그러려고요. 이번 콩쿠르는 못 오시니까, 가서 실연 해드릴게요.”
-사실 이제 다 괜찮아져서 갈 수 있는데······.
백한길 회장의 말을 박 실장이 단칼에 잘랐다. 그들을 만난 뒤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안됩니다. 회장님.
-박 실장이 문제야. 아주 요즘 내 엄마다. 엄마야. 위험하다고 이것도 못하게해, 저것도 못하게해. 걱정만 잔뜩 늘어가지고.
내가 작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걱정 안되게 하셔야죠.”
-얼씨구? 내가 잘못했다 이거냐?
“그냥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푸흐흐, 네가 안다며. 난 오래 살 거라며.
그랬었지. 헌정곡으로 그를 위로하려 했고, 내가 기억하는 미래의 정보로 그렇게 답했었지.
하지만 요즘들어 불안해진다. 지금까지 많은 미래들이 바뀐 것처럼, 또 무언가 바뀔지도 모르잖나.
······물론 그런 얘길 털어놓을 순 없기에 그럴 거란 말로 무마하고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정적에 휩싸인 호텔방.
조금, 유사한 상황이어서일까. 문득 그리운 이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백작님. 백작님은 아주 오래 사실 겁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너도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아니, 이것보다 더욱 착찹했겠구나.
너에겐 미래에 내가 오래 산다는 정보조차 없었을 테니까. 앞이 깜깜했을 테니까.
그럼에도 나를 위해 애써 희망이 있는 것처럼, 확신에 차 있는 것처럼.
늘 그렇게 말해야했을 거다.
“······.”
지금 만약에 옆에 있다면 할 말이 참 많을 것 같다.
지금 떠오르는 수많은 감정들 중 하나만 끄집어내도 밤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번 생에 내 입을 통해 전달될 일은 아마도 없겠지.
‘그러면 다음 생엔··· 가능할까?’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는 것처럼.
그래서 내가 음악을 다시 하게 된 것처럼.
만날 사람도 반드시 만나게된다면.
그게 언제가 되었든······.
만날 사람 중에 너는 꼭 있었으면 좋겠다.
#
“후우······.”
낙엽이 바스러지는 듯한 거친 숨소리였다.
박 실장이 그늘 진 얼굴로 다가가 물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좋네. 좋아. 결선이 코앞이라 그런가 몸이 가뿐하네.”
들려오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안색은 창백하다.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지만, 박 실장은 외면했다. 그가 그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하기에.
“다행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약기운에 좀 힘들었을 뿐이니. 아 참. 양 대표한테 전화 연결 좀 해줘.”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박 실장이 문화재단, 양가호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스피커 폰으로 바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회장님이세요?
박 실장의 번호였지만 이런 적이 한두번이 아니기에 회장님이냐 먼저 묻는 양가호 대표였다.
“어, 나야.”
-네, 회장님.
“듣자하니, 쇼팽 콩쿠르 결선 같이 볼 사람을 구한다지?”
-벌써 소식이 퍼졌습니까?
문화 재단에서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 중이란 소식이었다.
한서호가 쇼팽 콩쿠르 결선에 진출한다면, 문화 재단 후원자들 대상으로 콘서트홀에서 다 같이 모여 응원하자는 내용의 행사.
“나도 가도 돼지?”
-어휴, 당연하죠. 편하게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해놓겠습니다.
“아 참······그 벽에 걸어뒀던 악보는 뗐나?”
-아, 그거 쇼팽 콩쿠르 결선 때까진 걸어두려고요. 그것도 서호의 업적 아닙니까. 하하하. 후원자들 오면 자랑도 좀 하고 그러려고요. 거기도 수집병 있는 양반들이 많아서 아마 엄청 부러워할 거니다.
“서호 업적인데, 자랑은 왜 양 대표가 해?”
-서호가 안 하니까, 제가 하죠.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하핫, 그렇죠.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양가호 대표의 물음에 백한길 회장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냐, 그냥···.”
무슨 조화인지 악보를 보자마자 강렬하게 손을 뻗고 싶단 생각이 들었고, 그날 이후로 계속 생각이 난다고······.
뭐, 그런 첫눈에 반한 이야기 같은 소릴 꺼내기엔 민망한 감이 있었기에.
그는 대수롭지 않은 척 답했다.
“보관실로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볼까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