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30
230. 운 (3)
연주자들을 뒤풀이 장소로 보내놓고 숙소로 돌아온 사이렌 매니저는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를 발견했다.
슬라임처럼 점점 카펫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웬디. 그 옆에서 플로렌스는 책을 읽고 있었다.
쉬는 것도 극과 극인 두 사람에게 다가가며 그가 은근하게 물었다.
“정말 안 놀아도 되겠어? 거기 세느강이 보이는 펍인데?”
곧 바닥에 안착할 것 같던 웬디가 다시 몸을 일으켜 소파에 드러눕는다.
그녀가 목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놀고 싶은데, 놀 수가 없어요. 너무 피곤해요. 아직 투어 절반 밖에 안 돌았는데 무슨 막바지인 것 같아······.”
“전 지금 딱 좋아요. 야경도 예쁘고, 책도 재밌고.”
“넌 책이 어떻게 재밌니···?”
신기하다는 듯 플로렌스를 구경하는 웬디.
플로렌스는 저럴 줄 알았다. 술도 안 좋아하고, 저렇게 쉬는 걸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그 술 좋아하는 웬디까지 뒤풀이를 거절할 줄이야.
하긴, 두 사람의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하다. 그만큼 이번 투어에 힘을 많이 쏟았다는 거겠지.
괜히 사이렌 최고의 명반이 될 거란 얘기가 들려오는 게 아닌 거다.
“그래, 다들 오늘 수고 많았어. 내일 일찍 출발하니까 푹 쉬어. 푹.”
“쇼핑할 시간도 없겠죠······?”
웬디의 미련 가득한 질문에 플로렌스의 귀도 덩달아 쫑긋거린다.
두 사람이 유일하게 잘 맞는 분야였다. 쇼핑.
“음······두 시간쯤 빼볼게.”
“오예!”
웬디는 소파 위에서 활어처럼 들썩였고, 책장을 넘기는 플로렌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때였다. 샤워를 마친 에밀리가 머리를 툭툭 털며 거실로 나온 것은.
“오셨어요?”
매니저가 그녀를 멍하니 보다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뭐야? 벌써 왔어?”
“왜요, 제가 안 들어오기라도 할 줄 알았어요?”
씩 웃으며 생수 한 병을 집어 드는 에밀리.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근데 아까 전화로 그건 왜 물어본 거야? 연주자들 뒤풀이 어디서 하는지?”
“아, 그거요? 징검다리 역할 좀 했어요.”
그리곤 긴 다리로 모델처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미묘하네. 쟤 지금.”
매니저가 고갤 돌려 웬디와 플로렌스를 보았다. 웬디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눈을 끔뻑이고 있었고, 플로렌스는 뭔가 아는 눈치다.
눈을 좁힌 매니저가 말꼬릴 올렸다.
“멘탈 나간 거지?”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그냥 평소와 다름 없이 쿨하고 자신감 넘쳐 보이지만.
그녀를 오랫동안 본 그가 모를 수 없었다. 저 미묘한 변화를.
“완전 나갔잖아요. 어디까지 나갔는지 찾기도 힘들 정도로.”
플로렌스가 동조하자, 웬디가 갸웃거렸다.
“괜찮아 보이는데?”
“둔한 녀석.”
“에, 아니. 콘서트 안 올까 봐 일부러 기타 선물 안 들고 갔었고. 콘서트 왔어. 선물도 줬지? 게다가 그걸 빌미로 데이트까지 했어. 근데 뭐가 문제지?”
그러게 뭐가 문제일까.
매니저가 이번엔 웬디와 비슷한 표정으로 플로렌스를 보았다.
이에 그녀가 책을 슬쩍 내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데이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비지니스였던 거지.”
#
“밑에서 이러고 올려다보는데, 와 손이 차가워지더라니까. 대학교 입학 실기 때보다 몇 배는 더 떨렸어.”
센느 강이 보이는 펍.
와인 잔을 앞에 두고 연주자들은 수다가 한창이었다.
대화의 대부분이 한서호 목격담.
분명 모두가 함께 같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마치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에게 설명하듯 흥분해서 떠든다.
“저도요. 마침 우리가 그날 한서호 얘길 했었잖아요. 그랬는데 나타나니까 악보가 안 보이는 거 있죠.”
“전 그냥 오디션 장인 것 같았어요. 물론 한서호는 그렇게 생각도 안 했겠지만.”
“쩝. 그렇겠지. 베이노프 심포니에 베를린 필, 빈 필까지 최고의 단원들 보던 눈에 우린 그냥 애교 같지 않았겠어?”
······그렇게 한참 동안 떠들었는데도 열기는 식지 않았다. 오히려 와인 특유의 홀짝거리다가 훅 올라오는 취기가 더해져 분위기는 더욱 달아오른다.
“그거 알아요?”
“뭐?”
“지금 저희 여기서 2시간째 마시는데, 한 번도 뉴스 기사 안 찾았어요.”
“오, 그러네!”
“인터넷 반응이 대수겠어? 우리가 지금 누굴 만났는데.”
“완전 행운이었죠. 솔직히 이번 투어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술자리까지 같이 왔으면 진짜 평생 자랑감이었을 텐데.”
“그러게. 그건 많이 아쉽네. 뭐, 사이렌 멤버들도 안 온 뒤풀이에 애당초 한서호가 온다는 게 말도 안 되는 바람이지만.”
자조 섞인 상황 판단에 아쉬운 목소리들이 들끓었다.
“궁금한 거 정말 많았는데······.”
“뭐가 궁금했는데?”
“전 어떻게 악기를 그렇게 다양하게 그것도 최고 수준으로 다루는지 궁금했어요.”
“그거 그냥 재능 아냐?”
“그래도 특별한 연습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난 ‘한 필하모닉’ 뽑을 때 기준 같은 거 알고 싶네. 앞으로 또 모집할 수도 있잖아.”
“그러면 경쟁률 진짜 엄청나겠네요.”
“그때도 전 세계에서 몰렸다던데, 그게 가장 저점일 줄이야. 꼭 내가 망설이다가 안 산 주식 같네······.”
비유가 찰떡이라 괜스레 숙연해지는 연주자들.
그때 펍 문이 열렸다.
물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발걸음이 자신들 쪽으로 향하기 전까진.
“안녕하세요.”
연주자들의 시선이 인사가 들려온 쪽으로 몰렸다.
동시에 여러 명이 입을 가리고 새어 나오려는 목소릴 막았다.
“하하···.”
모자를 눌러 쓰고 있지만, 오늘 본 사람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게다가 그 요상한 안경도 안 끼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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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가.”
테라스에 단호한 목소리가 툭 던져졌다.
사이렌의 세션으로 투어를 함께 돌고 있는 비올리스트 릴리였다.
-왜? 그땐 투어도 끝난다며.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야지.
그리고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
동창의 만나자는 전화가 늘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조이. 걔도 온다며.”
-그런데?
“걔 지난번에 한 번 봤어.”
-무슨 문제 있었구나?
“문제? 있었지. 걔한텐 아니었을 수도 있고.”
한숨과 같은 대답을 뿜어내고서, 말을 이어간다.
“걔가 그러더라. 돈이 급하면 어쩔 수 없이 하고 싶은 음악이 아니라 돈 주는 음악 쪽으로 빠질 수밖에 없나보다고. 하고 싶은 것만 할 순 없는 거 아니겠냐고. 맞는 말인데. 그게 난 너무 자존심 상했어.”
-어후, 걔 오케스트라 입단했다고 여기저기 눈치 없이 자랑하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 솔직히 연주 실력은 네가 훨씬 나았는데······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혹시 마음 생기면 알려줘?
“응.”
전화를 끊고서 친구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솔직히 연주 실력은 네가 훨씬 나았는데.’
그게 이제 와 뭐가 중요하겠어. 결국, 결과가 말해준다.
‘실력은 있었지만, 운이 나빴던 사람들이겠죠. 한서호는 그들에게 운이 되어준 거고요.’
이번엔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비웃음이었다.
“술 다 깼네.”
찬 바람에 얼얼한 볼을 양손으로 녹이며 펍 안으로 들어가는데, 테이블이 조용하다. 분명 다들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아까처럼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34마디에서 두 분이 같이 보잉을 하시잖아요?”
“와, 그걸 기억하세요?”
갑자기 진지하게 음악 얘기 중이었다.
뭔가 싶어 다가가니 옆자리 연주자가 손짓한다.
“어, 릴리. 이리와. 우리 피드백 받는 중이었어.”
“무슨 피드백······.”
갸우뚱하며 묻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 없던 사람이 보였다.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듯했다. 저 사람이 여기 왜······?
그 사이, 그도 이쪽을 보았다. 그리곤 묻는다.
“비올라 연주하시던 분, 맞죠?”
“오, 진짜 다 기억하시네요?”
신기해하는 연주자들.
물론 릴리는 상황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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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의 분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무르익었다.
나는 연주자들에게 나름의 피드백을 했고, 그들은 그것을 수첩이나 핸드폰에 받아적기까지 했다. 가볍게 얘기하려고 했는데, 나도 부담스러워져 아주 디테일하게 짚었다. 한 명 한 명의 연주 습관까지도 언급하면서.
그 뒤로는 각자의 인생 얘기가 이어졌다. 술자리에 빠질 수 없는 주제잖나. 나는 굉장히 흥미롭게 그들의 이야길 들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 모두 자신들의 인생을 엉킨 실타래 같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클래식은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음악이 좋아서 이렇게 다른 장르에서라도 버티고 있다는 것.
에밀리가 연주자들을 가리켜 자신과 닮았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와인과 같은 대화였다.
웃음이 향긋하게 퍼지면서도, 뒷맛이 씁쓰름한.
한 모금 머금고서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건너편에 앉은 릴리라는 비올리스트를 보았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서 슬쩍 물었다.
“아까 저보고 ‘운’이라고 하셨죠?”
“네? 아, 저 그게······.”
그녀가 잠시 당황하더니 그렇게 말한 이유를 풀어냈다.
내가 누군가에게 운이 되어주었다는 말은 조금 민망했다. 그럼에도 전직 후원자라 그런가, 은근 듣기 좋은 말이기도 했고.
······어느새 늦은 밤이다.
연주자들도 내일 파리를 떠나는 건 매한가지라 슬슬 뒤풀이도 끝내야 하는 시간.
나는 이쯤이면 적당하겠다 싶어 운을 띄웠다.
“혹시, 투어 끝나고 어디 소속이 되는 게 가능하시다면.”
모두가 프리랜서라는 애긴 에밀리를 통해 이미 들었다. 하지만 이후의 계획은 그녀도 모르는 거니까.
“조금··· 아니 아주 먼 타국에서 생활하는 게 가능하시다면.”
나른해져 있던 연주자들의 얼굴이 점차 다채롭게 변해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오늘 제가 말한 부분들을 모두 고쳐 오실 수 있다면······.”
말끝을 흐리며 명함을 꺼내 들었다. 내껀 아니고, 유정욱 팀장의 명함.
“여기로 프로필 보내주세요.”
내 말이 끝날 때쯤엔 연주자들의 얼굴이 방금 술집에 들어온 사람들처럼 새하얘져 있었다.
명함 여러 장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돌아가면 명함 하나 만들어야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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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유정욱 팀장에게 전화를 받았다.
9명의 프로필이 전부 메일에 들어와 있다는 것.
“벌써요?”
기분 좋게 웃으며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비엔나로 돌아왔다.
“간 거 아니었나?”
발터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안도감을 불러일으킨다. 내 주변엔 왜 이렇게 걱정해야 하는 어르신들이 많은 건지······.
“회항했어요.”
“전용기라고 멋대로구만.”
“제 전용기 아녜요. 그리고 농담이었어요. 파리에서 오는 길이에요.”
“거긴 왜?”
“콘서트도 보고, 사람들도 만나고······.”
가방에서 두툼한 종이뭉치를 꺼내서 건넸다.
“곡도 완성하고.”
발터의 표정이 확 변했다. 울대가 출렁거리고 얼른 손을 뻗어 악보를 받아든다.
“총보군. 스케치도 아니고 이걸 며칠 만에 완성했다고?”
“제가 마에스트로께 할 얘기가 은근 많더라고요.”
빙긋이 웃자, 발터가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기대 어린 눈으로 첫 장을 펼친다.
음악이기 이전에, 총보이기 이전에.
내가 그에게 보내는 편지.
눈앞에서 내 편지를 읽는 건 꽤 쑥쓰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유리창도 깨끗하다.
그렇기에 저 위에 있는 이들에겐 우리가 훤히 들여다보일 것 같았다.
“······.”
나는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친우들에게 내 마음을 전했다.
이 헌정곡이 연주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나는 슬퍼하지 않을테니.
침대에 반쯤 누워 악보를 바라보는, 저 까마득한 후배를 미워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