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64
264. 우리가 꿈꾸었던 피아노 (2)
“시험이란 걸 치른 것도 오랜만이지만, 수십 년 만에 본 시험이 그렇게나 어려울 줄 누가 알았겠나.”
치열했던(?) 시험의 여운은 다음 날 공항에 도착해서까지 이어졌다.
세 명의 거장들은 시험을 마친 후 일찌감치 교문 앞을 나서는 학생들처럼 문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길 나눴다.
“그러게나 말이야. 특히 하이든에 대한 파트는 무슨 논술 시험을 보는 것 같더군.”
“나도 그게 가장 어려웠네. 편지 속 그의 생각과 당시 음악을 연관 짓는 것도 쉽지 않은데, 더 나아가 당시 그의 상황이 되어서 도입부 선율을 만들어보라니.”
“보통 대학 교수들도 이런 식의 문제는 꺼려하는 편이지. 시험을 보는 학생들도 골머리가 아프겠지만, 사실 채점하는 교수는 미칠 노릇일 거거든.”
“어쨌든 점수는 나눠야 하니 기준이 골치 아프겠군.”
동조하며 주억거린 세 사람이 힐끔 내 쪽을 보았다.
나는 그들 건너편 의자에 마주 보고 앉아 채점이 한창이었다. 그들의 답안지를 읽고 얼마나 출제 의도에 근접하게 답을 적었는지 보는 것이다. 누구 말마따나 어쨌든 점수는 나눠야 하니까.
‘확실히 이 양반들의 대답은 골치 아프긴 하네.’
······내가 이번에 만든 시험 문제는 일종의 질문이었다.
200년 전 브리너 백작이, 현대의 음악가들에게 던지는 물음.
그렇기에 그저 몇 번의 몇 번. 빨간색으로 동그라미, 엑스. 이렇게 나눌 수 없는 문제였다.
질문을 던진 나 또한 많은 고민을 해야 했고, 특히나 방대한 지식을 갖춘 저 거장들의 대답이기에 더욱 고민이 깊어졌다.
내가, 브리너가 원하던 대답인지.
그리고 내가 저들에게 납득할 수 있는 해설을 들려줄 수 있는지.
쉽사리 결정되지 않는 문제다.
누군가는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저조차도 답을 고민해야 하는 물음을 어떻게 시험으로 낼 수 있냐고.
하지만 그래서였다.
나조차 그렇기에, 많은 이들의 이야길 듣고 싶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부응하듯 거장들은 특별한 대답들을 내놓았다.
수많은 활자와 음표로.
아무래도 독일로 가는 내내 채점을 해야 할 것 같지.
그런 생각을 하며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다 어쩐지 시선이 느껴져 고갤 들었다.
세 명의 노인이 쪼르르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내 채점하는 모습을 감상(?) 중이다.
그 중 데이빗이 씩 웃으며 물어왔다.
“돌아가면 시험 문제 몇 개만 단원들에게 내봐도 될까?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궁금해서 말이지.”
조심스러운 물음에 내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건 저도 궁금한데요? 어떤 대답을 했는지 알려주셔야 해요?”
기분 좋게 승낙하고서 다시 답안지를 훑어나간다.
이따금 들려오는 비행기 이륙 소리를 배경음 삼아 답안지에 몰두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백한길 회장이 준비해준 전용기가 이륙 준비를 마쳤다는 소식에 우리는 활주로로 향했다.
안락한 비행기 좌석에 앉아 전원을 끄기 위해 핸드폰을 드는데, 로빈 브로드우드의 연락이 온다.
정확히는 연락이 아닌, 고용량 음원 파일.
얼른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거장들의 이런저런 이야기 소리가 사라지고, 먹먹함이 찾아온다.
그리고.
—— —— ——.
음계가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한다.
로빈과 제작자들이 힘을 합쳐 만들고 있는 피아노 소리.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독일 함부르크에 위치한 스타인웨이 본사.
적색 건물 사이에서 나타난 마크가 빙그레 우리를 반겼다.
그의 위로 새하얀 간판이 우릴 굽어보고 있었다.
[STEINWAY & SONS]내 뒤로 클래식계의 기둥과도 같은 세 명의 거장이 있어서일까.
살짝 긴장한 듯한 마크가 우릴 본사 안쪽으로 안내해주었다.
간단한 소개와 함께 로빈과 제작자들이 땀을 흘려가며 피아노를 만들고 있는 공방으로 향하는 복도.
수많은 스타인웨이 아티스트들의 사진이 걸려있고, 그곳엔 나와 알렉스 또한 걸려있었다.
그걸 본 데이빗이 사진을 찍어 알렉스에게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제작 공방은 꽤나 분주했다.
제작자들은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이거나 무언가에 몰두해 있었고.
일정 간격으로 띄워놓은 책상들 위엔 마치 피아노를 해부해놓은 듯한 부속들이 가득했다.
거장들조차도 이런 광경은 익숙하지 않았는지 흥미로운 눈빛들이 되어 주변을 훑는다.
“이렇게 작업 중인 공방을 보는 건 처음인 것 같군.”
“그래? 난 예전에 뵈센도르퍼 제작 과정을 직접 본 적이 있긴 한데.”
“나도 몇 번 본적은 있지만, 이 정도 규모는 처음이야. 이 해머 모양들 좀 보게. 미묘하게 다 다른 것 같은데?”
그런 그들에게 내가 다가가 슬쩍 말했다.
“목표로 한 소리에 다가가기 위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있어요.”
“목표라면 토마스 브로드우드가 완성시키고 싶어 했던 소리를 말하는 거지?”
“그렇죠. 그가 바랐던 피아노 소리죠.”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끄덕거리는데, 저 멀리서 우릴 발견한 로빈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왔어요?”
반갑게 인사한 그가 시선을 내 뒤로 넘겨 거장들에게도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거장들에게 이 공간이 신기한 것처럼, 그에게도 이들이 이곳에 온 게 처음인 일일 터.
긴장했는지 삐걱거리는 모습에 내가 얼른 물었다.
“녹음 보내준 거 들었어요. 그 피아노 어디에 있어요?”
“아, 저쪽에 있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로빈이 우릴 바로 옆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 나란히 위치한 십수 대의 피아노.
각각의 피아노가 같은 결을 따르면서도 미묘한 차이가 나게 설계되었다며 로빈이 그중 하나의 피아노 앞에 멈춰 섰다.
“음원으로 보낸 건 이겁니다.”
그가 가리키는 피아노를 보며 내가 결론부터 말했다.
“이게 지금까지 보내주신 것 중에 가장 유사하던데요. 박물관에서 본 그 토마스의 피아노하고요.”
“저희가 듣기에도 그렇더라고요.”
주억이는 로빈을 보며 피아노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손을 건반에 올려 가볍게 눌러보았다.
———.
묵직하면서도 뭉개지지 않고, 크면서도 선명한 소리.
그리고 손끝에 전해지는 은은한 진동.
뒤편에서 거장들이 ‘오—.’하고 감탄한다.
기분 좋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비행기에서 음원을 들었을 때처럼 심장도 빠르게 뛴다.
녹음 샘플이라 실제로 듣는 것과 차이가 날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더 좋게 느껴진다.
“이젠 정말 유사하네요. 그리고 피아노의 크기는······.”
“훨씬 더 작아졌죠.”
물론 이것도 결코 작다 할 수 없는 크기였다.
콘서트용 피아노와 큰 차이 없는 육중한 그랜드 피아노.
그럼에도 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토마스의 피아노에 비하면 크기가 확 줄었다.
동시에 소리의 음색과 명료함 그리고 크기까지 거의 비슷하니 토마스의 기술이 현대의 기술과 완벽히 합쳐졌다고 볼 수 있으리라.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더 발전시켜야겠지.
우리의 목표는 재현이 아니니까.
토마스가 바랐던, 아니······ 나와 그가 함께 바랐던 피아노 소리를 완성시키는 것이니까.
어느새 피아노 소리를 듣고 공방 곳곳에 흩어져 제 할 일을 하던 제작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를 지켜보던 로빈이 내게 조심스레 묻는다.
“그때의 연주, 다시 한번 부탁해도 될까요?”
단순히 연주를 듣기 위해 부탁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의도.
그것을 알기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안 그래도 그러려던 참이었어요.”
#
······피아노 앞에 앉는 한서호를 보며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세 명의 거장은 이어지는 그의 연주에 빠져들어 가기 시작했다.
마치 봄을 그리듯, 잔잔하게 시작된 연주는 피어나는 꽃처럼 생동감 있었고 아름다웠다.
그러면서도 독특한 면이 있었는데, 바로 주법이었다.
곡 전반을 아우르는 스타카토(Staccato).
분명 짧게 끊어치는 주법이었지만 마치 건반을 누르는 게 아닌, 현 자체를 잡아 뜯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꼭 기타나 하프를 연주하는 것 같군.”
“저 피아노의 독특한 음색도 곡의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려. 그나저나, 처음 듣는 곡인데······서호의 곡인가?”
“이번에 만든 피아노로 앨범에 들어갈 연주곡을 녹음하겠다고 했으니, 어쩌면······.”
————!
연주가 도입부를 지나 만개하며, 세 거장의 미소 또한 그렇게 진해졌다.
서호의 성격상 저 피아노 앞에서 다른 곡을 연주할 리 없기에.
한 곡이라도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한국으로 향했던 그들이었는데, 어느새 두 곡이나 듣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감격할 새가 없었다. 왈츠처럼 하늘거리던 곡의 분위기가 어느새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건반 하나, 음표 하나라도 놓쳤다간 후회할 것 같아서.
이곳에 있던 피아노 제작자들도 마찬가지인 듯 숨을 죽이고 연주를 감상한다.
————!
······한서호의 연주가 모두에게 영감이 되어 번지고 있었다.
절대 짧지 않았던 연주.
하지만 영감의 순간이었기 때문일까.
스치듯 끝나버린 연주에 거장들은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이내 서로를 보며 연주에 대해 이야길 피우기 시작한다. 그러지 않고선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었다.
“한껏 밝았던 곡이 한없이 어두워졌다가 마침내 다시 밝아지며 끝난다라.”
“어찌 보면 뻔한 해결 구조인데,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군. 오히려 그런 구조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슬픈 느낌이었어.”
“다행이란 생각을 한 게 나만이 아니었구만? 마치 슬픈 이야기의 끝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것처럼 안도하게 되더군.”
그들이 수다를 떠는 사이, 피아노에서 일어난 한서호는 제작자들과 즉석에서 회의를 시작했다.
앞으로 어떻게 방향을 잡고 제작을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서로 나눈다.
그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 보며, 거장들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정말 신기한 아이란 말이지. 분명 저렇게나 아직 어린데, 곡은 대가에 이른 것처럼 이토록 깊이가 있으니 말이야.”
“그래, 늘 신기한 아이지. 엊그제까지만 해도 교수였는데, 지금은 또 피아노 제작자 같기도 하잖나.”
혀를 내두른 프랑코가 낮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나저나, 이 곡을 들은 대중들의 반응도 기대가 되는군.”
“보나 마나 뜨겁겠지. 나이 성별 불문하고 이 곡을 듣고 감동하지 않는 이가 있을 수 있나 싶네.”
단언하는 데이빗을 보며 알버트가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말에 부정을 하는 것은 아니고, 단순히 새로운 궁금증이 떠올라서였다.
“그래서. 대체 이 곡은 누구에 대한 이야기일까?.”
이번 앨범에 들어갈 모든 곡이 각기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 않았나.
그리고 자신들의 짐작이 맞다면 이 곡의 가제는 ‘하프’였다.
새로 붙여진 진짜 곡명은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하지만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지만큼은 한서호가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궁금했다.
“누구의 이야기이길래······서호가 이토록 애달프게 그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