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72
272. 음악의 경계 (2)
김세진의 연주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마 발터 슈몰저의 연락을 받고 병문안을 갔을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지.
대략 4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음반이나 영상으로만 듣고 감탄했던 그의 연주를 눈앞에서 보게 되니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클래식 애호가들에게서 무결점이라 불리는 그의 연주는 고작 4마디짜리 자작 동기에도 충분히 그 대단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연주에 대한 평가일 뿐.
작곡에는 연주만큼 좋은 평가를 줄 수 없었다.
“동기를 발전시키는 방향이 너무 소극적인 것 같아. 네 연주와 느낌이 너무 달라. 좀 더 과감하게 발전시키면 좋을 것 같은데.”
“음······예를 들면?”
말꼬릴 올리며 슬쩍 옆으로 자릴 만드는 김세진.
그 자리를 비집고 앉아 방금 전 들은 김세진의 동기를 다른 방향으로 연주해보았다.
독특한 화성 진행으로 긴장감을 준 후, 해소하며 다음 파트에 대한 기대감을 불어넣는다.
“라인이 이런 식으로도 갈 수 있고.”
혹은 16분음표로 쪼개어 전혀 다른 느낌의 도입부를 만들어내 본다.
“이렇게도 될 수 있잖아. 동기가 같더라도, 어떤 음을 사이에 두냐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니까. 어때?”
옆에서 멍하니 지켜보던 김세진이 내게 물었다.
“이걸 방금 떠올린 거야?”
“그렇지. 네가 방금 들려줬잖아.”
그러자 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갤 흔들어댔다.
“무슨 즉흥 연주 같다. 방금 뭐랄까······재즈 피아니스트 같았어.”
“화성이 고전적인 클래식 화성에서 조금 벗어나서 더 그랬나 봐.”
“그러니까. 너, 다른 장르의 음악은 관심 없어?”
“다른 장르?”
“응. 누가 그러던데, 넌 클래식으로 이룰 수 있는 건 거의 다 이뤘다고. 그 말에 동의하는 사람으로서, 너는 다른 장르도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에이, 내가 무슨.”
손을 휘적이며 자리를 다시 비켜주었다.
피아노 중앙에 제대로 앉는 김세진을 보며 내가 말을 이었다.
“우선 전제부터가 잘못됐어. 다 이루긴커녕 절대 못 쓸 것 같은 곡도 있는걸. 애초에 음악에 다 이룬 게 어딨겠냐만. 근데······.”
잠시 고민하다가 여지를 남겼다.
“없진 않아. 다른 장르에 관심.”
“오, 기대되네. 근데 네가 절대 못 쓸 것 같은 곡이 있어?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그 자체를 곡으로 승화시킨 네가? 대체 어떤 곡인데?”
김세진의 궁금해 죽겠다는 눈빛을 받아내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반들반들하게 닦여진 검은 그랜드 피아노에 내 모습이 비춰졌다.
#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노트북 화면을 양분하고 있는 화면 중 하나가 난리다.
뒤이어 다른 하나에서도 차분하지만 미세하게 격양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도 레오님 말에 동의해요.
레오 뒤보셸과 벨라 타멜리아.
각각 파리와 런던에서 휴식을 취하던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나와 김세진이 한 프레임 안에 담겨있는 걸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우리가 작곡한다고 할 땐 아무 소리도 안 하더니. 세진이 너도 관심 없는 척하더니. 아주 음흉해!?
-저 말에도 동의해요. 아주 많이. 특히, 음흉하단 부분.
양쪽 화면이 점멸하며 들려오는 공격에 김세진이 끙하고 머릴 짚는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꼭 쓰고 싶은 곡이 있다고 해서요.”
-나도 있어. 쓰고 싶은 곡 많아. 완성 못 한 습작도 많고. 지금 갈까?
-베스, 한국행 비행기 표 좀 예매해줘요!
당장이라도 올 기세라 내가 얼른 덧붙였다.
“지금은 안 돼요.”
-왜!
“저 곧 여기에 없을 거라서요.
-왜 없어. 어디 가?
어느새 화면을 뚫고 나올 것처럼 가까워진 레오의 얼굴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곧 기사가 나갈 거라 했으니 말해도 상관없겠지.
“호프만 쇼에 출연하게 됐거든요.”
잠시 정적이 찾아오고.
‘거길 네가 왜?’ 라는 표정들이 화면을 통해 넘어왔다.
#
······예상보다 더 격렬한 반응들이 뒤를 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외국인들에겐 호프만 쇼가 훨씬 대단한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프로그램이 가진 성격. 그러니까 결도 클래식 음악가와는 매칭이 잘 안 돼서 더욱 놀랐다고.
아무리 클래식이 대중화의 포문을 열었고, 나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김세진이나 화면 속 두 사람처럼 스타 연주자들이 탄생하고 있다곤 해도.
클래식은 어렵다는 인식과 귀족 음악이란 시선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
“그래서 더 의미 있겠네.”
조수석에 탄 김세진이 말했다.
내 생각도 비슷했다. 그동안 클래식이 울려 퍼지지 않았던 곳에 클래식을 연주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분명 클래식의 대중화에 도움이 되겠지.
“나 저기서 내려주면 돼.”
더 클래식 사무실 근처에 위치한 카페를 가리키는 김세진.
차 속도를 천천히 줄이며 내가 말했다.
“다음엔 아버지랑 같이 사무실로 와. 카페에서 기다리시게 하지 말고.”
“괜찮아. 커피 마시는 거 좋아해서.”
“커피는 우리 회사가 더 맛있을걸? 게다가 피아노 연습실도 많아서 심심하면 연주도 하실 수 있고.”
“흐음, 한번 여쭤는 볼게. 촬영 잘하고 와.”
차에서 내리는 김세진에게 손을 흔들고 녀석이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괜스레 픽 하고 웃으며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그리고 그 길로 곧장 학교로 향한다.
가방에 편지지를 챙겼는지 되새겨보았다. 아직 써야 하는 편지들이 꽤 남았기에.
물론 그것 때문에 구태여 교수실로 출근하는 건 아니었다.
마지막 과제를 학생들이 모두 제출했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
“어, 교수님 오셨어요? 잠시만요.”
학과사무실에 도착하자 조교가 날 보곤 인사했다. 그리고는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A4용지 박스를 들고 나왔다.
“오늘 학생들이 우르르 내서······흣짜!”
“저 주세요. 얼른.”
묵직한 박스를 받아들자 조교가 허리를 퉁퉁 두드리며 혀를 내둘렀다.
“제출 기간이 다 되도록 절반도 안 내서 왜들 이렇게 늦게 내나, 공지가 제대로 안 됐나 했는데······.”
그녀의 시선이 박스로 향했다. 정확히는 안에 가득한 과제들로.
“분량 보니 이해가 가더라고요. 하하하···.”
“확실히 무겁네요.”
“그쵸? 근데 왜 즐거워 보이시지? 읽으실 게 많아졌는데.”
“그래서 좋은데요?”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조교가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눈을 깜빡였다.
“왜요?”
“······교수님이 저희 때 없으셔서 다행스럽달까요.”
픽하고 웃으며 입꼬릴 씩 올렸다. 그런 날 빤히 바라보는 조교.
“아닌가. 할 만했을지도.”
“네?”
“아, 아녜요. 눈 호강이냐 과제 폭탄이냐 그것이 문제로······.”
들릴 듯 말듯 중얼거리는 조교를 보다가 문득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때 나······.
‘고등학생이었네.’
물론 이 말을 필터에 거치지 않고 그대로 했다간 지난번처럼 ‘전 그때 뭘 했죠? 맨날 술 퍼마시고······’라면서 또 우울해할 것 같아 그냥 빙긋이 웃었다.
“프린터기 옆에 커피랑 쿠키 좀 사 왔어요.”
“역시 교수님! 마침 단 거 땡겼거든요! 감사합니당.”
프린터기를 잡아먹을 기세로 움직이는 조교에게 인사하고서 교수실로 걸음을 옮겼다.
도착하자마자 습관처럼 커피 포트를 켜고서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A4용지 박스를 열어 파일들을 꺼냈다.
다른 교수들처럼 이메일로 받거나, 웹하드를 이용하지 않고 이렇게 직접 받은 것엔 이유가 있었다.
중간중간 오선지에 악보를 그려 스크랩을 해야 하기 때문.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이렇게 종이로 보는 것이 취향에도 맞다. 마우스 휠을 긁어내리는 것보단 손으로 직접 넘겨가며 읽는 게 집중도 더 잘 되고.
······이윽고, 충분히 끓은 물로 백한길 회장이 선물한 차를 내린 후.
본격적으로 마지막 과제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두툼한 분량의 결과물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사실 내가 내준 과제는 간단했다.
‘내 이번 음반을 듣고 곡 하나를 골라 분석해라.’
방식은 자문자답.
그러니까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답변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채택한 것엔 분명히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학생들은 완벽히 충족시켜주었다.
같은 수업을 들었고, 같은 쇼케이스를 보고 동일한 음반을 들었음에도 극명히 갈리는 여러 시각들이 보인다.
그 갈래가 어떤 것은 터무니없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것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러니 이 과제들은 단순히 내가 학생들에게 내주는 시험이 아니다.
그들이 자신들만의 질문과 답을 정리해 제출한 그 시점부터, 이건 나의 공부가 되었다.
내 음반이지만, 내 곡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정답은 아니니까.
이 곡들은 내가 대중에게 전하는, 옛 음악가들의 이야기였고.
이야기란 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연주를 하다가 이러쿵저러쿵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
오로지 음악으로 말해야 한다.
도취된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닌 망상과 다름없기에.
그렇기에 이런 시각들이 내겐 끊임없이 필요하다.
내 관념에 내가 잡아먹히지 않도록.
그리고 어쩌면 이런 노력들이 과거 백한길 회장에게 말했고, 오늘 김세진에게 말했던.
내가 완성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음악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을까.
학생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며 수많은 생각을 내 안에서 파생시켰다.
이 모든 것들이 영감으로 머릿속 어딘가에 자리 잡는다.
언젠가, 필요한 순간이 되면 나타나겠지.
금방이라도 음악이 될 준비를 마치고.
턱——.
어느새 두껍게 쌓인 파일들. 이대로 평가가 끝난 건 아니다. 다시 한번 읽으면서 제대로 점수를 매길 계획이었다.
이들 덕분에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성적표를 만들어야 하는 입장이니까.
다음 파일을 집어 들어 이름부터 확인했다.
[유채봄]그녀는 내가 이번 음반에서 가장 처음으로 작곡한 하이든을 주제로한 곡을 선택했다.
내용을 확인함과 동시에 나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흥미로웠다. 그녀의 과제는 수업에만 얽매여있지 않았고, 무수히 고민한 흔적이 보였으며, 그 고민들을 모두 여기에 담으려고 한 노력도 보였다.
이 정도의 노력이면 다른 과목 성적이 걱정될 정도였다.
맨 앞자리에 앉아 반짝거리는 눈빛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계속 파일을 넘겨가는데, 시선을 잡아끄는 문항이 있었다.
Q.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곡.
스스로 만든 질문. 지금까지 본 과제들 중에서 이런 질문은 처음이었다.
자연스레 흥미가 동했고.
A.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클래식의 대중화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다.
답을 보곤 더욱 궁금해졌다.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시작된 음악이 폭풍우를 맞이하고, 결국엔 밝게 마무리되는.
이미 소설이나 영화, 음악 등에서 숱하게 쓰여온 왕도(王道)와도 같은 단순한 구성의 곡이었는데.
왜일까? 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답한 걸까?
내 궁금증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그녀는 스스로에게 또다시 질문한다.
Q. 그 이유는?
나는 시선을 내렸고, 천천히 고갤 기울였다.
도리어 더 궁금해져 버렸다.
[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공란을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