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30
030. 각자의 (2)
“오케이, 컷!”
박동진 감독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이민재 배우가 피아노 앞에서 일어났다.
격렬한 연기는 끝났고, 얼굴엔 후련함이 떠올라 있다.
이어지는 박동진 감독의 목소리.
-이제 실제 연주 준비할게요.
드디어 내 차례였다.
나는 구석진 객석에서 일어나 무대로 다가갔다.
무대 위에 올라 연주자들과 눈인사를 하며 피아노 앞에 앉는다.
이제 진짜라는 듯, 손을 풀거나 세세한 조율을 시작하는 연주자들.
나도 슬며시 건반을 눌러본다.
아깐 이곳저곳에서 이어지는 촬영 때문에 듣지 못했던 소리가 들려왔고.
─.
동시에 깨닫는다.
같은 스타인웨이 318이지만, 내 것과 미세하게 다르다는 걸.
‘···넌 이런 소리구나.’
예상했던 바라 오히려 담담히 소리를 분석했다.
피아노는 나무로 만드는 악기지만, 나무는 사람이 만들어낸 게 아니니까.
제아무리 대단한 장인이 완벽히 똑같은 방법으로 만들었다 해도 같은 소리가 나올 수 없는 법이다.
그리고 나는 그 미묘한 다름이 싫지 않았다.
어긋난 게 아닌, 개성이라서.
그 사이, 하나둘 준비를 마친 연주자들이 내 쪽을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부분의 연주자들 시선이 내 쪽을 향할 때쯤, 나도 고갤 돌려 박동진 감독을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박동진 감독은 메가폰을 들어 촬영 시작을 알렸다.
-레디··· 액션!
카메라가 돌아간다.
촬영은 이미 시작되었고, 이제 내가 신호만 주면 연주 또한 시작된다.
나는 다시 한번 고갤 돌려 객석을 훑었다.
예정된 신호 같은 게 아니었다.
단지, 윤짜르트의 주인공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 같아서.
걘 지금 촬영을 시작하는 게 아닌, 공연을 시작하려는 거니까.
분명 이렇게 청중을 보며······.
객석으로 시선을 던진 나는 꼬릴 물던 생각을 그만뒀다.
배우들 모두가 날 보고 있었다.
당연했다. 리액션을 찍으러 카메라들이 돌아가고 있으니.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들 면면에 걸린 기대감은 분명 공연을 기다리던 이들과 같았다.
연기가 아닌 진짜 기대하는 눈빛.
그제야 깨달았다.
나한테만이 아닌, 저 사람들에게도 여긴 이미 공연장이란 걸.
나는 입꼬릴 말아 올리며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 순간.
─!
호른이 단계적으로 내려오는 웅장한 선율을 연주했고.
나는 수 없이 쪼개지는 시간 속에서 준비했다.
그 뒤를 이을 피아노의 힘찬 도약을.
───!
#
······임진규는 이 곡을 너무나 잘 안다.
피아니스트 인생을 통틀어 이토록 파고들었던 곡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도 그럴 게, 이건 그가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결승전에 들고 나갔던 곡이었다.
악보도, 셈여림표도, 어떤 프레이즈가 중요한지, 어디서 감정을 누르고, 어디쯤 터트려야 하는지.
당연히 줄줄 꿰고 있을 수밖에.
그리고 그걸 모두 아우르는, 가장 중요한 ‘주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주제는 ‘향수’였다.
그게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코끝에 아른거려 언젠가 팍 하고 떠올라버리는.
그래서 기분 좋은 울렁임을 만드는 향수.
곡에 대한 내용을 떠올리던 임진규가 작게 감탄했다.
‘완벽하네.’
모든 것을 지키고 있다.
더 극적이게 보이려고 과장하지도 않고, 악보 안에서 충실히 연주한다.
거기에 러시아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서늘한 바람과 슬라브적 정취, 쓸쓸함과 좌절까지 모두 담겨있는 연주였다.
임진규는 이제야 왜 박동진이 저 아일 그토록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17살이라고 했지.
대단한 재능이 맞았다. 그 나이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건.
“······.”
다시 연주를 감상한다.
감탄이 점점 잦아진다.
어려운 마디조차 깔끔하게 넘기고, 표현하기 난해한 프레이즈도 우습게 지나간다.
저기서 어렵다고 쪼는 순간 곡은 망가지는 건데. 프로들조차도 종종 하는 실수가 전혀 없다.
즉,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
‘이건, 진짜 대단한데······?’
그래서 인정하려 했다.
천재라 불릴 만하다는 걸.
이 나이에 이 정도 실력이면, 자신이 몸담은 악단에서도 손에 꼽힐 것 같으니.
그런데 그 순간, 곡이 절정으로 접어든다.
일명, 카덴차(Cadenza, – 독주).
독주자가 악곡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 수 있는 구간.
그 구간에 접어들자, 겹겹이 쌓인 현악기의 선율을 딛고 피아노 화음이 쏟아져 내린다.
여전히 저 아인 악보대로 연주하고 있지만, 장대한 협주를 이끌던 피아노의 색은 달라졌다.
그 미묘한 변화가 임진규에겐 충격이었다.
‘···기풍이 달라졌어.’
어느새 러시아의 슬라브적인 체취는 사라졌다. 연주자는 전혀 다른 장소를 제시하고 있다.
30년을 넘게 피아노와 씨름해온 그는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유럽?
그때부터였다.
곡이 파도처럼 울렁이기 시작한다.
더이상 차이코프스키의 ‘향수’가 아니었다.
아마도 이건···.
연주자의 ‘향수’.
‘근데, 저런 게 ‘향수’라 불릴 수 있는 건가?‘
임진규는 의아해했다.
마치 집채만 한 파도를 맞닥뜨린 기분이었으니까.
대체 기억의 풍파가 얼마나 거대해야,
그 절대적인 양은 또 얼마나 많아야,
저런 크기의 향수가 다가올 수 있는 걸까?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생각했던 곡이, 처음 만난 것처럼 낯설다.
하지만 결코 틀렸다고 말할 수 없었다.
완벽한 기교 위에 얹어진 끝없는 표현력.
어느새 카메라가 있는 줄도 잊은 채, 완전히 빠져들어 있었다. 표정 따위 어떻게 찍히든 중요하지 않았다.
곡이 끝났으니, 어서 친구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오길 바랄 뿐이었다.
“컷!”
···임진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한서호에게로 다가간다.
할 얘기가 아주 많았다.
#
······며칠 후.
러시아 모스크바, 베이노프 심포니.
임진규가 연습실로 들어서자 악기를 주섬주섬 싸고 있던 몇몇 단원들이 반색했다.
“쥔규 잘 다녀왔어?”
“표정을 보니 잘 다녀온 것 같은데?”
그들에게 임진규가 씩 웃어 보였다.
“그래 보여?”
“응, 살도 좀 찐 것 같고.”
확실히 많이 먹긴 했지···.
피식 웃으며 단원들에게 다가간 임진규가 연습실 안쪽에 딸린 방을 슬쩍 보았다. 도착했다고 보고하러 왔는데, 안쪽이 시끌시끌하다.
“지휘자님 지금 뭐하셔?”
“이사장님하고 싸우시는 중.”
“또? 왜?”
“이번에 이사장님이 협력 재단을 늘릴 계획이신가 봐.”
“근데?”
“그래서 이사장님은 우리 악단의 간판인 지휘자님더러 공개적인 자리에 참석하란 거고. 근데, 지휘자님은 또 그런 거 엄청 귀찮아하시잖아. 그러다 저렇게······ 암튼, 참 우애 좋은 형제야.”
다다다 내뱉는 설명에 집중하고 있는데, 문 쪽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레토.”
“하하···이사장님.”
신이나 말하다가 조용히 찌그러지는 단원, 레토.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던 그레고리 이사장이 고갤 돌려 임진규를 보았다. 푸른 눈을 보니 절로 움찔하게 된다.
“진규 왔나?”
“아, 넵.”
짧게 끄덕인 그가 옆을 지나쳐 연습실을 나선다.
그제야 쭈글거리던 레토가 고갤 들었다.
“암만 봐도 이사장이 아니라 군인을 했어야 하는 거 같은데. KGB 같은 거.”
“어, 이사장님 왜 다시 오셨어요?”
“흐업! 야 깜짝 놀랐잖냐!”
발작하는 레토를 보며 낄낄거린 임진규가 도망치듯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베이노프 심포니의 지휘자, 파벨의 집무실.
파벨이 그를 보곤 손을 휘적거린다.
“어, 왔어?”
“네.”
“근데 좀 일찍 오지 그랬나. 한 30분 정도. 그러면 형한테 너랑 다음 협주 때문에 할 얘기가 있으니 좀 꺼지라고······ 근데, 형 갔지?”
“아마도요.”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쉰 그가 빙그레 웃는다.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누가 이 사람을 아까 그레고리 이사장의 친동생이라 예상할 수 있겠나. 이렇게나 다른데.
그리고 또 누가 이 사람이 그토록 대단한 마에스트로 파벨이라 생각하겠나.
벌써 몇 년째인데도 적응 안 되는 사실에 임진규가 신기해하는 사이, 파벨이 물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잘 쉬고 있는 줄 알았는데, 대뜸 다음 공연엔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하고 싶다 전화한 이유를 들어보자고.”
그의 질문에 임진규가 잠시 할 얘길 정리하다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한국에서 그 곡을 들었거든요······대단한 연주였어요.”
살짝 흥미가 돌았는지 파벨이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피아니스트가 17살이었단 얘길 듣고는 더욱 눈을 빛냈다.
“혹시 뭐 영상 같은 거 있어?”
영상은 없다. 하지만 영화는 있지.
정식으로 볼 수 있을 때까진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러시아에서 볼 수 있으려면 꽤 걸릴 겁니다. 그때 보여드릴게요.”
“음, 그럼 어쩔 수 없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파벨이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묻는다.
“아무튼. 그 학생의 연주를 보고 나니 깨달은 바가 있고, 그래서 다음 협연 때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꼭 하고 싶다··· 맞아?”
“네.”
임진규가 힘있게 끄덕였다.
툭-.
집으로 돌아온 임진규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병맥주를 하나 꺼내어 소파에 늘어지듯 앉아 여독을 풀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실 한쪽에 놓인 트로피를 한참 동안 보다가 옛 생각에 젖어 들었다.
······사실, 입상이 목표였던 적 없다.
우승이 목표였고, 오랜 꿈이었지.
그러나 최선을 다한 공연의 결과는 3위 입상.
좌절했다.
이것보다 더 잘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게 내 한계인데.
그러나 한국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입상 소식에 떠들썩한 매스컴, 여기저기서 추켜세워주는 기사들.
그러니 아쉬운 소릴 할 수조차 없었다.
한국을 빛낸 이라며 마이크를 들이대는데, 거기다 대고 벽이 높아 좌절했다 말할 순 없었으니까.
‘꿈을 이뤘어요.’
마음에도 없는 소릴 했다.
그리고 뒤에선 홀로 끝없이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우승할 수 있었을까.
대체 뭐가 부족했던 걸까.
그런데.
‘독주 때마저 차이코프스키일 필요는 없잖아요. 그땐 연주자 본인을 표현해야죠.’
“······.”
상념에서 빠져나온 임진규가 피식 웃었다.
허탈함과 희열이 공존하는 짤막한 웃음.
이제야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그것도, 17살 학생에게.
#
마지막 촬영이 끝나고 나는 백수(?)가 되었다.
게다가 학교까지 방학을 하니 갑자기 시간이 넘쳐났다. 덕분에 영감이 떠올라 악보에 옮기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온전히 바이올린에 쏟아부을 수 있었지.
그럴수록 강준서는 더욱 비명을 질렀지만, 제자가 스승에 맞춰 진도를 나갈 순 없는 법이잖나.
물론 틈틈이 백한길 회장에게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다시 개학이었다.
날씨는 순식간에 쌀쌀해졌고, 가로수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추석이 다가왔다.
예정되었던 대로 윤짜르트가 전국 극장가에 개봉했고···
반응은 상상 이상으로 폭발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