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91
091. 어느 미술가의 영감 (5)
백한길 회장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휠체어 팔걸이에 올라간 그의 손가락이 여전히 움찔움찔 리듬을 타고 있다.
그가 낼 수 있는 가장 격정적인 춤사위였다.
그리고 마침내 만족스레 올라간 입꼬리가 달싹인다.
“바이올린 소나타. 바그너의 곡이구나.”
그 말에 나는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다가갔다. 건너편 소파에 앉으며 끄덕였다.
“맞아요. 요즘 같이 연습하는 연주자가 이 악보를 연습하고 있더라고요.”
“그 친구 덕분에 내가 이 곡을 들은 거구나? 고마운 일이군. 그 친구에게도 이걸 들려줬어?”
“아뇨. 그럴 기회는 없었네요.”
“그렇담 꼭 들려 줘봐. 청중에게 이 정도 영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으니, 연주자에겐 더 많은 것들을 전해주지 않겠냐.”
그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끄덕였다.
백한길 회장이 ‘영감’이란 단어를 썼다고 해서 그가 음악을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별 게 아니다. 거창하지도 않다. 인생에 대한 태도, 규칙, 하다못해 오늘 밤 밤에 들기 전에 따뜻한 물에 족욕을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영감이라 부를 수 있으니까.
어쨌든, 백한길 회장의 말도 내게 좋은 영감이 되었다. 실제로 신수아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니.
“기회가 되면, 그래 봐야겠네요.”
백한길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눈을 깜빡이며 낮게 웃었다.
“아무튼. 대단한 양반의 노랠 들었더니 기분이 좋구나.”
“바그너요?”
“그래. 대단한 양반이지. 모차르트나 베토벤과는 다른 의미로. 가정사부터, 성장기, 그리고 중년을 거쳐 노년기까지도. 어느 것 하나 평범했던 적이 없었던 참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이잖냐.”
그의 말에 나는 가만히 끄덕였다.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보다 더 알고 있는 내용은 없었다.
나조차도 그저 책으로 접한 바그너이기에.
직접 만나지 못한 것, 그 점이 안타까울 뿐이지.
“그는 음악가 이전에, 시인이 되고 싶었던 철학자에 가까웠지. 음악은 수단이었을 뿐. 그가 만약 붓을 잡았다고 해도 지금처럼 위대해졌을 거야. 실제로 그림에도 관심이 많아 화가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고 전해지고.”
그랬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가 연주 자체를 즐기거나, 잘했던 인물은 아니었다고 한다.
당대에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었던 프란츠 리스트와 비교하면 더욱 극명해지지.
그는 음악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음악계는 녹록지 않았다.
연이은 실패. 그리고 짓누르는 한계.
절망 속에서 그는 괴로워하다가 결국 빛을 만났다.
“그런 그에게 오페라는 표현의 돌파구였을 게다. 비로소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릴 도화지를 얻은 셈이지.”
“그랬겠네요.”
그렇기에 절망과 희망을 되새기며 곡을 만들었던 리하르트 바그너.
그의 음악이 닐 하우저의 그림과 내 곡, 양쪽 모두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렇게 백한길 회장과 음악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친분이 있는 음악가의 얘기는 브리너의 기억을 새록새록 더듬게 하고, 그렇지 않은 음악가는 새로운 영감을 돋아나게 한다.
······그러면서 나는,
음악적으로 계속해서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
“드디어, 완성했대.”
두 사람이 바그너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때쯤, 아버질 보러온 백선화 부사장이 소식을 전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한서호의 말에 백선화 부사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이에 잠자코 듣고 있던 백한길 회장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놈들, 음악이 무슨 뚝딱 하면 나오는 줄 아나.”
“그림도 마찬가지이니 어쩔 수 없었겠죠. 뚝딱 나오지 않으니까.”
한서호가 웃으며 달래자 백한길 회장도 이내 수긍하며 누그러진 표정을 보였다. 그 모습을 잠시 신기하게 바라보던 백선화 부사장이 본론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그림은 걸어야 한다.
그러니, 음악도 필요하다.
사실 주최 측인 자신들 입장에서야 음악이 없더라도 그럴듯한 말로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한서호는 결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돈의 문제도, 구색의 문제도 아니다. 그냥 작곡가, 한서호가 원하는 그림이 있는 것일 뿐.
“······그림은요?”
“여기.”
백선화 부사장이 패드를 내밀자 백한길 회장이 슬그머니 손가락을 움직여 휠체어를 돌렸다.
“···?”
“난 안 본다. 전시장에서 음악과 함께 처음으로 보고 싶으니.”
한서호가 피식 웃으며 패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도착하죠?”
“이번 주 목요일.”
“역시 직접 봐야 느낌이 오겠네요.”
“그럼 너무 늦지 않겠어?”
그다음 주 금요일이 전시 시작일이니, 정말 일주일 만에 곡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인 거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백선화 부사장의 표정과는 달리 한서호는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으쓱였다.
“안 되면 제가 가서 즉흥 연주라도 하죠, 뭐.”
이에 백한길 회장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백선화 부사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허무맹랑한 소리에도 걱정이 걷히는 건, 가벼운 농담이라서가 아니라.
그 농담을 던진 이가 한서호라서겠지.
#
며칠 후.
나는 어느 곳을 보아도 새하얀 공간에 들어섰다.
커다란 액자들이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보았던 닐 하우저의 그림을 품고 벽에 걸려 있었다.
아직 전시회 준비 중이라 사다리 같은 것들이 지저분하게 널려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작품을 다시 한번 감상했다.
“···여전히 강렬하네.”
빛과 어둠이 조우하는 찰나의 순간을 잡아낸 그림들은 긴 여운을 남긴다.
나는 내가 작곡한 곡들을 머릿속으로 연주하며 전시장을 찬찬히 훑었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음악이 사람들을 더욱 작품에 집중하게 만들 수 있을까?
닐 하우저의 의도가 더 진하게 와닿을 수 있도록 만들고 있는가?
그런 일종의 체크리스트를 자가점검하며 만족스러운 발길로 전시장을 누볐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섹션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가로로 긴 벽에, 기다란 액자가 창문처럼 나 있다.
그 너머에 닐 하우저의 세계가 가득했다.
해가 뜨는 순간도 아니었고, 번개가 치는 순간도 아니었다.
그저 검은색 위에 떨어트린 빛 하나.
완전한 어둠에 완연한 빛.
극명한 대비가 주는 느낌은 그 간극만큼이나 다양했다.
영감이 가득 찬다. 단순히 악상이라고 부를 수 없는. 정말 붓을 들면 뭐라도 그려버릴 듯한.
하지만, 역시나.
음악으로서 표현할 때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그래야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
“···즉흥 연주는 안 해도 되겠네.”
이미 오선지에 옮겨 적기도 전에.
내 머릿속엔 연주가 펼쳐지고 있었다.
#
······전시회 날 아침이 밝았다.
긴장감은 바이올린 현처럼 팽팽했고, 현장엔 건반 같은 달그락거림이 가득했다.
아직 전시 오프닝까진 시간이 남은 상황.
케이터링 등이 바쁘게 세팅되는 와중에 전시회에 첫발을 디딘 이가 있었다.
덥수룩해졌던 수염을 말끔히 깎아낸 닐 하우저였다.
그는 피곤함이 묻어나는 갈색 눈으로 내부를 훑었다. 이미 사진으로 숱하게 확인하며 액자의 미세한 위치까지 신경 썼지만, 막상 와서 보는 건 다를 수 있기에 예리한 눈으로 자신의 작품들을 살폈다.
때마침 다가오는 전시장 매니저. 닐은 그녀에게 음향 세팅도 확인하고 싶다는 말을 던지고, 곧바로 걸음을 재촉했다.
가장 끄트머리.
단 하나의 작품이 걸려 있을 뿐인 섹션으로.
“······.”
그림 위에, 음악이 끼얹어진다.
──!
물감으로 만들어진 검은 색은 더욱 짙어지고.
──!
형형색색으로 부서지며 퍼지는 빛은 더욱 강렬해진다.
‘···미쳤구나.’
거대한 그림이, 일개 인간을 집어삼킬 것처럼 뛰쳐나온다.
그 모습에 그림의 주인조차 입을 떡 벌리고 굳었다.
음악은 어느새 끝이 났다.
하지만 그 음악이 만들어 놓은 몰입은, 마침표 없이 계속 반복되었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오프닝 때까지 여기에 서 있었으리라.
“안녕하세요.”
간단한 영어 인사.
닐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놀란 마음에 숨을 들이켰다.
그곳에.
“한서호입니다.”
자신의 그림을 위대하게 만들어준 소년이 서 있었다.
#
“주인공이 이렇게 숨어 있어도 돼요?”
전시장 한쪽에 마련된 대기실.
오프닝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밖의 소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초대받은 손님들로 가득 채워지는 중인 거다.
“내가 벌써부터 있으면 준비에 방해가 될걸요?”
···그도 그렇겠네.
원래 사교모임에서도 주인공은 늦게 등장하는 법이잖나.
과거 다녔던 파티들을 떠올리는데, 닐이 덧붙였다.
“그건 작곡가님도 마찬가지고요. 엄청 유명하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이렇게 숨어 있나 봐요.”
키득거리자 닐도 마주 웃었다. 그리고 앞에 놓인 과자 하나를 까며 말했다.
“궁금한 것들이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당신에게 어둠은 대체 뭐였나요?”
“···?”
“대체 뭐길래 저렇게 처절한 어둠을 표현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요. 단언컨대, 제 팔레트엔 저런 색이 없거든요.”
자신의 팔레트엔 그런 색이 없다······.
재밌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내 팔레트를 돌아보았다.
나에게 가장 큰 어둠은 뭐였을까?
늘, 병마(病魔)라고 생각했다.
처음 닐의 그림을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닐의 마지막 그림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 커다란 그림 속에 찬란히 빛나는 빛.
그걸 보는데 가슴이 아려왔다. 왜일까?
돌이켜보면, 내가 죽음 직전까지 아쉬워했던 것은······.
“빛을 보는 것.”
“네?”
“빛을 보기만 하는 것이요. 다가갈 수 없이.”
좀 엉뚱한 얘기처럼 들렸을까?
고갤 들자 신중하게 곱씹는 닐이 보였다.
“보통 어둠은 빛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들 하는데요.”
“저한텐 빛이 보이기만 하는 게··· 손에 닿진 않는 게··· 그게 어둠이었어요.”
17세의 소년이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닐은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얘길 들어주었고, 한발 나아가 질문을 던져주었다.
“······그럼 빛이 대체 뭐였죠?”
“음악.”
“음악이라···멋지네요. 하지만.”
닐의 표정엔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이 이야기가 너무나 즐겁다는 듯이.
“변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요? 제 그림은 10년 뒤에도 같은 질문을 던지겠지만, 대답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의 가치란 건 계속 변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의 질문에서 난 줄곧 음악을 만들며 생각해왔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가치를 비추는 거울.”
“···!”
“인가요? 저 그림들이.”
내가 생각하는 닐의 그림이 가진 진짜 주제.
누군가에겐 돈일 수도.
누군가에겐 희망이고 싶은.
각자의 가치를 비추는 거울.
잠시 놀란 표정으로 날 보던 닐이 이내 활짝 웃었다.
“가치를 비추는 거울이라······제 주제를 알아챈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처음이네요. 정말 마음에 드는 이름이에요.”
그리고 다시 묻는다.
“그래서. 작곡가님의 대답은요?”
······나?
속으로 되물으며 실소를 머금었다.
“제 대답은 항상 변함없을 것 같네요.”
음악.
그럼에도 음악.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200년이 지나서도.
다시 음악.
······멍하니 날 바라보던 닐이 툭 말했다.
“내가 클래식(Classic)을 만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