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92
092. 어느 미술가의 영감 (6)
‘클래식.’
그 한 단어가 마치 훈장처럼 내 귀에 박혔다.
나란 사람의 시간을 알지 못하면서도 내 말을 존중해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원래 그런 성향의 사람인지, 아니면 내 음악이 그를 납득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적잖은 울림이 느껴진다.
“계속 응원하겠습니다.”
······마지막 말을 마친 닐이 서둘러 대기실을 떠났다. 슬슬 오프닝에서 가장 중요한, 전시의 주인공이 등장할 타이밍이기에.
그리고 대기실에 남겨진 나는, 잠시 홀로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 멜로디는 그저 즉흥적이었는데, 몇 번 도돌이표를 돌다 보니 살이 붙었으며 하나의 주제라 부를만한 선율이 만들어졌다.
‘곧 사운드 클라우디에 올라가게 될지도.’
그 사이, 닐의 인사에 관람객들의 박수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나는 자리를 털고 밖으로 나섰다.
전시장 중앙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첫 섹션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본격적인 관람이 시작되는 거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도 나를 찾았는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기다린다.
강준서와 신수아, 그리고 이소현과 김영태 4인방. 마주 보고 웃으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왔어요?”
“오랜만—!”
강준서가 내 옆으로 붙더니 어깨에 팔을 올렸다. 물론 나보다 키가 작아 어정쩡한 자세가 되어버렸지만 그런 것쯤이야 전혀 개의치 않는 강준서였다.
“서호야. 제자의 제자를 뭐라고 하지?”
“글쎄요? 왜요?”
“흐흐, 수아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싶어서.”
“디진다.”
신수아가 눈을 좁히며 나직하게 협박한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말꼬릴 올렸다.
“전 가르쳐드린 게 없는데요?”
“얜 배웠다던데?”
강준서가 으쓱거리길래 신수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신수아가 작게 말한다.
“아니, 뭐. 배운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는 앞쪽을 바라보며 화제를 돌린다.
“그나저나, 사진으로 보던 거랑은 확실히 다르네.”
어느새 도착한 첫 번째 섹션.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했다.
내가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봤던 닐 하우저의 그림이었다. 일출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고 그때와 다른 건, 공간만이 아니었다. 낮은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잘게 쪼개는 아르페지오 위로 빛처럼 드리워지는 바이올린 선율.
“와, 음악 들으면서 그림에 완전 몰입했어.”
“나도 나도. 해가 막 뜨려는 장면에 갇힌 기분이었어.”
반원 모양으로 둘러선 관람객들의 감탄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자연스레 시선이 신수아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호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작곡가님.”
어딘가로 사라졌던 닐이 다시 돌아왔다.
옆에는 거무튀튀한 카메라를 어깨에 멘 기자가 함께였다.
“함께 사진을 찍으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혹시 바이올린 연주하신 분도 오셨나요?”
닐의 말에 내가 신수아를 가리켰다.
“네. 이 분이에요.”
“반갑습니다. 정말 좋은 연주였어요.”
“아. 네···.”
“누나 사진 괜찮아요?”
“어, 어···.”
어쩐지 정신없어 보이는 신수아 곁에 섰다.
닐도 기자의 요청대로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이 공간을 만든 세 사람이 나란히 서자, 팍! 하고 플래시가 터졌다.
#
해가 넘어가고, 파랗게 빛나던 하늘이 검게 가라앉은 저녁.
신수아는 덜컹거리는 버스 뒷좌석에 앉아 한참 동안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누가 보면 멍때리고 있는 듯 보일 정도로 초점 없는 눈빛이 기사 속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리고 양옆에 서 있는 닐 하우저와 한서호. 포털사이트 메인. 댓글 수백 개······.
적어도 그녀에겐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비록 이 기사엔 ‘한서호의 곡에서 바이올린을 맡은 신수아’라는 문구가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은 이미 난리가 났다.
아니.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연락이 끊겼던 옛 친구들부터 대학교에서 몇 번 스친 게 전부였던 동기, 선배들까지 연락이 온다.
“······.”
신수아가 유리창에 머릴 콕 기댔다.
주섬주섬 이어폰을 꺼내 들어 엉킨 선을 할머니 실뜨기하듯 느릿느릿 풀었다. 그리고 양쪽 귀에 꽂고서 음악을 틀었다.
[브람스 – 바이올린 소나타 1번]밀려드는 소리에 눈을 슬며시 감는 것도 잠시.
신수아가 핸드폰 화면을 다시 밝혔다.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나.
‘근데······.’
뭐라고?
뭐라 해야 하지?
가볍게 킨 톡을 노려보며 고민이 깊어진다.
[잘 들어갔어?]와, 무슨 소개팅 했냐. 이건 아니지.
[무사히 끝났네.]이건 무슨 첩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고.
“뭐라 하냐······.”
말끝을 흘리며 한참 동안 화면만 바라보던 신수아가 갑자기 빠르게 글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내가 저번에 네 첫 연주 듣고 무슨 생각했는지 나중에 알려준다고 했잖아······사실 그때 좀 치네? 싶었어.]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적어내려간다.
애초에 보낼 생각이 없었기에 필터도, 두서도 없었다.
[내가 너 되게 무시하고 있었거든. 예전에서 못 버티고 나왔는데, 부모님 잘 만나서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속마음이었다.
혼자 색안경을 끼고 바라봤던.
그래서 어쩐지 자꾸 찝찝한.
자격지심같은 것.
‘나 왜 갑자기 성토하고 있지?’
이러다간 무대 공포증으로 생각했던 것과 그래서 짠해했던 것까지.
긴 오해의 일대기를 다 읊을 판이다.
다시 생각해도 부끄럽다. 내가 누굴 짠해한 거야······.
당연히 보낼 수 있을 리 없는 메시지를 싹 지웠다. 그래도 좀 시원하긴 하다. 갈대밭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던 동화 속 주인공 마냥.
신수아가 다시 화면을 두드렸다.
딱 한 줄만 써놓고, 잠시 고민하다 보내버렸다.
휴. 끝. 됐어.
“모르겠다.”
버스에서 내린 그녀가 머리끈을 툭 풀어 다시 묶었다.
때마침 울리는 전화벨.
‘뭐야, 이렇게 바로?’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뜬 신수아가 홱 발신인을 확인했다. 바싹 긴장했던 표정이 풀어진다.
“어, 수영아. 나 조금 늦을 것 같은데, 배고파? 아니면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들어갈 때 치킨 사서 갈게. 응, 응. 문단속 잘하고 있고?”
전화를 끊고, 피식 웃었다.
나 왜 쫄은 거야.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어느새 어두컴컴해진 하늘 사이로 가로등이 조명을 떨군다.
마치 명확하게 다른 세상이란 걸 가르려는 듯 경계선처럼 명확한 빛과 어둠.
괜스레 오기가 올라온다. 바닥에 생긴 동그란 빛마다 발을 찍었다.
“이번엔 한서호 덕분이지만······다음엔······.”
다짐하듯 중얼거리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기 위해선 연습. 연습뿐이다.
비록 상황 때문에 이렇게 겉돌고 있지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실력이 되어야 한다.
혹여 과외생 때문에 실력이 떨어질까, 과외도 안 하고 연주 알바만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리고 이렇게, 항상 밤마다 연습실로 향했다.
그런데 오늘은 느낌이 좀 다르다.
정말 오랜만에.
가야 해서가 아니라, 가고 싶어서 연습실로 향하는 기분이랄까.
······브람스의 희망 어린 노래가 그녀의 주변을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
[신수아: 고맙다.]“···?”
뭐가 고맙다는 건지 앞에 가타부타 말도 없다.
참 신수아답달까.
물론, 뭐가요? 라고 물을 정도로 나도 눈치 없는 놈은 아니다.
[나: 저도요. 덕분에 원하는 곡들 만들 수 있었어요.]답장을 보내놓고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었다. 다시 생각해도 웃겨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욕실을 나오자 부모님은 전시회에 대해서 한창 얘기 중이셨다.
“전시회가 너무 좋더라고. 매일 갈 수 있을 것 같아.”
“내일 가면 나 설명 좀 해줘. 그림 잘 모르니까.”
“나라고 아나. 근데, 그런 거 필요 없더라고. 딱 서서 그림을 보는데, 음악이 자연스럽게 들려오면서 어느샌가 별별 생각을 다 하고 있더라니까.”
“그래?”
그러다 아버지가 날 보곤 반겼다.
“오늘 전시 반응 좋았다면서? 기사도 많이 올라오던데?”
“성공적이었던 것 같아요.”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아버지가 푸슬푸슬 웃는다.
“내일 엄마랑 같이 가보려고. 아 참···.”
뭔가 줄 게 있다며 가방을 뒤적이는 아버지. 손에 파일 하나가 딸려 올라온다.
“이거 SJ 엔터에서 보내온 것들인데, 하나는 네가 요청한 거. 그리고 다른 하나는 네 앨범 관련해서.”
“오, 확인해볼게요.”
파일을 받자마자 곧장 방에 들어왔다. 침대에 걸터앉아 내용을 확인한다.
먼저, 내가 백한길 회장을 통해 요청한 내용이 나왔다.
문화재단에서 성인 연주자들 대상으로 하는 지원 사업을 늘리기 위한 SJ 문화재단의 기획안.
회사원이었을 때 기억이 새록새록 나고 좋네.
피식거리며 찬찬히 읽어보았다.
백한길 회장은 한 번 읽어보고 고칠 것들이 있나 알려달라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냥 지원금으로 끝내는 게 아닌, 연주할 자리가 없는 연주자에겐 자리를 마련하고, 음악에만 집중하길 바라는 연주자에겐 그 외의 것들을 해결해주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지원들이 세세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혜택이 혜택인 만큼 아무래도 선정 기준이 까다로울 것 같지만, 그렇다고 오늘 본 4인방이 떨어질 것 같진 않지.
“조만간 슬쩍 얘기해봐야겠다.”
그거면 충분할 거라 생각하며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기획안을 넘기니 또 다른 기획안이 나온다.
하지만 이번엔 나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름부터가 ‘한서호 앨범 발매 기념 특별 공연’이니까.
앨범이 나온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기에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여전히 국내외 클래식 차트에서 1위를 유지하고 있기도 하고, 앨범 판매량 또한 근 5년간 로얄 클래식에서 유통한 곡들 중 최고라고 하니 발매 기념이라기보단 ‘감사 특별 공연’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날짜를 보니 슬슬 연습을 시작해야 할 텐데······.’
이미 SJ 엔터 측에선 마에스트로 알버트와 이야기가 끝났을 터.
그렇다면 나는 연주자들을 다시 모아야겠다.
······알버트가 온다고 하면.
다들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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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제껏 숱하게 연주를 해왔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알버트에게도 대성공이라 할만한 반응이었다.
물론 지휘자로서, 베토벤이 이 연주를 어떻게 보았을까? 그런 의문과 의심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그곳에 앉아 있던 3천여 명의 관객들은 모두 기립 박수를 보내왔고, 그들의 표정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베토벤이 그랬던 것처럼.
그거면 된 거라고 했다.
······이 소년이.
마우스를 조금 내렸더니 밑에 콘서트 기사 못지않게 쏟아져 나온 기사들이 있었다.
“한국에 가면 여기부터 들려야겠네.”
알버트가 작게 중얼거리며 수첩에 메모했다.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쓴 그가 다시 수첩을 덮고서 한쪽에 쌓아둔 악보 뭉치를 끌어왔다.
자연스레 그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한서호의 곡이었다.
그리고 한서호가 보내온 악보였다.
“일부러 이렇게 자세하게 주석을 단 건가? 아니면 원래 이런 스타일인 건가?”
혼잣말을 내뱉은 그가 뭐든 상관없다는 얼굴로 음표들을 훑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휘자의 공부가 시작된다.
이전처럼 막막하거나, 의심이 들지 않았다.
공부하다 막히면, 언제든 물어볼 연락처가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