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97
097. 마에스트로
알버트는 지휘대 앞에 서서 핀 조명이 떨어져 내리는 곳을 보았다.
그곳엔 피아노를 등진 한서호가 있었고, 그의 바이올린에선 서늘하고 시린 음색이 구슬픈 선율과 함께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악보를 떠올리며 연주하겠죠.’
그게 대체 무슨 대답인가 싶었는데······.
웃음이 픽 하고 새어 나오려 한다.
‘저런 뜻이었던 건가.’
연주자는 모두 악보를 보며 연주를 한다.
그러나 누가 연주하냐에 따라 그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심지어 실력이 비슷한 연주자끼리도 마찬가지다.
알버트는 그 차이가 어디서 생겨나는지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악보의 음표만 급급히 쫓으며 그대로 악기를 연주할 뿐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악보를 이정표 삼아 작곡가가 만들어낸 세계를 탐구한다.
같은 악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전혀 다른 악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서호는 악보를 보고 있다.
하지만 고작 흩뿌려진 음표를 쫓고 있는 건 아닐 거다.
저 연주자는. 아니, 작곡가는······
자신이 만든 세계를 유영하고 있다.
‘애초에 답은 여기에 있었거늘.’
알버트의 시선이 악보에 머문다.
보통의 악보와는 달리 수많은 주석이 달려있고, 그 외에도 자신이 묻고 답했던 흔적들이 가득하다.
그 모든 것들을 지워도 다시 쓸 수 있을 만큼 머릿속에 생생하다.
여기에 한서호가 떠올리는 방향이 그 어떤 지도보다 분명하게 나와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질문은 어리석었고, 한서호의 대답은 현명했다.
흐음······.
알버트의 시선이 한서호에게로 다시 향했다.
이쯤 되니 궁금해진다.
한서호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마치 베토벤의 ‘전원’을 들으면, 널따란 들판이 생각나는 것처럼······.
——!
······가족이려나.
피날레가 코앞이지만 여전히 화려하지 않은 연주였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감정이 복잡하고 다양해서 화려함에 버금가는.
끝에 다다르자 관객들이 박수를 칠 준비를 한다.
음악을 듣고 여러 감정이 켜켜이 쌓여있을 그들의 유일한 분출구인 것이다,
‘하지만 아직이다.’
알버트는 조명에도 번쩍이지 않는 목재 지휘봉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오케스트라의 시선이 그 끝을 따라 올라간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한서호가 마지막 음을 길게 끄는 순간.
두두둥———!
팀파니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현악 연주자들의 활이 일제히 들어올려지고.
부우우우——!
두 대의 호른이 조성을 자연스럽게 바꿔가며 다음 곡을 예고한다.
격정적인 변화에 관객들은 박수를 포기한다. 그리고 온몸이 저릿해지는 전율을 느끼며 좀 더 참기로 한다. 모든 게 끝나면 박수로 이 감정을 쏟아내리라 다짐하며.
그렇게 연달아 두 번째 곡이 시작되었다.
‘가족.’
같은 이름을 가진 곡이 무대에서 흘러나온다.
그때, 알버트가 돌연 눈을 감았다.
마치 이전 세대의 전설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그랬듯이.
연주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던 시야를 차단하고.
그는 횃불을 들었다.
그저 따라오라고.
그건 자신감이었고, 권위였으며 완벽한 암보가 되어있기에 가능한 지휘였다.
그는 한서호가 아니지만.
알버트이기에.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장이기에.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볼 수 있어야 했다.
어느새 바이올린을 옆에 내려놓고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하는 저 터무니없는 천재 작곡가의 세계를.
‘그래야, 마에스트로(Maestro)라 불릴 만하지 않겠나.’
알버트의 지휘를 따라 오케스트라가 움직인다.
그 연주를 관객들이 뒤따른다.
그렇게 공연장의 모두가.
———!
한서호가 만든 세계의 문을 두드렸다.
#
“최고의 경험이었네.”
무대가 끝나고, 알버트가 내게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오케스트라의 수장으로서, 여기보다 훨씬 크고 좋은 공간에서 숱하게 지휘를 해왔을 그가, 오늘을 최고의 경험이라 평하는 건 좀 신기하긴 하다.
“훌륭한 연주자들이었고.”
알버트의 시선이 연주자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오히려 무대 위에 있을 때보다 더욱 상기된 얼굴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마지막의 기립박수가 그들의 혼을 쏙 빼놓은 것 같았다.
나도 그들을 보며 끄덕였다.
그리고 알버트에게 물었다.
“이제, 바로 뉴욕으로 가시는 거죠?”
“그렇지. 왔던 날처럼, 바로 돌아가야지.”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끄덕였다.
“정말 바쁜 휴가셨네요.”
“그러게 말이야. 이제, 다음 휴가를 기다려야겠군.”
“또 오세요.”
그러자 알버트가 턱끝을 긁적였다.
“그게 고민이란 말이지. 베토벤이냐, 자네냐.”
“네?”
“예전엔 휴가 때면 베토벤과 관련된 장소들을 여행 다녔네. 요샌 좀 뜸했지만··· 베토벤 생가를 가본 지가 오래되었더라고. 지금의 내가 베토벤이 마지막으로 쓴 피아노와 악보들을 본다면 또 다른 감상을 받을 것 같아서 말이야. 한데, 자넬 보는 걸 포기할 수도 없고. 솔로몬처럼 일주일씩 절반으로 나눠야 하는 건가.”
진심으로 고민하는 알버트를 보며 내가 고갤 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음?”
“저도 그때쯤엔 유럽에 있을 것 같거든요.”
“오호? 배낭 여행이라도 가려는 건가?”
“네.”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알버트도 환한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 참 반가운 소리군. 나와 독일에서 만나면 되겠어. 혹, 베토벤 생가에도 관심이 있나?”
“그럼요.”
생각만으로 조금 설레이는 기분이다.
정작 난 토마스 브로드우드에게 주문만 해놓고 실물을 보지 못했었잖나.
“베토벤이 사용한 마지막 피아노. 저도 엄청 궁금했거든요.”
······.
······알버트는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관객들도 모두 빠져나갔지만, 여전히 공연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연주자들의 가족, 친구들이 꽃다발을 잔뜩 들고 기다렸다.
그중엔 윤태환과 그의 가족들도 보였다.
환하게 웃는 윤태환의 모습을 보며 나도 걸음을 옮겼다. 내 가족이 있는 곳으로.
아버지도 팔짱을 끼고서 연주자들을 지켜보는 중이셨다. 흐뭇함이 느껴지는 미소다. 하긴, 여기에 있는 연주자들 모두, 원래는 사운드필름 스튜디오에서 영화 음악을 녹음했던 이들 아닌가.
“반응 너무 좋더라.”
“그랬어요?”
“장난 아니었어. 영화 시사회는 감흥도 없을 만큼. 근데, 연주자들하고는 이렇게 헤어지는 거야?”
“오늘은 너무 늦었고, 조만간 연습실에서 다 같이 모이기로 했어요.”
그 말에 아버지가 끄덕인다. 그리고 뒤쪽에서 다른 연주자들과 근황을 주고받던 엄마가 다가와 물었다.
“배고프지? 뭐 먹을까? 삽결살 좀 사다가 구울까?”
“너무 좋죠.”
얼른 끄덕이자, 뒤쫓아오던 아버지가 내 어깨에 손을 턱 하고 올렸다.
“오늘같이 좋은 날엔 아빠랑 소주······.”
“······.”
“는 좀 그렇고. 와인 한 잔씩 하자. 와인은 괜찮잖아 여보. 그치?”
“흐음···.”
이럴 땐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상책이다. 긁어 부스럼 만든다고 하잖나. 그냥 간절한 눈빛을 쏘아 보낼 뿐이다. 술이라니! 대체 몇 년 만인가!
“그럼, 딱 한 잔만이다? 근데, 삼겹살에 소주가 어울리······.”
“엄마, 감사합니다!”
뭔들!
#
다음날.
나는 이른 아침 SJ 문화 재단으로 향했다.
양가호 대표의 사무실에 들어가 앉자마자, 나름 예상하고 있었던 제안이 들어왔다.
“······심사요.”
“그래. 네가 회장님께 지원 사업 관련해서 이런저런 의견도 얘기했었다면서. 이왕 관심 가지는 거면, 심사도 해보는 게 어떤가 해서.”
예상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갤 저었다.
“아녜요. 심사는 그냥 문화 재단에서 해주세요.”
“왜?”
“아는 사람들이 꽤 많이 지원했더라고요. 그래서 공정하지 못할까봐서요.”
“그래? 네가 음악에 공정하지 못할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요. 연습하면서 자주 들었잖아요. 귀에 익으면 더 좋을 수밖에 없죠.”
그럴듯한 이유로 거절했지만, 사실 정확히는 심사를 할 이유가 없었다.
연주자들 모두가 잘할 거라 확신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내 이름이 심사위원에 들어가 있으면 내가 도와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뭐, 네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실력도 중요하겠지만, 음악을 너무 좋아하는데 사정 상 이어나가는 게 어려운 분들도 최대한 많이 뽑아주세요.”
“응? 아, 당연하지. 애초에 그런 취지인 걸.”
선배들이 안정적으로 음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후배들이 많아지고 키워지길 바라는 지원 사업 이기에, 실력 우선으로만 뽑진 않는다. 최대한 많은 연주자들이 해택을 누릴 수 있는 게 중요했는데, 물론 그 때문에······.
“근데 일을 너무 크게 벌인 건 아닌가 싶어. 예산이······.”
원래 양가호 대표가 계획하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확실히 백한길 회장의 푸쉬로 일이 더 커지긴 했다.
이제껏 문화 재단에서 했던 후원 중. 범위로 보나 규모로 보나 역대 최대.
하지만 난 고갤 저었다. 내가 사업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진 모르겠지만, 난 이것도 부족하다 생각하거든.
“악기 하나에 수천, 수억, 그 이상도 지불하는데,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들에게 그 정도 투자하는 건 여전히 적죠. 그리고 뽑으시면. 그래서 연주를 들어보시면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실 걸요.”
“그러려나?”
내 말에 양가호 대표가 느릿하게 주억거렸다.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 같다며.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슬쩍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또 몰라요. 이번 프로젝트를 계기로 대표님이 악기 대신, 사람을 모으시게 될지도.”
#
······며칠 후 합격자 명단이 나와 미리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심사위원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신수아를 비롯한 4인방부터, 윤태환을 비롯한 연주자들까지.
전부 합격해버렸으니.
‘하마터면 내 식구 밀어준 것처럼 돼버릴 뻔했지.’
내 식구라······.
피식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평소였으면 오그라들었을 단어가 괜스레 뿌듯해지는, 그런 오묘한 감정이 들어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은 홀로 해야 할 것들이 많기에.
때마침 작업실로 들어온 김윤주 실장에게 프린트를 부탁했다.
그녀가 손목을 확인하며 내게 묻는다.
“화원예고 애들 언제쯤 온다고?”
“2시쯤이니까 한 시간 정도 남았네요.”
“밥은? 먹었을 리가 없지. 아침부터 여기 박혀서 강의 준비만 했는데.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도시락 하나 시킬까?”
“배가 고픈 것 같기도······.”
“그게 정상이야. 얼른 시켜줄게. 아 맞다. 그리고 오늘 박 팀장님 쫙 빼입고 오셨더라?”
“엥, 왜요?”
“모교 애들한테 성공한 선배 이미지 보여주고 싶다고.”
“어떻게 입으셨는지 궁금한데요? 사무실 가볼래요.”
“구경 가서 놀려주자~.”
얼른 작업실을 나와 김윤주 실장과 킥킥 대며 복도를 걸었다.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김윤주 실장이 말했다.
“그나저나, 애들 엄청 설레하고 있겠네.”
“회사 견학 와서요?”
“아니? 너한테 멘토링 받으니까.”
“그거야, 지난번에도 받았는데요 뭘.”
내가 갸웃거리자 그녀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픽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때의 너랑, 지금의 네가 같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