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se Chef Life RAW novel - Chapter 23
22화. 제임스의 부탁(4)
***
쉬운 일이다.
해준에게는 감자도 있고, 아버지의 레시피도 있으니까.
다만,
*
<감자 스프>
-재료 : 감자 3개, 양파 1개, 버터 50g, 우유250ml, 소금
-순서
1. 감자를 삶아 껍질을 벗기고, 적당한 크기로 자른다.
2. 팬에 버터를 넣고, 양파와 감자를 볶다가 우유를 넣는다.
3. 뭉근하게 끓여주다 소금으로 간을 한다.
*
‘양파가 있으면 좋은데···.’
감자만으로는 텁텁할 것 같았다.
양파가 들어가야 뭉근한 단맛이 흘러나올 터.
해준은 공방 구석 작은 주방으로 향했다. 혼자 사는 제임스의 주방은 그야말로 최악. 설거짓거리가 한가득 쌓여있고, 제대로 된 식재료도 없었다.
구석에서 발견한 양파 자루. 열어보니 대부분 썩은 상태였다.
“윽, 썩었잖아.”
당장 양파를 구할 곳이 없다.
오기 전 들른 잡화점에도 양파는 없었고, 농장에서 키우지도 않으니까.
뒤적거려보니 다행히도 상태가 양호한 양파를 발견. 간신히 감자 스프 정도는 끓일 크기였다.
“뭐 도와줄까?”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클로에가 주방으로 들어와 물었다.
“농장에서 버터랑 산양유, 소금 좀 가져다줄래?”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클로에에게 재료를 부탁한 뒤 팔을 걷어붙였다.
일단 조리대부터 깨끗이 하기 위해 설거지부터 시작. 말라비틀어져 접시에 딱 달라붙어 있는 양념들을 간신히 벗겨냈다.
막 정리를 끝냈을 때, 타이밍 좋게 클로에가 재료를 한 아름 들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자, 여기.”
“고마워.”
이제 본격적으로 스프를 만들 차례.
양파를 얇게 썰어 달군 팬에 버터와 함께 넣고 볶았다.
하얀색이던 양파가 투명해지더니 이내 노르스름한 갈색으로 변했다.
“오, 갈색으로 변했어.”
“캐러멜라이즈야.”
“캐러멜라이즈?”
캐러멜라이즈는 설탕을 녹이면 갈색으로 변하며 달고나 형태로 되듯, 음식물의 당 성분이 높은 온도에서 점점 갈색으로 변하는 걸 의미한다.
양파의 단맛을 끌어내기 위한 과정이다.
양파의 달짝지근한 풍미를 최대로 끌어올려 준 후, 삶은 감자와 산양유를 용량에 맞게 넣고 끓였다.
보글보글-
김과 함께 고소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여긴 믹서기가 없으니 뭉근하게 끓고 있는 스프를 나무 주걱으로 꾹꾹 눌러 덩어리를 으깼다. 감자와 양파가 으스러져 없어지고, 걸쭉한 형태로 서서히 변했다.
드디어 완성!
속이 움푹 팬 접시에 보기 좋게 담아 내갔다.
여전히 퀭한 얼굴의 제임스가 해준의 접시를 보자마자 엉덩이를 들썩였다.
고소하고 달큰한 향기가 마치 페로몬처럼 그를 유혹했다.
“킁킁··· 냄새가 그럴싸한데?”
“맛도 좋을 겁니다. 드셔보세요.”
“어디.”
후르릅-
스프를 한 숟가락 뜬 제임스의 동공이 확장됐다.
“!!??···”
스프가 목구멍을 타고 부드럽게 위장까지 퍼져 내렸다.
숙취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위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느낌.
속이 편안해졌다.
“아아··· 이걸 먹으니 속이 편안해진다.”
마치 이틀 꼬박 야근하고 집에 돌아와 욕조에 뜨끈한 물을 받아놓고 그 안에 들어간 느낌.
위장이 따뜻해지자 몸 전체에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고작 스프 한 그릇일 뿐인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제임스는 저도 모르게 접시를 들고 코를 박은 채 스프를 흡입하듯 마셨다.
이건 찰스가 해줬던 스프의 맛 그 이상이다.
“크아~ 개운하다! 속이 싹 풀려.”
접시를 내려놓은 제임스가 만족한 듯 외쳤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해준이 그에게 물었다.
“역시 숙취 해소에는 뜨끈한 감자 수프만 한 게 없다니까.”
“맛은 어땠어요?”
“끝내줘. 네 아버지가 해주던 바로 그 맛이다! 으하하.”
“다행이네요.”
“그런데 한 그릇 더 있냐? 어쩐지 아쉽네.”
“네. 많이 있으니까 더 드세요.”
해준이 빈 접시를 들고 일어나자, 군침을 흘리며 제임스를 바라보던 클로에가 소리쳤다.
“나도. 나도 먹고 싶은데, 내껀 없어?”
“알았어.”
“참, 근데 말이다.”
주방에 막 가려는 찰나 해준의 등 뒤에서 제임스가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까 찰스의 감자 스프엔 뭔가 특별한 게 더 있었어.”
“특별한 거요?”
“응.”
눈을 가늘게 뜨고 턱수염을 비비 꼬던 제임스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그거야. 빵.”
“빵이요?”
“찰스는 늘 스프 위에 구운 빵을 올려줬어.”
“구운 빵이요?”
“그래. 식빵을 바삭하게 구워 올려줬었지. 처음엔 딱딱한 식감이지만, 나중엔 스프를 잔뜩 먹어서 촉촉하니 맛있었어. 아주 별미였다고. 으하하. 자꾸 옛 기억이 떠오르는구나.”
레시피 노트에는 없는 조리법이다.
아마도 조리 방법을 개선하면서 기록을 빠뜨린 것 같다.
해준은 제임스의 말을 듣고, 구운 빵을 어렵지 않게 재현해냈다.
그는 이번에도 게 눈 감추듯 스프를 먹어 치웠다.
두 번째 그릇은 클로에도 함께였다.
“으음~ 이런 맛이구나. 너무 맛있다.”
“크으~ 내 이 맛을 또 보게 될 줄이야.”
양쪽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사.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해준도 스프를 맛봤다.
적당히 걸쭉하면서 고소하고 달큰한 맛. 해준이 먹어본 스프라고는 분유 맛이 나는 시판용 스프가 전부였는데, 이건 또 맛의 신세계였다.
‘진짜 속도 따뜻해지고···.’
썬플라워에서 팔아도 좋을 것 같은 메뉴였다.
아침이라면 제임스처럼 숙취가 있는 손님도 있을 것이고, 또 샌드위치가 부담스러운 손님에게 제격일 것 같은 요리다.
‘좋아. 이것도 추가하자.’
퀭했던 제임스의 안색이 돌아왔다.
이제 기운을 다 차린 듯했다.
“이제야 살 것 같군. 으하하. 다음에 또 부탁 좀 하지.”
“언제든지요.”
제임스의 숙취 해소를 도와주자 명성이 올랐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니 이제 내가 도움을 줄 차례지? 그래 뭐가 필요하다고?”
“마당에 놓을 테이블 세트요. 사람들이 앉아 편히 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좋아, 맡겨만 주라고!”
***
“오~ 예쁘다. 잔디 마당이랑 잘 어울려요.”
아침 일찍 출근한 민주가 마당에 가져다 놓은 원목 테이블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나무를 정교하게 이어붙이고, 등받이는 천으로 마감한 의자와 자작나무 상판으로 만든 테이블은 마당의 잔디의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예쁘지 않을 수가 없지.’
술안주로 통감자 버터구이와 웨지 감자를 잔뜩 만들어주고, 다음날 먹을 숙취 해소용 감자 스프까지 한 통 듬뿍 만들어주고 가져온 테이블이다.
“엄청 비쌀 거 같은데.”
“음, 그냥 받아왔어.”
“이걸요?”
“엄밀하게 따지면 일종의 노동력 교환이라고나 할까.”
“아는 사람한테 부탁했구나?”
모든 비밀을 말할 수 없는 해준은 그저 오묘한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은 아직 안 먹었지?”
“당연하죠. 계약 조건이잖아요. 1일 1뚱드위치.”
“그럼 이것 좀 먹어볼래?”
해준은 민주를 가게 안으로 끌고 와 감자 스프 접시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감자 스프.”
“오, 신메뉴예요?”
“그냥. 반응 괜찮으면 팔아보려고. 시식 좀 부탁해.”
뭐가 신나는지 어깨춤을 추며 자리에 앉은 민주. 이내 표정을 고치고, 고든 램지라도 되는 것처럼 신중하게 스프를 맛봤다.
“오!”
“오?”
“오오오!”
“맛있다는 뜻이야?”
“표정을 봐요. 맛없는 음식 먹은 사람이 이렇게 놀란 표정을 짓겠어요?”
“하하. 그런가?”
“엄청 맛있어요. 완전 핵 꿀맛! 뭉치야, 너도 먹어봐.”
혼자 먹기가 아까웠는지 민주가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뭉치의 밥그릇에 스프를 덜어줬다.
시큰둥하게 있던 녀석이 먹을 걸 주자 금세 몸을 일으켰다.
할짝-
“어때? 맛있지?”
“야아옹~!”
“헤헤. 나도.”
민주가 뭉치를 보며 웃었다.
그녀는 몰랐다. 이미 뭉치가 농장에서 스프를 두 그릇이나 비우고 따라왔음을.
“오빠, 이거 오늘부터 팔아요. 금방 만들 수 있죠?”
“어? 어··· 만들 수는 있는데, 이렇게 급하게?”
“가뜩이나 손님들 불만이 크다고요. 뚱드위치를 너무 조금만 만들어 판다고. 양을 늘려달라고 했는데, 오빠 혼자 만드니 현실적으로 시간은 부족하잖아요. 근데, 이건 만들어만 놓으면 제가 떠나가 주기만 하면 되니까 매출에 더 큰 도움이 될걸요?”
알바 경력이 많다더니 민주는 정말 장사에 특화된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해준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민주는 곧장 메뉴판 추가 작업에 들어갔다.
필기 가능한 작은 우드 입간판에 글씨를 쓱쓱 적어넣고, 매장 입구에 내 걸었다.
+
신메뉴 출시
아침을 든든하게 채워 줄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자 스프
···1.5
+
***
“으··· 속 쓰려.”
김인철 변호사는 소송 승소를 기념하며 부어라 마셔라 새벽까지 달렸다.
그 결과 그에게 남은 건 숙취뿐.
꼬르륵-
묘하게도 배가 고프면서 속이 쓰렸다.
뭔가를 먹고 싶지만, 뭘 먹어도 토할 것 같은 느낌.
속은 울렁거리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음식 한 가지.
“샌드위치나 먹을까?”
그거라면 먹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부드럽고 촉촉하기도 했지만, 만에 하나 다 못 먹더라도 뒀다 나중에 먹으면 되니까.
어느새 그의 발걸음은 사무실이 아닌 주택가 골목 썬플라워를 향했다.
.
.
.
‘뭐 이렇게 사람이 많아?’
썬플라워 앞은 마치 출근길 버스 정류장처럼 북적거렸다.
스파이더맨처럼 벽에 착 달라붙어 셀카를 찍는 사람들을 지나, 가게에 들어섰다.
마당 의자에 사람들이 앉아 있더니, 매장 안은 이미 만원. 포장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알바생에게 다가갔다.
“샌드위치 하나 주세요.”
“어쩌죠? 지금 막 매진됐는데···.”
“벌써요?”
“죄송합니다.”
“아···.”
이미 샌드위치를 먹을 생각에 위장에선 위액을 뿜어내고 있었다.
숙취에 허기, 위산과다까지 겹쳐지니 이미 속은 만신창이.
“뭐라도 먹어야 하는데.”
김인철의 중얼거림을 들었을까?
알바생이 친절한 미소로 그에게 다른 메뉴를 권했다.
“괜찮으시면 신메뉴인 감자 스프는 어떠세요? 빵 토핑도 올라가서 가볍게 속을 달래기는 좋을 텐데요.”
‘스프?··· 속을 달랜다고?···’
“주세요.”
주문을 하고 마침 손님이 나간 빈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서빙된 감자 스프.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알바의 추천에 반신반의하며 시킨 감자 스프의 비주얼은 꽤 그럴듯해 보였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고소한 향기가 후각을 자극한다.
‘먹어볼까···.’
후르릅-
“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감탄사.
창피함에 주변을 휙 둘러보니 알바생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본다. 마치 ‘제 말이 맞죠?’라고 말하는 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