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staff RAW novel - Chapter 54
아카데미 담당 일진 54화
검 끝에서부터 피어난 서리는 이윽고 검 전체를 감쌌다. 한철로 만들어진 푸른 검신이 더욱 퍼렇게 물들었다.
-네놈 이런 걸 언제…….
천마검의 말에 대답할 새도 없이 옥청혜검의 기수식을 취한 백일진이 달려든 실혼인의 손톱을 올려 치며 막아내었다.
치이이-
열기와 냉기가 부딪히니 ‘치이이-’ 소리와 함께 회색 연기가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실혼인은 순식간의 식어버린 자신의 손톱에 다시 강한 열기를 불어넣은 뒤 백일진의 가슴팍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빠르고.’
반응하기도 힘들 정도로 신속한 공격이었다.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백일진은 고개를 숙여 실혼인의 손톱을 피해냈다.
그 순간, 실혼인은 백일진의 품으로 파고들어 몸을 가까이 붙인 후 입을 열었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백일진의 목을 노렸다.
‘더러운 데다가.’
백일진은 검을 들고 있지 않은 왼손으로 실혼인의 후두부를 붙잡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콰직-
그 후, 무릎으로 실혼인의 안면을 찍었다. 코가 덜렁거리며 휘었지만, 실혼인은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백일진의 다리를 붙잡았다.
‘징그럽기까지 하군.’
잡히지 않은 반대 발로 땅을 박차고 몸을 회전시키며 뛰어오른 백일진이 실혼인의 목젖을 후려치고는 거리를 벌렸다.
‘지금.’
물러섰던 것만큼의 속도로 거리를 좁히고 쇄도한 백일진이 실혼인의 남은 팔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어느새 조기를 일으킨 실혼인의 손톱이 백일진의 검을 튕겨냈다. 튕겨진 검면이 실혼인의 턱을 후려쳤다.
-멍청한 자식, 검을 저렇게 튕기니 얼굴에 처맞지.
‘콰직-’ 소리와 함께 턱이 박살 난 실혼인이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한참이 지나도 반응이 없자 백일진은 턱가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긴장을 풀었다.
‘끝인가.’
-아직, 아니다. 끝까지 조심해라!
‘뭐야. 저건.’
천마검의 외침과 동시에 일어난 실혼인이 부지불식 간에 온몸에서 붉은 마기를 내뿜었다.
‘거슬리는 기운이군.’
백일진은 다시 검을 강하게 고쳐 쥐고 실혼인을 가만히 응시했다. 실혼인도 가만히 백일진을 응시하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옥청혜검 제1식 용시호행(龍視虎行).
용과 같은 눈빛을 하고 범과 같이 행동하여라. 신중하게 상대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파악하고, 신속하게 움직이라는 뜻이었다.
백일진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찌이이익-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백일진의 살갗이 공기와의 마찰을 이기지 못하고 붉게 변하더니 이내 벗겨져 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뿜어지는 기운을 감당하지 못한 그의 뼈가 두둑두둑 부러졌다.
“으윽.”
-무, 무리하지 마라!
콰아아아앙-
검에서 뿜어지는 파괴적인 기세에 대기가 흔들렸다. 강당 내부에 있던 학생들이 깜짝 놀라 밖으로 튀어나왔다.
“지, 지진이다!”
“조심해!”
“밖으로 나가!”
이윽고 너울너울 부드럽게 춤을 추던 검신이 실혼인의 몸에 닿았고, 그 순간 실혼인의 상반이 찢겨 나갔다.
실혼인은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스러져 갔다.
‘끝났나.’
손가락의 뼈마디가 모조리 박살 난 백일진이 검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과하게 힘을 소모한 탓일까 멀미가 찾아온 그는 떨어진 검 옆에 주저앉았다.
-괜찮나.
‘안 괜찮다.’
아무리 엄청난 회복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전신의 뼈가 부러지는 경험은 썩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교수들과 조교, 교관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옥상으로 뛰어 올라왔다.
가장 먼저 올라온 단계홍은 눈을 부릅뜨고 백일진에게 다가갔다.
“자, 자네……. 괜찮나.”
“괜찮습니다.”
이게 괜찮은 사람의 몰골이란 말인가. 다 벗겨진 살갗은 흉측하게 드러나 있었고, 신체 곳곳이 제멋대로 꺾여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나.”
단계홍의 말에 백일진은 잠시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고개 저었다.
“사실 좀 아픕니다.”
“내가 어서 의원을……. 배, 백일진! 정신 차려!”
뒤늦게 올라와 백일진의 상태를 본 조교들도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다가와 맥을 짚었다.
맥을 짚은 조교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표정을 굳히고 절레절레 고개 저었다.
그 반응을 본 단계홍은 눈을 부릅뜨고는 조교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어대었다.
“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자, 잠든 것 같습니다.”
“뭐?!”
“으음.”
때마침 백일진이 다리를 들어 올리며 잠꼬대를 했다. 황당한 표정을 지은 단계홍이 실소를 내뱉었다.
단계홍이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교관을 불렀다.
“이보게, 교관.”
“옛! 교수님.”
“뒷문을 지키던 견습 조교의 신상을 알고 싶네만.”
“예? 뒷문이요? 뒷문을 지키다니요? 뒷문은 상시 개방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저희는 견습 조교가 두 명밖에 없습니다.”
학생들을 좌지우지하던 카리스마는 어디로 간 건지, 단계홍 앞에 있는 교관은 한 마리의 순한 양과 다름없었다.
“흠, 그런가.”
“넵!”
단계홍은 눈썹을 까딱였다.
‘허술하긴 하군.’
하지만 이들의 탓만은 아니었다.
‘굳이 탓을 하자면 알고 있었음에도 분위기를 해하기 싫어 처치를 미뤄둔, 내 탓이 가장 크겠지.’
단계홍은 교관의 등을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침을 꿀꺽 삼킨 교관이 주위를 둘러봤다. 폭발이라도 있던 듯 구멍 난 옥상, 반쯤 갈린 시체 그리고 상처 입은 학생까지.
‘왜 하필 내가 교관으로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긴 거야.’
“저, 저기 단 교수님…….”
“……?”
“아이들에게는 뭐라고 할까요?”
단계홍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토닥였다.
“음, 굳이 걱정을 시킬 필요는 없지. 단순히 지진이었다고 공지하게나.”
“네?! 정말입니까?”
“내가 왜 자네를 상대로 거짓을 말하겠나.”
그 말은 곧, 자신의 관리 소홀을 눈감아주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교관이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관은 헐레벌떡 조교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고는 짐짓 엄숙한 목소리를 내었다.
“학생들에게는 단순한 지진이었다고 공지하도록. 그리고 이 학생은 어서 의무실로 옮기도록.”
어떤 처벌이 내려질지 걱정이 되어 표정이 좋지 않았던 조교들도 얼굴에 화색이 돌며 곧바로 뛰어 내려갔다.
‘굳이 저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필요는 없다.’
사실 그는 실혼인이 훈련장에 습격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실혼인이 뒷문을 나섰을 때, 따라 나와 실혼인을 처치하려 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백일진 때문에 미처 몸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나저나 백일진 녀석, 아까 그 움직임은 도대체 뭐지?’
백일진이 펼친 무당의 검술, 형태는 무당의 그것이었으나 안에 담긴 오의는 전혀 달랐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달랐다. 설마 무당의 무공마저 자기 몸에 맞춰서 재구성한 것인가?’
그렇다면 실로 놀라운 재능이다!
‘내 제자로 들어왔으면 좋았으련만…….’
관자놀이를 짚은 단계홍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지금은 자신도 제자를 키울 여건이 되지 못한다. 단계홍은 품속에 들어 있는 종이 쪼가리를 어루만졌다.
‘이게 아르무트 학장이 말한 스크롤이군.’
광역 정신계 마법이 걸린 스크롤. 이것을 조사하다 보면 실혼인을 부린 흉수를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단계홍이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우리 학생들을 납치한 것도 실혼인을 만들기 위해서가 분명하렷다?’
그러던 단계홍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찼다.
‘그런데 아르무트는 어떻게 이곳을 공격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지?’
극기훈련을 출발하기 전에 아르무트에게 얘기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반쯤은 걸러 듣는다는 생각으로 들었다. 하지만 이쯤 되니 의심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아르무트, 도대체 당신은 정체가 뭐지?’
단계홍의 의문과 함께 극기훈련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갔다.
다음 날.
학생들은 왠지 모를 아쉬움을 얼굴에 띠고 운동장에 모였다. 교관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연설했다.
“여러분은 제가 본 학생 중 최고였습니다.”
“악!”
“앞으로 돌아가서도 여기 와서 배웠던 협력심, 동지애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악!”
* * *
아카데미의 본관 바로 뒤편에는 아카데미의 졸업생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허름하고 낡은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예나 지금이나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다.
그 건물의 문을 누군가 거칠게 열어젖혔다. 책을 들고 안락한 리클라이너에 드러누워 홍차를 마시던 아르무트가 빙긋 웃으며 상대를 반겼다.
“오- 관태산 씨. 여기까진 무슨 일이에요?”
상대는 초점이 없이 흰자만 있었고, 머리는 그을린 듯 모조리 뽑혀 있었으며, 전신 곳곳 바늘 자국이 눈에 띄었다.
아르무트는 그를 사파 연맹의 맹주 관태산이라 불렀다.
엄밀히 말하면 상대는 관태산이 아닌, 그에게 심령을 제압당한 실혼인이었지만, 아르무트는 그런 사소한 차이 정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르무트…….”
“예?”
관태산과 심령이 연결된 실혼인은 아르무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마치 자신의 원수라도 본 듯이 살기까지 피워냈다.
“아르무트. 네놈 짓이냐?”
“뭐가요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텐데? 내 스크롤을 빼돌린 것도 너지.”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아!’ 하며 감탄사를 뱉어낸 아르무트가 홍차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키고는 실혼인에게 다가갔다.
“음, 관태산 씨.”
그리고 검지로 실혼인의 턱을 추켜들며 새파란 동공을 드러냈다.
“제가 아카데미 학생들은 건드리지 말자고 했잖아요.”
“뭐?”
“눈에 너무 띈다구요.”
관태산은 거칠게 턱을 빼내고는 흰색 눈자위를 부릅뜨고는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그 정보는 어떻게 알았지? 너에겐 말해주지 않았을 텐데?”
“제가 말했잖아요. 너무 눈에 띈다고. 아마, 총장은 저보다 더 빨리 알았을 수도 있어요.”
“카르도 마진……?”
대답하지 않은 아르무트는 리클라이너에 돌아가 몸을 뉘었다. 그러고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관태산을 바라봤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요?”
“……돌려줘라.”
“뭘요?”
“스크롤.”
“아, 스크롤이요?”
사실, 이것이 관태산이 위험을 무릅쓰고 실혼인을 이곳에 보낸 이유였다. 광역 정신계 마법이 담긴 스크롤은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었기에.
“음, 제 요구를 들어주시면 돌려드리도록 하죠.”
“……말해봐라.”
“그럼 혹시 카프티스 산맥을 조사해 주실 수 있나요?”
“뭐? 카프티스는 왜?”
“궁금한 게 있는데 제가 직접 가기는 무서워서요.”
카프티스 산맥은 로체트 왕국의 동북부와 동남부를 가로지르는 왕국에서 가장 거대한 산맥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거대한 산맥이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조사하는 것은 별일 아니었다.
그런데도 관태산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피에트로’의 레어가 있다는 것.
이것은 자신이 곧바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스터께 상의해 보고 연락하겠다.”
“네, 뭐 그러세요.”
“참, 마스터께서는 네가 다른 마음을 먹은 게 아닌지 의심하고 계시니 처신 똑바로 하도록.”
“음, 그건 알아서 할게요-”
“재수 없는 자식.”
그 말을 끝으로 관태산은 실혼인의 심령제어를 풀었다. 제어가 풀린 실혼인은 아르무트를 발견하고는 살기를 내뿜으며 다가왔다.
“아이, 참.”
찡긋-
아르무트의 윙크와 함께 실혼인의 주변에 마법진들이 생겨났다. 마법진에서 나온 무형의 기운들은 실혼인의 몸을 종잇장 구기듯 찌그러뜨렸다.
이내 작은 공 모양으로 찌그러진 실혼인은 두둥실 떠올라 학장실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쓰레기는 치우고 가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