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05)
그런 설정은 설정집에도 없었는데.
괜히 뻘쭘해진다.
“그래. 소리가 참 좋네.”
“그렇지? 김덕성, 너라면 시시오도시의 풍류를 알아주리라 생각했다.”
린이 웃는다.
착.
그녀가 내 팔에 팔짱을 낀다.
커다랗고 부드러운 지방의 감촉이 팔에 느껴진다.
내가 이거 하지 말라고 했던 거 같은데.
[파트너. 이 자식. 부러워.]하지만 기쁜 듯 웃고 있는 린을 보니 뭐라 하기도 좀 그렇다.
그래, 아까 패드립 들은 뒤에 울고 있던 모습보다는 낫네.
“가자. 김덕성. 너한테 또 보여주고 싶은 장소가 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엉망이 된 정원을 나가 도착한 곳은 검도장.
죽도와 호구, 허수아비 등이 널려 있는 드넓은 도장에는 나와 린, 둘밖에 없었다.
탁.
도장의 문이 닫힌다.
그녀가 팔짱을 푼다.
“어려서부터 나는 줄곧 이 도장에서 시노자키 일도류를 단련했다.”
쓰러진 허수아비를 만지는 린.
아주 본 적 없는 배경은 아니다.
애니메이션에서 린의 과거 회상 장면이 들어갈 때 스쳐 지나가듯 도장이 배경으로 나왔으니까.
“가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단련뿐. 끔찍한 과거였다. 감옥 같은 집안에서 이 도장은 내게 족쇄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린이 진지한 목소리로 도장 한켠에 놓인 목검과 검도 호구들을 만지며 차분한 중얼거린다.
“오라버니들······. 은 내가 고아 출신 입양아라는 사실과 친자식인 본인들을 제치고 가문의 후계자로 낙점받았다는 사실을 시기해 나를 괴롭혔다. 당주님, 아니 아버지는 내게 칭찬 한 마디 없었다. 만족하지 마라. 검성의 이름을 지우는 그날까지 단련해라. 쉴 틈은 없다······.”
다 알고 있는 설정들이다.
원작 2권에서도, 설정집의 캐릭터 프로필에서도 나오는 이야기들.
분명 아무 감흥이 없어야 정상일 텐데.
“어쩌면 그런 환경 때문에 나는 열등감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보나파르트······. 쿠로사와······. 그리고 보나파르트를 이긴 너한테. 사실 진짜 원망해야 하는 대상은 따로 있었을 텐데 말이지. 부끄러운 일이었다.”
린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그녀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린이 입술을 깨문다.
“하지만 너는······. 그런 나를······. 네게 열등감을 품고 싸가지 없이 굴고, 거짓 유혹이나 하던 형편없는 여자인 나를······. 구원해주었다. 이 감옥에서······. 나를 해방해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흑태자가 침묵한다.
아니 평소에는 시끄러운 양반이 왜 이럴 때만 조용히 하는 거야?
한숨을 쉰다.
“이치로와 싸운 건 내가 아니라 쿠로사와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착각 좀 하지 말라고.”
내 말을 들은 린이 웃는다.
뭐야, 왜 웃어?
“내가 아는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너는 솔직하지 못하니까.”
“뭐?”
한 발짝.
린이 내 앞으로 다가온다.
기모노 옷자락에 감싸인 그녀의 커다란 가슴과 밤하늘을 닮은 남색 눈동자, 남색 포니테일이 시야에 들어온다.
“설령 착각이라도 상관없다. 김덕성. 나는······. 나는······.”
린의 남색 눈동자가 떨린다.
“네가 날 좋아할 수 있도록······. 진심전력으로 노력하겠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반드시 네 옆자리에 걸맞는 현모양처가 되어 보이겠다!”
또 아내 드립인가, 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기다려다오. 좀 더······. 이상적인 아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
그렇게 말하며 뺨을 분홍색으로 물들이는 린의 얼굴이 새삼스럽게 묘하게 예뻐 보여서.
평소와는 다른 그녀의 진지한 분위기에 묘하게 취해서.
나는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녀에게 폭언을 퍼부을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건 라노벨 캐릭터 시노자키 린이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살아 숨 쉬는 시노자키 린이었으니까.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래, 맘대로 해라.”
내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고작 이 정도뿐.
“알겠다.”
대답을 들은 린이 내게 다가와 팔짱을 끼며 웃는다.
나는 그녀의 팔짱을 이번에도 거부할 수 없었다.
제일 위험한 사람
시노자키 저택.
회유식 정원, 정자.
유리창 너머로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다다미방.
파란 기모노를 입은 린이 자리에 앉아 홀로 말차를 마시고 있다.
경치 좋은 조용한 정자는 그녀가 이 저택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 중 하나.
린의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김덕성······.”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두근.
린의 심장이 뛴다.
“큿······.”
린이 입술을 깨문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머릿속에서 오늘 있었던 일이 스쳐 지나간다.
시노자키 형제.
선택받지 못했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매번 자신을 업신여겼던 쌍둥이.
그들의 괴롭힘과 폭언을 린은 그저 견딜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녀는 가문의 도구였으니까.
시노자키 가문의 진짜 혈통을 이은 쌍둥이에게 반항할 수 없었다.
이 드넓은 저택에 그녀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도구로서의 운명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학습된 무기력과 억압은 그녀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나는 너한테 또 구원받았다.’
린이 말차를 한 모금 머금는다.
그녀의 입술에 쓴맛이 감돈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린다.
“아가씨.”
기모노에 하얀 앞치마를 받쳐 입은 중년의 미부가 들어온다.
“무, 무슨 일이지. 시녀장?”
죽은 안주인을 대신해 시노자키 저택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시녀장이 그녀의 눈에 비친다.
린의 여자력 수행을 도와주는, 그녀의 신부수업 스승이기도 하다.
화들짝 놀란 린이 얼굴을 붉힌다.
“사모하는 분과의 데이트는 잘 끝마치셨습니까?”
“무, 물론이다······. 서, 선전 포고도 했다.”
린이 고개를 숙이면서 애꿎은 텅 빈 찻잔을 만지작거린다.
“혀, 현모양처가 될 거라고······.”
검도장에서 했던 고백이 떠오르자 그녀의 가슴이 요동친다.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현모양처.
그 말을 마음 속으로 곱씹는다.
정원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시, 시노자키 덕성······.’
아버지의 말대로 정말 자신이 그의 아내가 된다면, 그가 시노자키 가문의 데릴사위가 된다면.
김덕성이 가지게 될 이름이다.
린의 눈앞에 밑도 끝도 없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신사에서 기모노를 입고 전통 혼례를 올리는 그와 자신의 모습.
정원에서 유카타를 입은 채 시시오도시 소리를 들으며 같이 잉어 밥을 주고, 차를 같이 즐기는 장면.
그녀의 방에서 밤을 함께하는······.
거기까지 상상한 린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큿······.”
린이 입술을 깨문다.
‘아, 아이는 둘이 좋겠지? 시노자키 가문을 잇기 위해서는 후사도 주, 중요한 일이니까······. 기왕이면 남자아이 하나와 여자아이 하나로······.’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파란 기모노 위로 배를 쓰다듬는다.
린의 머릿속에 유카타를 입고 아들의 목말을 태워주는 그의 모습과, 딸의 손을 잡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현모양처가 된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두근.
린의 심장이 터질 듯 가쁘게 뛴다.
쪼르르.
시녀장이 찻주전자를 들어 린의 찻잔을 채워 넣으며 묻는다.
“그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시녀장의 질문에 린이 상상의 나래에서 빠져나온다.
부끄럽다.
“그, 그건······.”
수치심으로 귓불까지 붉어진 린이 고개를 숙인다.
“마음대로 하라고······. 그렇게 말했다.”
거절도, 수락도 아닌 애매모호한 대답.
하지만 린은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아직 나 같은 엉망인 여자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이야기니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의 마음을 쟁취하리라.
“우유부단한 남자로군요. 아니, 아가씨께 들은 그의 성격이라면 어쩌면 의도적인 대답일수도······.”
“아, 아니다! 다, 단지 신중한 것일 뿐이다. 그는······.”
시녀장의 말에 린이 손을 휘젓는다.
“그 정도로 김덕성이라는 남자를 연모하십니까?”
“그렇다.”
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남색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는다.
“그는 분명 나쁜 남자지만······. 나를 구원해준, 내가 반해버린 남자이기도 하다. 나는······. 나는 그의 여자가 되고 싶다. 설령 정실이 아니라 측실이라도 좋으니······. 어떤 형태로건 그의 곁에 계속 있고 싶다. 한 명의 여자로서.”
그를 연모한다.
교토에 다녀온 이후, 김덕성을 향한 린의 마음은 눈덩이처럼 계속해서 커져갔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
검도장에서 한 선전포고도 두근거림을 참을 수 없어서 내지른 일종의 도박이었다.
‘거절당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린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린다.
“그렇다면 여자력 수행을 더 열심히 해야겠군요. 아가씨.”
그녀의 귓가에 시녀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린이 고개를 든다.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쥔다.
“여자력 수행······. 그렇다. 앞으로도 진정한 현모양처, 요조숙녀가 될 때까지 잘 부탁하지. 시녀장.”
린은 그렇게 말하며 휴대폰을 켰다.
바탕화면에 있는, 청수사 무대에서 김덕성과 함께 찍은 사진이 비친다.
린이 휴대폰 화면을 쓰다듬는다.
‘기다려라. 김덕성.’
네가 반할 정도로 완벽한 현모양처가 되어줄 테니.
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웃었다.
*
검도장에서의 묘한 분위기 이후에는 별일 없었다.
린과 함께 차를 마시고, 같이 저녁을 먹은 정도.
시간이 끝나자 린은 나를 순순히 보내주었다.
덕분에 나는 늦기 전에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파트너. 오늘도 한 건 했네. 대단하구나.]갑자기 조용해졌던 흑태자는 시노자키 저택을 나서자마자 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한 건은 무슨 한 건이야.’
[아니, 됐다. 아무튼 내 동생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하지 마라.]하여간 팔불출 성격 하고는.
흑태자의 헛소리를 무시하며 기숙사 계단을 오른다.
방문 앞에 도착해서 도어락에 생도 수첩을 찍는다.
삑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린다.
지금쯤이면 아무도 없겠······.
[저 아가씨. 한서진 아니야?]흑태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린다.
탁.
문이 닫힌다.
타닥타닥타닥타닥, 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 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
탁자에서 이상하게 빠른 속도로 노트북 키패드를 두드리며 뭔가 작업하고 있는 한서진의 뒷모습이 보인다.
[뭐하는 거지?]흑태자가 질문한다.
그러게.
나도 궁금해진다.
대체 뭐길래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저렇게 열중하는지.
한번 볼까?
소리 없이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간 순간.
내 눈앞에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기프트까지 쓴 모양인지 회색 섬광이 반짝이는 현란한 손놀림으로 국뽕 너튜브 썸네일을 편집하고 있는 한서진.
뭐야?
그 속 울렁거리는 국뽕 너튜브를 한서진이 편집하고 있었다고?
[이거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서진 양이 저걸 만들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흑태자가 살짝 놀란 목소리로 말한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가끔 보이는 광신적인 눈빛과 지나친 국뽕 때문에 한서진이 정상인이 아닐 거라는 추측은 했었다.
하지만 국뽕 너튜브 운영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야, 너 이게 무슨······.”
“오셨습니까? 김덕성 님.”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서진이 의자에서 일어나 정중히 허리를 숙인다.
평소와 같은 검은 정장 차림.
흔들리지 않는 무표정이 보인다.
“아니······. 그거······.”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당황스럽다.
말문이 막힌다.
내 당혹한 반응에도 한서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아. 영상 제작 말입니까? 이건 제 업무의 일부분입니다. 존경하는 김덕성 님의 활약을 국내에 선전하는 일.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약간의 희열마저 묻어나는 그녀의 말투.
한서진의 회색 눈동자가 알 수 없는 열망으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말문이 막힌다.
흑태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의 말대로 어쩌면 라노벨 히로인보다 더 위험한 인간일지도.
스윽.
한서진이 내 앞으로 다가온다.
그녀의 예쁜 얼굴이 내 시야에 들어온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김덕성 님?”
국뽕 너튜브짓을 들키고도 너무나 당당하고 뻔뻔한 모습.
오히려 이쪽이 당황스럽다.
내가 잘못한 건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이게 그 진짜 광기인가 뭔가 그건가?
“그게······. 그······. 국뽕 너튜브. 네가 전부 만드는 거였나?”
간신히 입을 열어 질문을 던진다.
“전부는 아닙니다. 제가 운영하는 채널은 열세 개 정도. 김덕성 님은 국민 영웅이시기 때문에 제 채널을 제외하더라도 김덕성 님을 주제로 한 영상은 너튜브에 넘쳐납니다.”
한서진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긴, 그거야 그렇겠지.
그런데 그걸 직접 운영하는 사람이 옆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열세 개 씩이나.
“말씀이 나온 김에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