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50)
*
오키나와.
나하 공항 터미널.
냉막한 인상의 핑크 블론드 트윈테일 미소녀가 비행기에서 내려 터미널로 들어선다.
그녀가 입은 교복 가슴팍에 달린, 영어로 ‘에반젤린 스튜어트’라 쓰인 명찰이 흔들린다.
그렇다.
그녀가 바로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왕실의 공주이자 세인트 조지 학원의 학생회장인 에반젤린 스튜어트.
터미널 전경을 본 에반젤린의 핑크색 눈빛이 흔들린다.
“이곳이······. 오키나와.”
그녀의 입에서 영어가 흘러나온다.
“그분께서 곧 도착하실 땅이어요······.”
에반젤린이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두근.
에반젤린의 커다란 가슴 안에 있는 심장이 뛴다.
윌리엄 스튜어트.
매번 학원에서 자신을 무시하고 짓밟았으며, 때로는 음심이 담긴 음흉한 시선으로 보던 남보다 못한 이복동생.
그에게 핍박받던 자신을 구원해준 상대가 바로 김덕성.
온실 속의 화초, 동화책 속의 공주님처럼 자란 에반젤린에게는 김덕성이야말로 백마 탄 왕자님이나 다름없었다.
‘하와와와와······. 어쩌면 좋을까요? 불닭볶은면 못 먹는 여자는 싫어하실까요?’
에반젤린이 분홍색으로 물든 두 뺨을 양손으로 감싸면서 중얼거린다.
한국인은 매운맛.
한국인이라면 불닭볶은면 정도는 즐기면서 먹어줘야 한다.
그런 왜곡된 인터넷 정보에 속아 매일매일 불닭볶은면 한 봉지 먹기를 도전하는 에반젤린였다.
하지만 아직도 그 매운맛은 익숙해지지 못한 상태.
한 봉지는커녕 삼분의 일 봉지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다.
에반젤린은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조금만 더 노력하는 것이와요.”
에반젤린이 비장한 표정으로 각오를 다진다.
그녀의 뒤로 영국 세인트 조지 학원 생도들이 나타난다.
여름 학교까지 단 하루, 24시간도 채 남지 않았을 때 있었던 일이었다.
여름 학교(삽화 有)
여름 학교 당일.
도쿄에서 오키나와까지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나는 A반 생도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여름 학교가 열리는 산호 해변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부우우우우웅.
오키나와 도로 위를 줄지어 달리는 버스.
차창 밖에는 여름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지만, 버스 내부는 에어컨이 켜져 있어서 그런지 시원했다.
“드디어 여름이네.”
“오키나와는 처음인데, 긴장되는걸?”
“수영복 샀어?”
“당연히 샀지. 너는?”
“그게 나는······.”
엑스트라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들어대는 덕분에 버스 내부는 시장통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시끄러웠다.
다들 한창 젊은 나이인데다, 여름에 바닷가를 간다는 사실이 그들을 들뜨게 한 모양.
문득 옛날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시절, 수련회를 갔을 때도 버스 안에서 이렇게 다들 들뜨고 신난 분위기였는데.
대학교 MT도 마찬가지고.
그리운, 하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러나 돌아가야만 하는 원래 세상.
하지만 그날, 프랑스에서 올리비아가 남긴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내가 숨긴 사정을 모두 해결한 뒤에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달라니.’
그럴 수 없다.
내 사정을 해결하는 건, 곧 이 세상을 떠난다는 의미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을 무작정 버릴 수는 없다.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책임져야 할 대상이 많으니까.
엿 같은 미친 라노벨 세상 같으니.
‘전부 책임지는 수밖에 없는 건가.’
[당연히 그래야지. 파트너. 남자라면, 사나이라면, 신사라면. 그래야 하는 거야.]흑태자가 진지한 목소리로 충고한다.
이쪽 세상도 저쪽 세상도.
양쪽 모두 책임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진짜 양방향 차원 게이트라도 뚫어야 하나.
원작에서도 그런 건 안 나왔는데.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하고 있을 그때.
“주인님. 주인님은 수영 좋아해?”
옆자리에 앉은 주황 트윈테일 미소녀, 에리가 말을 건다.
에리는 지금 공항에서 내려 버스에 탑승하기 전, 내 옆자리를 상품으로 내걸고 개최된 가위바위보 대회에서 당당히 승리한 대가로 앉아있는 것.
덕분에 피곤한 꼴 안 보고 차라리 유지와 같이 앉으려던 내 원대한 계획은 장렬히 물거품이 되고야 말았다.
그나저나 수영이라.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
피서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대학교 때 여름 MT가 재밌긴 했다.
계곡에서 물놀이도 하고. 펜션 앞마당에서 삼겹살도 구워 먹고.
그날 밤, 술 먹은 창수가 옆자리에서 자다가 내 머리에 토하지만 않았더라도.
엿 같은 창수 놈.
술만 먹으면 토하고 난리야.
“그런데 난 바다보단 계곡이 더 좋아.”
백사장 그거 보기에만 좋지 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맨발에 모래가 달라붙어서 별로다.
[파트너. 실망이야. 계곡보다는 역시 바다가 낫지 않아? 시원한 바닷바람! 차가운 바닷물! 해변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 거기에 비키니 입은 미녀 아가씨들까지!]흑태자가 머릿속에서 경박한 목소리로 주절댄다.
그렇게 말해도 나는 바다는 별로다.
따가운 햇살로 하는 선탠도 딱히 취향은 아니고.
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달라붙는 소금기도 찝찝하다.
“흐응? 그래? 그래도 이왕 바닷가에 왔으니까. 에리링이랑 같이 수영하고 돌고래 튜브도 타자. 에리링, 주인님이랑 돌고래 튜브 타고 싶어!”
부스럭.
에리가 바람 빠진 돌고래 튜브로 보이는 물건을 흔들며 말한다.
“돌고래 튜브는 모르겠고, 맘대로 해라.”
그래도 오키나와까지 왔는데 몸 한번 안 담글 수는 없지.
“주인님. 약속한 거다?”
에리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 곁에 찰싹 달라붙는다.
그녀가 어깨에 쓸데없이 예쁜 얼굴을 기댄다.
얘가 또 왜 이래.
[캬, 파트너. 호강이야. 호강.]머릿속에서 흑태자가 헛소리한다.
“약속은 무슨.”
누가 돌고래 튜브 같은 거 탄대?
“이봐, 니시자와. 지금 새치기하는 건가? 단둘이 돌고래 튜브라니?”
“맞아. 에리 쨩. 새치기는 반칙이야.”
에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자리에 앉아 있던 린과 마코토가 얼굴을 불쑥 내민다.
“전속 시녀인 이 저의 허락도 없이 누가 함부로 그와 돌고래 튜브를 타라고 했죠, 니시자와 양?”
뒷자리에 홀로 앉아 있던 올리비아까지 가세했을 때.
“에베베베베벱, 메로로로로롱. 에리링은 주인님 옆자리에 주인님이랑 돌고래 튜브 타기로 했어. 주인님이 직접 손가락 걸고 약속했다고!”
“거짓말은 나빠. 에리 쨩. 부우우우우우.”
마코토가 볼을 부풀리며 에리를 노려본다.
쟤는 왜 저렇게 의성어를 입으로 소리내는 거지?
돌겠네, 진짜.
“아까 그런 말 한 적 없는 것,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 빨래판.”
“흥. 그야 당연하지. 젖소. 주인님과 에리링은 이 증표를 통해 서로 마음이 이어진 관계니까 말이야. 너 따위가 에리링과 주인님의 약속을 들을 수 있을 리 없잖아?”
에리가 목에 걸린 개목걸이를 만지면서 린을 노려본다.
요새 좀 사이 좋나 싶더니 또 저런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그리고 저 빌어먹을 개목걸이는 제발 좀 빼달라고 사정 사정을 해도 안 들어주다니 이젠 뭐? 서로 마음이 이어졌다고.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진짜.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시죠. 니시자와 양. 그와 마음이 이어진 사람은 단 한 명, 그의 전속 시녀인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뿐이라고요!”
“무슨 소리지? 보나파르트? 나 역시 그와 마음이라면 몰라도 몸은 이어진 사이다!”
“나, 나도! 나도 주군이랑 이어질 거야!”
에리의 말에 발끈하는 올리비아와 린, 마코토.
마코토의 멘트도 정상은 아니지만, 올리비아와 린의 멘트는 확실히 비정상이다.
몸이 이어져? 전속 시녀?
제발 그만 좀 하면 안 될까?
[파트너. 어떻게 좀 해 봐라. 좀.]머릿속에서 흑태자가 말한다.
어떻게 하기는 뭘 어떻게 해.
“그래도 주인님 옆자리는 은하 제일 미소녀 에리링의 차지야★”
덥석.
에리가 노골적으로 팔짱을 끼면서 윙크하고, 그 모습을 본 세 여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던 순간.
“어, 바다 보이는데?”
“진짜네? 바다야!”
“어디어디?”
주변이 시끌시끌해진다.
엑스트라 한 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버스 내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창문에 달라붙는다.
바다라는 소리를 들은 올리비아, 린, 마코토의 시선이 에리에게서 떠나 창문으로 향한다.
나와 에리의 시선 역시 저절로 바깥으로 향한다.
거기에는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새하얀 모래가 깔린 그림 같은 해변이 있었다.
산호 해변.
오키나와에 있는 일본 최대 해양 침식지이자, 슈오우 영웅 학원의 여름 학교 실습지.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모습 그대로인 원작 6권의 핵심 무대에 마침내 도착했다.
*
쏴아아아아아.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끼룩끼룩하는 갈매기 소리.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까지.
여름 학교에 도착한 생도들은 곧바로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뒤, 별도의 지시가 내려오기 전까지 자유시간을 허락받았다.
파라솔 아래 그늘.
아랫도리에는 사각 수영복을 입고 비치 후드 집업을 상의로 걸친 채로 선베드에 누운 내 시야에 땡볕 아래에서 뛰노는 수영복 차림의 생도들이 보인다.
“주인님. 어때? 에리링의 귀여운 수영복. 마음에 들어? 주인님의 하트, 에리링의 수영복으로 언☆록할 거야!”
내 앞에 달려온 에리가 레이스가 치렁치렁 달린 분홍색 비키니 수영복을 뽐내면서 배시시 웃는다.
하의는 레이스 달린 스커트, 상의는 레이스 비키니.
목에는 여전히 개목걸이를 차고 있다.
아니, 수영복 입는데도 차는 거냐, 개목걸이.
어이가 없네.
“빨래판. 그런 밋밋한 가슴을 가지고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나 있겠느냐? 자고로 거유란 예로부터 모성과 여성성의 상징이었던 법. 여자의 가장 큰 무기인 가슴을 어필할 수 있는 이 나의 수영복이야말로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자, 어떠냐! 김덕성! 이 몸의 최종병기 비키니가!”
옆에는 어느새 달려온 린이 비장한 얼굴로 반투명한 비치 가디건 아래 보이는 남색 비키니를 자랑하며 양팔을 벌리고 있었다.
매번 가슴이 어쩌니 허벅지가 어쩌니 육탄 돌격 운운하는 린답게, 몸매 하나만큼은 다른 히로인을 압도할 정도로 대단한 그녀였는데, 비키니까지 입으니 치트키가 따로 없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피가 들끓을 정도로 지금의 린은 살짝 위험했다.
수영복 하의 아래로 드러나는 매끈하면서 탄탄한 허벅지와 비키니에 감싸인 커다란 가슴까지.
염병, 돌겠네.
“젖소. 그 천박하고 음탕한 지방 덩어리 당장 치워. 에리링의 주인님한테 함부로 달라붙지 마.”
그 모습을 본 에리가 볼을 부풀리며 말한다.
린이 의기양양하게 웃는다.
“흥. 평평하기 짝이 없는 절벽의 질투란. 추하기 짝이 없군.”
“뭐? 젖소. 뭐라 그랬어. 방금.”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가 추하다고 했다. 빨래판.”
“이이이이이이이익!! 음란하기 짝이 없는 젖소 주제에!!”
린과 에리가 언제나처럼 티격태격하고 있던 그때.
“주군. 내 수영복은 어때?”
내 옆으로 마코토가 살포시 나가온다.
연두색 비키니를 입은 마코토.
린과 비견될 정도로 커다란 가슴이 이루고 있는 계곡이 시야에 들어온다.
마코토가 수줍은 듯 튜브 공을 양 팔로 끌어안으며 고개를 숙인다.
애니메이션으로 볼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직접 보니까 정말 돌겠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얼굴이 뜨거워진다.
[어우야. 파트너. 너 진짜 호강하네.]흑태자의 말에 반박할 자신이 없다.
괜히 선글라스를 고쳐 쓰면서 고개를 돌린다.
“······뭐, 그럭저럭 잘 어울리네.”
“정말? 정말이지? 칭찬 고마워! 주군!”
내 말에 마코토가 기뻐하면서 폴짝폴짝 뛴다.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흔들거린다.
제발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봐요, 당신!”
그때.
저 멀리서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벅, 저벅.
백사장의 모래를 사분사분 밟으면서, 올리비아가 의기양양한 발걸음으로 나타난다.
착.
밀짚모자를 쓴 그녀가 한쪽 팔을 하늘로 올리면서 소리친다.
“어떤가요? 이 저의 수영복 패션이. 다른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비교를 불허하지 않나요?”
올리비아가 입은 수영복은 공주님 티라도 내는 듯 프릴이 잔뜩 달린 하얀색 모노키니 수영복.
거기에 가슴골이 드러나게 그쪽 부근이 세로로 푹 파인 홀터넥 타입이다.
진짜 얘네들은 왜 이런 걸 입고 있는 거야.
보기 민망하게.
내가 다 부끄럽다.
내 시선이 그녀의 가슴팍으로 향하자, 올리비아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그녀가 양손으로 가슴을 가리면서 소리친다.
“이 바보! 변태! 어딜 보는 거예요!? 다, 당신을 위해 처, 처음으로 이런 부끄러운 수영복을 입은 거라고요. 가, 감사하세요! 아시겠나요? 제, 제가 당신의 저, 전속 시녀만 아니었어도······.”
횡설수설하는 올리비아.
이러니까 좀 츤데레 같고 그렇네.
편안하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그래서, 누구 수영복이 제일 좋아. 주인님?”
“그렇다. 김덕성.”
“선택해줘, 주군.”
“다, 당연히 당신의 전속 시녀인 이 저겠죠? 그렇죠?”
수영복을 입은 네 여자가 갑자기 내 앞에 서서 또 선택을 강요한다.
프랑스에 이어 또 같은 패턴.
지겹지도 않나?
한숨이 나온다.
[파트너. 당연히 내 동생을 고르겠지?]팔불출 흑태자까지.
아주 난리다, 난리.
입을 열어서 뭐라 하려던 그때.
“다들 비키거라!”
저 멀리서, 익숙한, 하지만 여기 있으면 안 될 목소리가 들린다.
이 목소리는?
[세이라 누님?]이사장인데.
설마 진짜 이사장인가?
정체불명의 목소리를 들은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 몸, 사랑하는 생도들의 여름 학교 참관을 위해 이 자리에 강림했도다!”
촤악.
그녀가 자랑스럽게 한쪽 팔은 가슴 위에 올리고는, 다른 팔을 하늘로 뻗으며 소리친다.
지랄맞게도, 세이라 역시 염병할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보통 수영복이 아니라.
“거기, 그래. 김덕성 생도. 아니 덕성 오빠!”
밀짚모자를 쓴 세이라의 붉은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그녀가 나를 부른다.
그것도 오빠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