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31)
흑태자의 말을 무시하면서 생각을 이어간다.
마에다 신지는 단순하면서 찌질한 삼류 악당.
놈의 행동이 변했다면, 원작과 같은 이유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는 건, 리그의 행동 역시 원작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의미.
문화제 때 침입하는 빌런은 원작 그대로 트릭스터 위치일 확률이 99%다.
트릭스터 위치보다 더 강력한 빌런, EX랭크 빌런이 문화제에 쳐들어온다면, 결계진 준비라는 비용도 많이 들고 복잡하면서 비효율적이기까지 한 방법은 쓰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적이 누구인지는 확실해졌다.
이제 남은 건 최소한의 피해로 테러를 막는 것이다.
나는 원작 주인공처럼 멍청하게 결계 안에서 시간을 소비할 생각이 없다.
협회에 EX랭크 영웅 추가 파견을 요청하는 방법이나, 신지를 지금 고발하는 방법은 사용할 수 없다.
그렇게 했다가는 기존의 계획을 파기한 리그에서 더 강력한 빌런을 추가 파견할 가능성이 높다.
메사이어는 세계구급 악당에다 세계관 최강자 주제에 찌질하게 고작 아카데미에만 집착하는 등신이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문화제를 방해하려고 들 것이다.
따라서 최선의 방법은 구교사에 있는 결계진에 수작을 부려서 작동 불능으로 만드는 것.
결계진을 작동 불능으로 만들면, 신지와 트릭스터 위치 양쪽 모두 아무 피해 없이 원작과 다르게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구교사에 있는 결계진을 아리스 또는 세이라에게 목격하게 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와 세이라.
둘 중 누구를 구교사로 부를까?
‘역시 아리스를 불러야겠어.’
[거 봐, 역시 사이온지 편애하는 거 맞잖아. 파트너.]흑태자가 헛소리한다.
편애는 무슨.
공식적으로 아무 접점도 없는 세이라에게 연락해서 구교사에서 보자고 하는 것보다는, 일단 같은 실행위원회 소속인 아리스에게 연락하는 쪽이 더 낫다.
결코 아리스를 편애해서 이러는 게 아니다.
[내 동생한테도 그렇게 좀 스윗하게 대해 봐. 파트너.]흑태자의 말을 무시하면서 아리스에게 전화를 건다.
뚜르르르, 뚝.
통화 연결음이 이어지다 끊어진다.
[사이온지 아리스입니다. 김덕성 군. 무슨 일 있습니까?]“선배. 지금 혼자 있죠?”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입니까?]아리스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혼자 있다니까 그럼 말해도 될 것 같다.
“내일 구교사에서 저랑 만나죠. 선배랑 저, 둘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고 혼자서 오셔야 합니다. 선배.”
[그건······.]내 말에 말끝을 흐리는 아리스.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아리스가 거절하면 어쩌지?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세이라를 불러야 하나?
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그때.
[······알겠습니다. 김덕성 군. 그럼 내일 실행위원회 회의와 특훈이 전부 끝난 뒤에 구교사에서 뵙도록 하죠.]아리스의 승낙이 통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주먹을 불끈 쥔다.
큰 난관을 넘었다.
“네, 그러도록 하죠. 그럼 선배 좋은 밤 되세요.”
[김덕성 군도 좋은 밤 되시길. 오늘 하루 수고가 많았습니다.]아리스의 저녁 인사를 들으면서 나는 전화를 끊었다.
이제 남은 건 계획대로 행동하는 것뿐이다.
*
슈오우 영웅 학원.
학생회장 공관.
기숙사와는 별개로 마련된 학생회관 전용 숙소.
작은 단독 주택의 모습을 한 공관 내부.
화려한 침대 위, 늘씬한 글래머 몸매가 드러나는 반투명한 네글리제를 입은 아리스가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말하고 있었다.
“김덕성 군도 좋은 밤 되시길. 오늘 하루 수고가 많았습니다.”
뚝.
전화가 끊어진다.
아리스가 가슴 위에 손을 얹는다.
두근, 두근.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뛴다.
화악.
아리스의 얼굴이 붉어진다.
“이, 이이이이거 데, 데데데이트 신청 맞제?!”
아리스의 입에서 칸사이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구교사.
과거에는 슈오우 학원의 본관으로 사용됐으나 지금은 폐쇄된 건물.
구교사는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과 폐쇄된 건물 특유의 음산한 분위기 때문에 담력 시험 장소로 쓰이기도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가장 유명한 용도는 역시 교내 커플 밀회였다.
한때 교칙으로 교내 연애가 금지됐던 시기, 비밀 연애를 나누던 수많은 커플이 구교사에서 이렇고 저렇고 그런 짓들을 벌였다는 전설 때문에 일반 생도의 출입이 금지된 지금까지 구교사는 밀회 장소의 대명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구교사에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단둘이서 보자니!
“으으으으으······.”
아리스가 입술을 깨문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아리스의 머릿속에 엉큼하고 파렴치한 망상들이 스쳐 지나간다.
전화기를 놓은 아리스가 커다란 곰인형, 쿠마쨩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는다.
“내가 미쳤제, 미쳤데이. 이 가스나가 참말로 미쳤데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얘기를 수락한기고. 진짜 미쳤데이.”
아리스가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말한다.
자신의 본모습을 알고도 아무런 태도 변화 없이 대하는 그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연 것은 사실이었다.
그날, 옥상에서의 일과 오늘 협회에서의 일 때문에 그 앞에서는 어느 정도 살짝 가면을 벗을 수 있게 된 아리스였다.
하지만 그래도 아리스는 아직 자신의 연심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적으로 살짝 편한 관계라고는 해도, 그녀는 어디까지나 슈오우의 학생회장.
함부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원래라면 이 제안도 거절해야 했을 터였다.
“하, 하지만 단둘이 있을 수 있는 데라면 개, 개안을지도······.”
옥상에서처럼.
누군가의 시선 없이, 단둘이.
솔직해질 수 있는 장소라면 괜찮을지도.
지금까지 비밀을 지켜온 그라면, 어쩌면 조금쯤은 허락해도······.
“이, 이 가스나가 무신 남사스러운 망상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리스가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으으으으으······.”
그녀는 치밀어오르는 분홍색 감정을 애써 억누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소, 속옷 정도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구교사의 전설처럼 그렇고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얼마 전 샀던 검은색 레이스가 달린, 어른의 승부 속옷을 떠올리던 아리스의 얼굴이 붉어진다.
“으으으으! 김덕서이! 니 내일 두고 보제이!”
아리스가 머릿속에 깃든 파렴치한 상상을 고개를 저어 흩으면서 소리친다.
그렇게 아리스의 분홍색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아리스와 약속을 잡은 나는 곧바로 숙소로 돌아왔다.
“오셨습니까. 김덕성님.”
기숙사에 돌아오자마자 내가 만난 상대는 한서진.
나는 정장을 입은 그녀의 공손한 인사를 받으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가 막 씻으려고 하던 그때.
“김덕성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한서진이 말했다.
보고라니?
내가 뭔가 시킨 일이 있었나?
기억이 안 나는데.
“뭐야?”
“일전에 말씀드린 영상물의 PV가 완성되었습니다.”
영상물?
전에 말한 그 재단의 영상 작업?
한서진이 언급했던 기억은 나는데.
그런데 요즘은 국뽕 너튜브도 PV를 만드나?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스쳐 지나가던 그때.
“지금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한서진의 회색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대한민국의 문화 역량을 총동원한 결과물을.”
뒤이은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뭘 총동원했다고?
대체 뭘 만든 거야?
내가 왜 이런 걸 봐야 하지?
쿡.
한서진이 내게 건넨 태블릿 PC의 재생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영상이 하나 재생된다.
그건 애니메이션이었다.
원작 애니메이션과 비슷하지만, 훨씬 발전된 작화로 그려진 애니메이션.
[니시자와 에리, 그녀의 퇴학 처분은 옳지 않습니다.]그리고 그 애니메이션이 다루고 있는 대상은 나였다.
드르륵.
징계위원회 자리에서 일어나서 에리를 변호하는 나.
[지금부터는 남자가 아닌 여자로 살아도 된다. 마코토.]내 대사를 듣고 얼굴을 붉히는 마코토.
[다른 사람이랑 비교하지 마라. 린. 너는 너라서 좋은 거야.]린에게 느끼한 대사를 치는 나와 고개를 푹 숙이는 린.
[네놈! 감히 내 소중한 선배를 건드리다니! 절대로 용서 못 해!]피투성이로 쓰러진 카스미 선배와, 그녀가 다쳐 분노해서 빌런에게 달려드는 나.
훌륭한 작화로 재현된 애니메이션 속의 내가 대사를 읊을 때마다 각혈할 것만 같다.
내가 이런 오글거리는 대사를 했다고?
진심?
나는 그런 기억 없는데?
아무리 봐도 과도한 윤색 같은데.
대체 저런 대사를 왜 집어넣은 거지?
[올리비아.] [구하러 왔다. 약속대로.]PV는 약혼식 장면에서 나와 올리비아가 등장하는 장면과, 마지막으로 초원에 누워 하늘 위로 손을 뻗는 내 모습으로 끝났다.
PV를 전부 감상했을 때, 내 정신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보기 괴롭다.
미치겠다.
대체 왜 이런 빌어먹을 영상을 만든 거지?
혹시 내 정신 고문 용도인가?
“어떻습니까? 김덕성님. 훌륭한 퀄리티지 않습니까?”
한서진이 내게 묻는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에 드물게 열기가 깃든다.
“대본 검수 및 고증은 요리부 여러분의 협조를 통해 진행됐습니다.”
한서진이 말한다.
내가 한 기억도 없는 말이 왜 적혀 있나 했더니.
그런 거였냐?
기가 찬다.
얘네는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이야, 파트너. 기분 좋겠네. 레이디들이 파트너 얼굴에 금칠을 했어. 아주.]흑태자가 놀리는 것처럼 말한다.
염병.
한숨을 속으로 삼킨다.
아주 날 일본 애니 주인공으로 만들어놨구만.
“어, 어 그래······.”
한서진의 말에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과는 별개로 작화의 퀄리티나 애니메이션의 전반적인 연출은 수준급이었다.
잘 만들기는 했다. 씹덕 기준으로.
그 주인공이 나라서 문제지.
“이번 성웅 김덕성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는 국내 모든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자체 크런치 모드로 참여한 건 물론, 국내 유수의 소설가 및 각본가, 가수, 성우 등 K-POP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문화 역량을 총동원한 결과물입니다.”
한서진이 광기까지 묻어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총동원은 좋은데 왜 이런 걸 만드냐고.
“너튜브에서도 호평입니다.”
탁.
한서진이 태블릿 PC를 터치하자 알록달록한 썸네일이 나타난다.
[“한국이 드디어 해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만이 만들 수 있는 애니메이션! ‘성웅 김덕성’ PV 공개! 전 세계 일제히 경악! “한국은 이미 우리 일본을 뛰어넘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 항복 선언!] [K-POP에 이어 이제는 K-애니메이션으로 세계 정복?! PV 공개만으로 난리 난 자랑스러운 K-애니메이션의 위엄! 일본의 유명 감독마저 탄복한 퀄리티! PV공개로 공포에 휩싸인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 일본 애니의 종말이 다가왔다!] [영국여자 김덕성 PV 리액션 영상! “김덕성님 사랑해요! 2기에는 소녀도 같이 등장하는 거죠? 기대하고 있겠사와요!”]국뽕 너튜브의 화려한 썸네일이 정신을 어지럽힌다.
아니 왜 이런 걸로 국뽕을 빠냐고.
거기에 뭐? 일본 애니 업계 항복 선언?
일본 애니의 종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거기에 영국여자? 에반젤린 얘는 또 왜 같이 끼어서 난리야. 2기? 이런 걸 대체 누가 본다고?
에반젤린의 빨개진 얼굴과 양쪽 눈에 합성된 빨간 하트 문양.
영국여자 썸네일 영상을 차마 클릭하기가 두려웠다.
내가 왜 이런 걸 봐야 하지?
정신이 아득해진다.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는다.
“아, 뭐. 그래.”
이제 와서 엎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때 영상물 작업이라고 했을 때 제대로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래서 이거 어디로 유통하는 건데?”
“이번 슈오우 영웅 학원 문화제와 함께 전국 2000개 상영관에서 동시 개봉할 예정입니다.”
2000개 상영관?
그거 스크린 독점 아니야?
할 말이 없어진다.
스크린 1000개를 넘는 시점에서 세간에는 멀티 플렉스의 스크린 독재니 밀어주기 개봉이니 논란이 일어날 게 분명한데, 이번에는 그런 논란 같은 건 없나?
“예매율은 이미 90%가 돌파했고, 암표가 나돌고 있는 상황입니다.”
뭐?
예매율 90% 돌파에 암표가 돌고 있다고?
머리가 아득해진다.
대체 왜 이런 걸 암표를 사서까지 보려고 하는 거지?
이해가 안 된다.
“반드시 최고의 작품을 만들겠습니다.”
탁.
한서진이 가슴에 손을 대면서 말한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목소리.
더 이상 말할 기운도 없다.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라.”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서진의 대답을 들으면서 나는 머리를 짚었다.
이제 더 생각하는 것도 지친다.
그냥 자야겠다.
*
다음날.
수업을 끝내고, 실행위원회 회의와 특훈까지 끝낸 나는 주변에 걸리지 않도록 동선을 체크하면서 구교사 앞에 왔다.
구교사.
뭐든지 최신식, 최첨단이며 SF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매끈한 미래형 디자인의 건물로 가득한 슈오우 영웅 학원에서 유일하게 낡아빠진 건물.
유령이 나온다는 루머처럼 실제로 음산하게 생기기는 했다.
커플 밀회 장소라는 설정도 붙어 있는데, 덕분에 음지의 최약영웅 에로 동인지에서 자주 배경으로 나오기도 했다.
특히 최약영웅 NTR 동인지 내용 반절 이상이 김덕성이 히로인들의 약점을 잡아서 구교사로 몰래 불러낸 뒤에, 뭐 그런 전개였던 걸로 기억난다.
갑자기 구교사 오니까 쓸데없는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