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51)
회전의자가 멈춘다.
“아리스 양도 그렇게 말했었지. 그가 가장 위험한 역할을 자처하며 모두를 지키겠다고 말했다고.”
김덕성과 독대하기 전, 사이온지 아리스와 나눴던 대화가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자신만큼이나 타인에게도 엄격하기로 유명한 학생회장이 누군가를 칭찬하는 일은 세이라의 기억에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세이라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놈들과 싸우겠다니······.”
모두를 지키기 위해, 배후와 싸우겠다.
생도, 그것도 1학년이 내뱉기에는 터무니없이 무모한 말.
하지만 평범한 영웅 후보생이 내뱉을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상대는 세계를 구원한 다섯 영웅 중 네 명을 직간접적으로 살해한 거대한 흑막.
보통 생도라면 그 실체의 일부만 접해도 전의를 상실할 게 분명할 터.
“그들과의 싸움은······. 어중간한 각오로는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는 이야기······.”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당당하게 그들과 싸우겠다 선언했다.
요시자키 세이라는 김덕성의 눈빛에서 각오를 읽어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이사장 된 자로서 생도 보호 차원에서 원래는 거절해야 마땅한, 말도 안 되는 부탁.
하지만 요시자키 세이라는 어째서인지 수락하고야 말았다.
“역시 닮았구나.”
누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를 지닌 그녀가 평생을 걸쳐 짝사랑했던 남자.
검성 쿠로사와 아키라가.
“그대도 이렇게 무모했었지.”
세이라의 붉은 눈동자에 아련한 감정이 깃든다.
“그대도 사사로운 명성을 탐하지 않았고, 가장 위험한 임무를 자처했으며, 모두를 구하고자 했었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영웅.
그렇기에 파이브 크라운즈의 리더가 될 수 있었던 남자.
30년 전, 세계를 구원한 사내.
우연이 아니다.
거악에 주눅들지 않고 모두를 구하기 위해 당당히 맞서 싸우겠다고 선언한 김덕성의 모습에서 검성이 비친 건.
그래서 허락한 거다.
“이 몸이 40년만 젊었어도······.”
정말로 데이트를 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한 세이라가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이 몸을 잠시나마 진심으로 만들다니 참으로 맹랑한 녀석이로고······.”
세이라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탁자 위에 놓인 말차를 한 모금 머금는다.
떫고 쓴 뒷맛이 입 안에 감돈다.
“에잉. 쓸데없이 신경 쓰이는 꼬마 같으니.”
세이라가 고개를 흔든다.
검성은 죽었다.
아무리 김덕성이 그녀가 사랑했던 검성과 닮았다 하더라도, 그는 검성이 아니다.
이미 죽은 검성이 다시 살아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복수해야한다.
죽은 그를 위해서라도.
그래도 계속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해진다.
촤르륵.
세이라가 검은 레이스 부채를 펼치며 부채질하던 그때.
“이사장님! 실례할게요.”
이사장실 문이 열리며 분홍 머리 미녀, 마유즈미 마유가 들어온다.
“마유즈미 선생? 무슨 일이지?”
“임간학교 조 편성이 끝나서요! 이사장님께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마유즈미 마유가 활기찬 목소리로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세이라의 앞에 흔들린다.
‘그러고 보니 아키라도 큰 가슴을 좋아했었지.’
세이라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본다.
어려진 외견에 걸맞게 빈약한 흉부.
마유즈미의 가슴에 비하면 에베레스트와 동네 뒷산만큼 차이가 심하다.
괜히 심통이 난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 꼬마는 정말 쓸데없는 부분까지 그를 빼닮았구나.”
세이라가 볼을 부풀린다.
“이사장님?”
세이라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마유즈미 마유가 고개를 갸웃한다.
세이라의 얼굴이 붉어진다.
촤르륵.
그녀가 부채로 얼굴을 가린다.
“아무 일도 아니니라. 그나저나 임간학교라. 벌써 때가 그렇게 되었는고.”
“맞아요! 관례대로 마유가 2인 1조로 편성했어요! 이사장님!”
마유즈미의 보고를 들으며 세이라가 서류를 넘긴다.
원칙대로 남생도는 남생도끼리, 여생도는 여생도끼리 짜인 조 편성.
하지만 단 하나, 이질적인 페어가 하나 있다.
[김덕성] [시노자키 린]유일하게 남생도와 여생도가 짝지어진 편성.
세이라의 시선이 거기서 멈춘다.
‘이치로 군이 꼬마한테 눈독을 들였구나.’
그날.
시노자키 린과의 대결에서 김덕성이 이긴 이후, 두 사람이 독대했을 때부터 살짝 수상하기는 했다.
최근 학원에서 시노자키 린이 묘하게 김덕성 주변에 맴돈다는 첩보를 입수하기도 했다.
‘필시 제 여식한테 그 꼬마를 유혹하라 시켰겠지.’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수를 써올 줄이야.
‘이 몸은 관대하니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다.
조금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마유즈미 선생.”
“네, 이사장님! 마유즈미 마유예요!”
“일전의 모형 게이트 테러 사건 때문에 이번 임간학교에서는 생도들의 안전을 우선시하려 하는데, 마유즈미 선생의 생각은 어떻지?”
“마유는 이사장님 의견에 적극 찬성이에요!”
마유즈미 마유가 생글생글 웃는다.
세이라의 붉은 눈빛이 반짝인다.
“좋아. 그럼······. 이 몸이 조 편성을 다시 짜도록 하지. 2인 1조는 불안하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번 임간학교는 특별히 6인 1조가 좋겠어.”
그녀가 펜을 들고 하얀 종이에 이름을 끄적이기 시작한다.
[2조] [김덕성] [쿠로사와 유지] [이시하라 다이키] [니시자와 에리] [시노자키 린]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직접 작성한 조 편성을 보며 세이라가 웃는다.
“여기, 이대로 가도록 하지. 마유즈미 선생.”
“알겠어요! 이사장님!”
세이라가 쓴 서류를 받아든 마유즈미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한 뒤 종종걸음으로 이사장실을 나간다.
덜커덕.
이사장실의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된 세이라의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감돈다.
“자, 그럼 어디 이 기쁜 소식을 이치로 군에게 알려주도록 할까?”
휴대폰을 손에 든 그녀의 손가락이 이치로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
도쿄도.
시노자키 저택 정원.
비단잉어가 헤엄치고 있는 연못가.
어두운 초록빛 유카타를 입고 게다를 신은 초록 머리의 중년인, 시노자키 이치로가 손에 든 물고기 밥을 수면에 흩뿌린다.
먹이가 뿌려지자 형형색색의 비단잉어가 수면으로 올라온다.
“부르셨습니까. 당주님.”
잉어 밥을 주고 있는 이치로의 등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울린다.
이치로가 고개를 돌린다.
거기에는 슈오우 영웅 학원의 교복을 입은 남색 포니테일의 미소녀, 시노자키 린이 있었다.
“오늘 이사장한테 연락을 받았다.”
시노자키 이치로의 우울한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린이 고개를 숙인다.
“······임간학교 조 편성을 변경했다더군.”
린의 몸이 움찔한다.
임간학교.
이치로가 김덕성과 한 조가 되게 힘을 쓸 테니, 반드시 그를 함락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진 행사.
거기에 갑자기 변수가 생겼다니?
“다행히 너와 김덕성이 다른 조가 되지는 않았다.”
“허면······. 어떻게 변경됐다는 말씀이신지······.”
린이 드물게 반문한다.
당주의 명령을 그저 듣기만 하던 때와는 다른 반응.
하지만 이치로는 린의 변화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너구리 이사장이 이번 임간학교는 특별히 6인 1조로 편성할 예정이라더군. 생도들의 안전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이치로의 눈썹이 꿈틀한다.
계획이 어그러지다니.
그럴 가능성이 없다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불쾌하다.
“너는 김덕성,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니시자와 에리, 이시하라 다이키, 그리고······. 쿠로사와 일족의 수치와 같은 조가 되었다.”
무언가 의도가 느껴지는 편성.
전부 그녀와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조원 구성이다.
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일이 조금 복잡해지긴 했지만······. 어쨌건 린. 네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임간학교 기간 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육탄 돌격을 해서라도 김덕성을 네 남자로 만들어라.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반드시.”
이치로의 시선이 린을 향한다.
다른 경쟁자.
그 말에 린의 머릿속에 두 여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다시는 지기 싫은 숙적,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리고 자신에게 감히 ‘근육녀’, ‘가슴에 지방만 가득한 여자’라고 모욕을 준 니시자와 에리.
두 여자에게 지는 건 죽기보다 더 싫었다.
린이 고개를 숙인다.
“알겠습니다. 당주님.”
“좋아.”
이치로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감돈다.
그가 등을 돌리고 손에 들고 있던 잉어 밥을 마저 천천히 연못에 흩뿌린다.
뻐끔, 뻐끔.
비단잉어들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다.
쪼르르르르, 딱.
연못 옆에 있던 시시오도시가 바닥에 부딪치며 소리를 낸다.
*
“안녕하세요! 생도 여러분! 마유즈미 선생님이에요! 음, 그러니까 오늘은 임간학교 조 편성을 선생님이 발표할 거예요!”
HR시간.
귓가에 마유즈미 선생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 옆자리는 아직 비어 있는 상태.
니시자와의 정학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이다.
교실에서도 에리링 어쩌고 했으면 혈압사했을지도 모른다.
‘벌써 임간학교로군.’
임간학교.
원작 2권의 핵심 에피소드.
슈오우 영웅 학원의 임간학교는 홋카이도의 거대 원시림형 침식지, 수해(樹海)에서 일주일 동안 진행되는 행사다.
명목이야 1학년 생도들의 생존 능력 함양이고, 실제로 낮의 이계종 사냥이나 침식지 보물찾기가 점수로 반영되는, 겉보기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서바이벌처럼 보이는 에피소드지만.
일본 라노벨이 다 그렇듯 실상은 캠핑이랑 별 다를 바 없는 일상 이벤트에 가깝다.
임간학교 마지막 날 담력훈련 에피소드에서 터지는 백귀야행 사건만 빼면 말이다.
‘원작에서는 주인공 놈과 시노자키 린이 같은 조였지.’
반사적으로 원작 2권 스토리가 떠오른다.
임간학교의 원칙은 동성 2인 1조.
하지만 예외적으로 주인공은 2권의 타이틀 히로인인 시노자키 린과 같은 조가 된다.
‘거기에는 이치로의 입김이 닿아 있었고.’
이치로는 시노자키 린에게 임간학교 동안 주인공 놈을 불구로 만들라는 섬뜩한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내심 주인공을 좋아하던 시노자키 린은 이치로의 명령 이행을 망설이게 되고, 일주일 동안 주인공과 같이 야영하면서 점차 주인공의 ‘상냥함’에 감화되어버린다.
결국 린은 눈물을 흘리며 사정을 솔직히 고백하며 자책하지만, 호구인 주인공은 상냥하게 린을 용서하고는 품에 끌어안고 다독이면서 소꿉친구와 삐뚤어진 이치로의 마음을 ‘구원’하기로 결심한다는 뻔한 에피소드다.
‘2권 에피소드에는 내가 끼어들 일이 거의 없겠군. 백귀야행 건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그건 그거고.’
린이랑 주인공 사이는 주인공 놈이 알아서 하겠지.
안 그래도 계속 유혹이니 뭐니 걸리적거리던 린이다.
주인공 놈이 구원해줘서 둘이 잘 되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거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내 페어가 누구냐인데, 어차피 동성 2인 1조가 원칙인 이상 이시하라 같은 놈이나 걸리겠지.
그편이 나도 편하다.
‘오랜만에 꿀 좀 빨겠어.’
캠핑은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지긋지긋한 원작 에피소드 개입에서 해방되는 것만으로도 만족이다.
간만에 힐링 좀 해야겠다.
“그럼 선생님이 지금 발표할게요! 얍!”
마유즈미 선생이 리모콘을 누르고, 프리젠테이션 화면이 나타난다.
“뭐야?”
“6인 1조?”
“갑자기 6인 1조야?”
심상치 않은 수군거림이 들린다.
시야가 황급히 화면으로 향한다.
거기에는.
[2조] [김덕성] [쿠로사와 유지] [이시하라 다이키] [니시자와 에리] [시노자키 린]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조원 편성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조원 구성도 가관이다.
올리비아랑 이시하라는 이 중에서는 선녀다. 시키는 대로 일도 잘하니까.
니시자와 에리는 싫지만, 그것도 그렇다 치자.
임간학교에서 제일 엮이기 싫은 주인공 놈과 시노자키 린이 같은 조라니.
“지랄 났네.”
힐링의 꿈이 저편으로 날아가는 순간이다.
입에서 한국어로 욕이 튀어나온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감도 안 잡히던 바로 그때.
우웅.
스마트폰이 울린다.
[이 몸이 특별히 준비한 선물은 잘 받았느냐? 꼬마야. ≧ω≦]이사장의 메시지를 본 순간.
나는 이 일을 누가 저지른 건지 비로소 깨달았다.
한국어가 다시 한 번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이런 미친······.”
요시자키 세이라.
이 노망난 할망구가 진짜.
준비는 끝났다
도쿄. 오다이바.
슈오우 영웅 학원과 마찬가지로 도쿄만 인공섬에 세워진 상업지구.
유리카모메 경전철과 레인보우 브릿지, 도쿄 빅 사이트, 자유의 여신상으로 유명한 오다이바는 슈오우 학원과 가까운 거리 때문에 생도들이 가장 많이 찾는 번화가이기도 하다.
덕분에 나는 빌어먹을 조원들과 함께 오다이바의 쇼핑몰, 도쿄 플라자에 끌려 오게 됐다.
임간학교 준비 때문이다.
‘하필 토요일에, 쉬어야 하는 시간인데.’
원작 2권에서는 린과 유지의 데이트처럼 묘사되던 임간학교 준비 쇼핑 이벤트.
하지만 6인 1조가 된 지금은 원작과는 다르게 단체 쇼핑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쇼핑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살 것만 딱 사서 나오면 되지, 대체 왜 그렇게 돌아다니는지.
물론 엄마가 아픈 뒤부터는 그런 쇼핑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괜히 기분이 꿀꿀해진다.
“도착했습니다.”
한서진의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나와 일행이 타고 있던 중형버스가 주차장에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