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81)
속옷을 안 입어?
이게 지금 교토 시내 한복판에서 할 소리냐?
사람들 다 보잖아. 쪽팔리게 진짜.
누가 라노벨 히로인 아니랄까 봐, 서슴없이 저런 얘기 내뱉는거 봐라.
“그, 그건······.”
린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척.
그녀가 다시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 아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김덕성, 오직 너 앞에서뿐이다. 나는 김덕성 한정 변태니까 말이다! 몸가짐이 헤픈 여자는 절대 아니니 착각하지 말도록!”
뭐?
누구 한정 변태?
머리가 다시 아프다.
“어머, 요즘 젊은이들은 뜨겁네요. 길거리에서 대놓고 공개 고백이라니.”
“이런 게 청춘이지.”
“호호호. 저도 한때는 그이와 저런 때가 있었죠.”
주변에서 들리는 염병할 엑스트라 반응.
“알았으니까 쓸데없이 나불거리지 말고 청수사나 안내해.”
이젠 일일이 반박하는 거도 지친다.
어차피 내가 말해봤자 귓등으로도 안 들을 테고.
이 미친 세상에 빙의한 지도 거의 반년.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나는 깨달았다.
빌어먹을 라노벨 인물들의 리액션 폭주와 엿 같은 편의주의 세계관은 나 따위가 어떻게 한다고 멈춰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옛 명언처럼 피할 수 없으면 즐길 수도 있겠지만, 즐기기에는 그건 좀 너무 그렇다.
어쨌건 참는 수밖에는 없다.
“흠. 교토에 오면 당연히 청수사에 들러야 하는 법. 좋은 선택이다. 김덕성. 내가 책임지고 안내해주지!”
툭툭.
자신 있게 기모노에 싸인 커다란 가슴을 두드리는 린.
그녀와 함께 버스를 타고 교토를 대표하는 관광지, 청수사로 향한다.
버스를 타고 내린 곳은 기요미즈마치라는 곳.
교토를 상징하는 관광지라 그런지 평일 낮인데도 수많은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거리가 보인다.
린과 함께 거리를 걷자 경사로 양쪽에 일본 전통 양식 건물로 가득 찬 상점가가 펼쳐진다.
“여기가 청수사로 향하는 입구인 산넨자카다. 산넨자카에서 넘어지면 3년, 니넨자카에서 넘어지면 2년 안에 죽는다는 속설이 있지.”
린이 쓸데없이 해설을 덧붙인다.
산넨자카라.
여러 애니메이션에서 몇 번 본 기억이 난다.
“거 참 살벌한 속설이네.”
삼년고개도 아니고.
산넨자카 주변을 둘러보자 기모노를 입은 관광객들이 꽤 많다.
기모노 렌탈샵까지 보일 정도.
시내에서는 눈에 확 띄던 린의 기모노 차림도, 기모노를 입은 관광객들이 워낙 많으니 평범한 수준이다.
“여기서 파는 말차 아이스크림이 꽤 맛있지. 하나 사주마. 김덕성. 후훗. 미래 아내의 내조다. 감사히 받도록.”
유난히 들뜬 린이 쓸데없는 소리와 함께 건넨 초록빛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산넨자카를 걷는다
일본 전통 건물로 가득 찬 거리는 꽤 운치 있는 장소였다.
관광객 무리만 아니면 더 예쁜 풍경이 나왔을지도 모르겠는데.
찰칵.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으면서 산넨자카를 걸어 올라가자 청수사 입구가 보인다.
빨간 단청이 칠해진 제법 화려해 보이는 청수사 정문. 산넨자카와 마찬가지로 참배객이 북적댄다.
“사람 너무 많은데. 자칫하면 길을 잃을지도.”
“유명한 관광지라 그런 모양이군. 김덕성. 길을 잃는 게 두렵다면 내 손을 잡는 게 어떤가?”
린이 손을 내민다.
파란 기모노 자락이 바람을 맞아 펄럭인다.
또 개수작 부리는 거 봐라.
“너 내가 손 안 잡으면 또 안 움직일 거지?”
“무, 물론. 맹세코 전혀 그런 흑심을 품은 적 없다! 하지만 이, 이렇게 많은 인파 속에서 자칫하다 너, 너를 놓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허둥지둥하며 얼굴을 붉히는 린.
“큿······.”
당황한 모양인지 입술을 깨문다.
“그래, 잡자. 잡아.”
이대로 있다가는 이 자리에 망부석처럼 박혀서 안 움직일 게 분명하다.
임간학교 때처럼 말이다.
덥석.
린의 손을 잡고 이끈다.
“으으으으······.”
린이 앓는 소리를 내며 내 뒤로 따라붙는다.
“뭐해? 가이드 해준다며?”
청수사는 애니메이션, 만화, 라노벨에 수없이 등장하는 명소.
일본에 와본 적 없는 나지만, 대충 청수사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다.
“아, 알겠다! 그럼 우선 청수사의 명물인 태내순례부터 하러 가자!”
“태내순례? 그게 뭐냐? 처음 듣는데? 또 이상한 건 아니지?”
전적이 전적이다 보니 의심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내 말을 들은 린이 당황한다.
“아, 아니다. 이, 이건 청수사에 오면 꼭 해야 한다고 가이드북에도 적혀 있었······. 흡!”
손을 내저으며 가이드북을 언급하다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는 린.
그럼 그렇지.
“알았으니까 안내나 해.”
가이드북에 적혀 있다면 이상한 데는 아니겠지.
“조, 좋다. 나만 믿고 따라와라!”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나를 이끄는 린.
그녀와 함께 입구를 지나치자 소원이 적힌 나무판이 잔뜩 걸린 풍경이 보인다.
발걸음을 멈춘다.
소원이라.
종교 같은 건 안 믿지만, 일단 내가 이 빌어먹을 세상에 떨어진 걸 보면 신 혹은 그에 준하는 초월적 존재가 있는 건 확실하다.
“왜 그렇게 소원판을 보고 있지. 혹시 소원을 빌고 싶은 건가?”
“아니······. 이런 거 다 미신이잖아. 누가 믿는다고.”
그래.
안 믿는다.
하지만 자꾸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불가항력으로 떨어진 빌어먹을 미친 세상.
알 수 없는 가족과 원래 세상의 소식.
미신이라도 혹시? 하는 게 사람 마음이긴 하다.
“청수사에 와서 나무판에 소원을 적는 것도 훌륭한 관광 코스라고 가이드북에 나와 있었다. 내가 돈을 낼 테니 가자.”
이제는 가이드북 얘기를 숨길 생각도 안 하는 린.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 나무판을 받아든다.
“소원판을 적는 것도 꽤 오랜만이군.”
린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펜을 든다.
내가 빌 소원은 하나밖에 없다.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한글로 적은 소원판을 봉납한다.
바람이 불어오며 내가 적은 소원판이 걸려 있던 다른 소원판과 부딪힌다.
신이 진짜 있는 건지 없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부모님이 걱정되기도 하고, 이 미친 라노벨 세상에 익숙해지는 건 무서우니까.
이게 씹덕 타락인가?
아무리 역함에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가끔 튀어나오는 새로운 패턴의 역겨움을 보면 손발이 떨리고 얼굴이 뜨거워진다.
린이 봉납한 소원판을 흘깃 보려던 그때.
“보, 보지 마라. 부, 부끄러우니까······.”
린이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소원판을 등 뒤로 감춘다.
유치하기는.
“알았으니까 빨리 봉납하고 그 태내순례인지 뭔지 가자.”
볼 생각도 없다.
린의 소원판에 관심을 끈다.
“아, 알았다······.”
린의 소원판 봉납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태내순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건 지하 공간에 구축된 암흑 미로를 통과하는 일종의 순례 의식이었다.
말 그대로 암흑 속에서 더듬더듬 벽을 찾아 출구로 나오면 끝인 그것뿐인 간단한 의식.
입장료는 100엔씩이나 했다.
문제는.
“기, 김덕성! 아, 앞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 무섭다! 도, 도와다오!”
덥석.
다짜고짜 내게 무섭다고 발연기를 해대며 달라붙는 린이었다.
“아. 좀 왜 이래. 걸리적거리게. 너 안 무서워하는 거 다 알거든?”
자꾸 달라붙는 린을 조심스럽게 떼어낸다.
올리비아라면 몰라도 린은 담력훈련 때도 멀쩡히 버티는 거 다 봤는데.
이제 와서 이런 어설픈 연기라니.
진짜 자괴감 안 드나?
“도와다······. 헛? 흐잇?!”
콰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넘어지는 린.
“큿······. 김덕성······. 미안하지만 진짜 도와다오······. 발목이······.”
뒤이어 들려오는 풀죽은 목소리.
발연기를 하다 결국 사고를 친 모양이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린.”
“큿···. 미안하다···.”
물기가 묻어나는 목소리.
뭘 또 우냐. 네가 다 잘못한 건데.
기프트를 사용한다.
어두컴컴한 지하가 대낮처럼 밝아진다.
멀지 않은 벽에 기대 있는 기모노 차림의 린.
발목을 삐었는지 살짝 부은 상태.
“김덕성······.”
눈가에 물방울을 달고 있는 린의 모습이 보인다.
초인이 고작 이 정도로 발목을 다치나, 라고 하기에는 원작에서도 히로인들이 이런 식으로 발목을 삐어서 부축하거나 업어주는 장면이 심심하면 나온다.
빌어먹을 라노벨적 이벤트 발생용 편의주의 설정에 내가 당할 줄이야.
어이가 없다.
이래서 이 세상이 무섭다는 거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라노벨 세계 같으니.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킨다.
“야, 기대. 하여간 니시자와도 그렇고 짐 덩어리 수준하고는.”
“큿······.”
린이 입술을 깨문다.
그녀를 부축한다.
쓸데없이 큰 그녀의 가슴이 자꾸 팔뚝에 닿는 건 무시한다.
린과 함께 태내순례에서 빠져나온다.
“이제 좀 살 거 같네.”
기프트가 있다고 해도 어둠 속은 답답하다.
“다음부터는 헛짓거리 좀 하지 마라. 주변 사람이 고생하니까. 울지도 좀 말고. 쪽팔려. 뭘 잘했다고 우냐?”
“아, 알았다······.”
린이 황급히 기모노 소매로 눈물을 닦아낸다.
아직 눈시울이 붉은 그녀가 갑자기 내 곁에 다가와 팔짱을 낀다.
뭉클.
부드러운 질량감이 내 팔뚝에서 느껴진다.
“뭐 하는 짓이야?”
“나, 나는 다치지 않았나······. 이 상태가 도, 돌아다니기 편할 거 같아서······.”
더듬거리며 핑계를 덧붙이는 린.
“맘대로 해라.”
이러려고 고의로 다친 거 아닐까 의심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
어휴.
저 염병할 꼴을 더 안 보기 위해서라도, 일단 응급처치부터 해야겠다.
린을 팔짱으로 부축하면서 인적 드문 벤치에 옮겨 앉힌다.
“다친 발 좀 올려봐.”
“발······? 호, 혹시 그쪽에 취향이 있는 건가? 모름지기 아내라면 남편의 모든 취향을 수용해야 하는 법. 좋다. 너를 위해서라면 발로 하는 행위라도 얼마든지······.”
“한 번만 더 헛소리하면 그냥 버리고 간다.”
발로 하긴 뭘 해.
사람 짜증나게.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말을 던지고 싶나.
이해가 안 되네.
“아, 알았다······.”
린이 다친 발을 벤치 위에 올린다.
그녀의 쪼리와 버선을 벗기자, 쪼리 때문인지 까진 엄지발가락 사이와 부은 발목이 나타난다.
상태 봐라.
이러다가 진짜 주인공 놈처럼 얘 업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럴 수는 없지.’
저 무거운 여자를? 내가? 계속 업고?
그건 절대 사양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약 사올 테니까 여기 좀 앉아서 대기하고 있어라.”
“야, 약? 나, 나를 위해서 말인가?”
“네가 아니라 날 위해서니까 착각 좀 하지 말고. 간다.”
니시자와도 그렇고.
관광하러 왔더니 어째 뒤치다꺼리 하는 일만 는 기분이다.
*
청수사 벤치.
홀로 남겨진 린이 입술을 깨문다.
“큿······.”
조급했다.
아무리 여자력이 낮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가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더 급해졌던 걸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을 아직 얻지도 못한 린이건만, 연적이자 라이벌인 올리비아는 이미 저만치 앞서가 있었으니까.
후발 주자가 선두 주자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무리수를 쓸 수밖에 없다.
기모노를 입은 것도, 속옷을 입지 않은 것도, 태내순례에서 주접을 떤 것도, 라이벌인 니시자와와 이번만큼은 김덕성을 공유하기로 밀약을 맺은 것도 전부 그녀가 둔 무리수의 일환.
‘내가 내세울 거라고는 몸뚱이뿐이니까.’
문제는 너무 조급했다는 것.
“실수했다······.”
조급한 마음은 실수를 불러왔다.
태내순례에서 주접을 떨다 그만 발목을 접질러버린 거다.
“짐이 되어버리고 말았어······.”
린이 입술을 깨문다.
짐이 되어서 그에게 미움받기 싫다.
그는 약을 사러 간다고 했지만, 자신이 싫어서 사라진 거라면? 어쩌지?
린의 머릿속에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 들어찼다.
가문의 도구에서 해방되었다고는 하나, 학대당한 세월의 상흔은 아직 그녀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낮은 자존감도, 자격지심도, 열등감도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린은 쉽게 부정적인 상상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린이 눈을 질끈 감는다.
“아, 안 돼! 가면 안 된다! 김덕성!”
그것만큼은 안 된다.
“아, 아직 알몸으로 네 침대를 덥히지도 못했는데······!”
린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흐른다.
보내기 싫다.
미움받기 싫다.
문득 아까 적었던 소원판 내용이 떠오른다.
[그의 곁에 있고 싶다.]옆에 있고 싶다.
정실이 아닌 첩실이라도 좋으니······.
“어딜 뭘로 덥혀?”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린이 눈을 뜬다.
“김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