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and actress RAW novel - Chapter 52
52. 한 수 배웠습니다
는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잃은 기억을 하나둘 되찾아가며, 기억을 잃은 동안 형성된 자아와 갈등을 벌이는 내용에 중점을 맞춘 스릴러 드라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감정 연기.
물론 어느 배역이 감정 연기가 안 중요하겠냐만.
1인 2역을 연기해야 하는 ‘이다한’ 배역은 특히 중요하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아무리 라이징 스타라도 원숙한 배우들도 거리끼는 저런 배역을 해낼 수 있을까-
의문 섞인 시선을 보냈지만.
“제, 제가 연기를 했다고요? 정말로요? 아, 그, 그럴 리가 없어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이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금까지 사이코패스 연기하던 사람 맞나 싶은데.”
바로 앞 씬에서 소름 끼치는 미소와 잔혹한 분위기를 뿜어내며 사이코패스 연기를 펼치던 도윤은 지금, ‘기억을 잃은 톱스타’를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리둥절하고도 억울하단 얼굴로.
“그, 그게 뭔데요? 제가 그러니까 이제 저기 카메라 앞에 가서 연기를 해야 한다고요?”
“다한아,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어제 대본도 봤잖아. 그냥 응? 가서 한 번만 해봐. 촬영 지금 이렇게 중단되면 큰일 나. 벌써 방영도 시작했는데. 제발, 부탁 좀 하자. 응?”
그리고 그 앞에서 사정하듯 이야기하는 매니저 ‘유성’의 모습에 결국 마음이 약해져 고개를 끄덕이는 ‘이다한’.
“아, 알겠어요. 해볼게요.”
정말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고.
왜 자신이 톱스타로 불리는지도 알 수 없지만.
일단 분위기가 ‘이다한’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이다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로 이미 방영까지 시작한 드라마는 거의 한 달이나 올스톱 상태였으니까.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그리고 카메라 앞에 선 채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이다한’.
작중 ‘이다한’이 맡은 배역은 범죄 이력이 있으나 새 삶을 꿈꾸는 남자.
하지만 여전히 어두운 과거를 떨쳐내지 못한 채, 자꾸만 자신의 앞길을 막는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게 바로 지금의 장면이었다.
“침착하자, 침착. 후우.”
‘이다한’은 며칠 전부터 ‘유성’이 거의 억지로 보게 만든 대본의 내용을 천천히 떠올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다한’의 표정이 순간 꿈틀거린다.
“왜 저래?”
촬영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장비의 전선을 보자, 순간 눈빛이 변한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어떤 장면을 떠오른다.
한 남자가 줄에 묶인 채.
자신 앞에서 공포에 떨던 장면.
‘뭐지?’
“자, 슛 들어갑니다! 이다한 배우님! 오랜만에 복귀했다고 떠는 거 아니죠? 하하하.”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시작된 촬영.
그런데 방금까지도 낯선 분위기에 떨던 ‘이다한’은, 카메라가 돌아간 그 순간.
“더럽게 치사하네, 진짜. 하, 엿 같은 세상. 내가 뭐 나와서 또 사람 쳤냐? 근데 왜 안 알아주는 건데!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갑자기 신들린 사람처럼 대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본 순간.
‘이거지. 이거였어!’
PD 재훈은 흥분에 몸을 떨었다.
사이코패스 살인마 ‘이다한’.
기억을 잃은 톱스타 ‘이다한’.
작품 내에서 연기를 펼치는 ‘이다한’.
도윤은 지금 혼자서 세 개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느낄 수 있었다.
도윤이 저 고작 몇 줄짜리 대사만 하고 다시 쓰일 일이 없는 저 작품 내 배역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여하튼.
괜히 뜨는 배우가 아니라는 증거.
“컷! 좋습니다! 오케이! 최 배우, 완벽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독님.”
언제나 예의가 바른 건 덤.
그 덕분일까.
주연 배우가 이러고 있으니 다른 배우들도 더 깍듯하게 행동하는 것 같았다.
‘이제 다음은…….’
그사이 도윤은 지치지도 않는지 곧장 다음에 촬영할 씬 내용을 떠올렸다.
그리고 상대 배우가 승원이라는 사실에 묘한 미소를 띤다.
이승원.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 배우.
이유야 뭐.
승원이 도윤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유나에게 듣기로-
‘극단 출신이 아니면 인정을 안 한다던데.’
아마 나름의 이유가 있긴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거야 그쪽 사정.
도윤에게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애써서 마음을 돌리거나 꼬리를 흔들 생각은 없었다.
배우는 연기로 말하는 것.
배우가 극단에서 뛰었든 뮤지컬을 했든 그건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어차피 대중들은 연기로 평가할 테니까.
그래서-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승원이 인사를 받아주든 말든.
자기 할 일에만 충실했다.
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도윤의 시선은 대본에 고정된 채다.
덕분에 이를 바라보던 승원은.
‘그래, 해보자. 보여줄게.’
더욱 승부욕을 불태우기에 이르렀다.
극단.
그곳에서 보냈던 인내의 시간.
그리고 극단을 나와 올라서기 위해 발버둥 쳤던 시간.
그 시간을 합치면-
여기 있는, 괴물이라 불리는 배우에게 전혀 밀릴 게 없다고 생각했다.
승원은 증명할 생각이었다.
도윤을 연기로 눌러 자신의 가치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하지만 승원은…….
도윤이 자신이 노력한 것 이상의 시간을 기다려왔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자, 슛 들어가겠습니다. 레디…… 액션!”
이런 가운데, 촬영이 시작되었고.
“어이구, 이거 영광입니다. 톱스타 ‘이다한’ 씨를 제가 다 보고. 참, 우리 딸내미가 ‘이다한’ 씨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혹시 사인 한 장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어, 그…… 무, 물론이죠.”
“근데 말입니다. 혹시 4월 20일 밤에 뭐 하신 거 있으십니까?”
“네? 갑자기 무슨…….”
“이상하더라구요. 제가 직업이 형사인지라 뭐를 좀 조사하는데, CCTV에 우리 톱스타 ‘이다한’ 씨 얼굴이 보이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냥. 궁금해서요. 그날 사인회 하신다던 ‘이다한’ 씨가 왜 거기 있나 해서. 아, 다른 사람인가? 그러면 죄송하고.”
승원은 준비한 대로 긴 대사를 막힘없이 쏟아내며 눈앞의 ‘이다한’을 압박했다.
정확히는.
‘이다한을 연기하는 최도윤’을 압박했다.
현재 촬영되는 씬은 2화 중간, 사건 해결을 위해 CCTV를 돌려보던 ‘최형식’이 이상함을 느끼고 ‘이다한’을 우연을 가장해 찾아와 떠보는 장면.
그러나 기억을 잃은 ‘이다한’은 아는 게 없으니 당연히 당황하며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최형식’은 더욱 ‘이다한’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근데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리시나. 혹시, 어디 불편해요?”
“그건 아닌데…… 저, 저한테 궁금한 게 있으신 거죠?”
“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최형식’을 연기하는 승원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마치.
도윤이 자신에게 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다한’은 분명히 ‘최형식’에게 겁을 먹고 벌벌 떨고 있었지만.
‘이다한을 연기하는 최도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자, 자꾸 이러시면 매니저 부르겠습니다! 저,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뭔데요!”
기억을 잃고,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압박하는 형사의 모습에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연기를 실감 나게 펼쳐내며 주변의 호흡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승원은 당황했다.
자신의 생각은 이게 아니었다.
마침 씬도 자신이 맡은 ‘최형식’이 ‘이다한’을 매섭게 압박하는 장면이겠다.
이참에 제대로 연기를 보여주자는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지금은 도윤의 연기에 자신이 말려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뭔가 숨기는 건 아니고? 이봐요. ‘이다한’ 씨. 거기 골목에서 왜 나온 건데? 응? 얼굴이 좀 애매하긴 해도 딱 당신 같았거든. 말해봐. 내가 오늘 여기 몰래 숨어든 고생값은 하고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엉? 대답해!”
승원은 본래 주문받은 것보다 훨씬 더 목소리를 높여 연기하고야 말았고.
“컷! 오케이! 이야. 느낌 좋은데? 이승원 배우. 앞으로 지금처럼 감정 좀 더 격하게 가봅시다. 끈질긴 형사 느낌 제대로네!”
이상하게도.
PD의 칭찬을 받았다.
‘어?’
승원은 당황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승원은 정해진 연기만 하는 타입이다.
물론 그렇다고 딱딱하게 대본만 보는 스타일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PD와 작가의 의도에 충실하게 대사를 친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도윤 때문에.
그리고 심지어-
‘칭찬을 받았어?’
PD가 흡족해한다.
“딱 원하는 만큼만 하는 느낌이었는데, 오늘은 좀 더 보여주네. 좋다, 좋아. 그 느낌 잘 살려주세요. 이승원 배우, 좀 더 원하는 대로 날뛰어도 되니까 마음껏 해봐요!”
승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곧장 도윤의 표정을 살폈다.
놀랍도록 무심하다.
방금까지 벌벌 떨던 연기를 펼치던 녀석이 맞는 건지 의심될 정도로.
심지어는 거구의 매니저가 건넨 커피를 한잔 받아 마시더니 대뜸 인상을 찌푸리기까지.
“이건 또 뭐냐?”
“도라떼 2호요. 제가 개발해 봤습니다. 형, 광고 또 찍으셔야죠.”
“너 나 무섭다고 안 했냐?”
“하루 지나니까 괜찮아지던데요.”
“3초 준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느낌이 든다.
일단 승원은 방금 도윤과 연기하며 평소보다 훨씬 더 들끓었던 감정을 떠올렸다.
PD의 흡족한 반응을 이끌어 낸 그 감정을 말이다.
물론 그게 도윤 덕분이라는 인정은 하지 않았다.
아니, 아직 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보고, 그게 진짜였다고 느끼기 전까지는.
“자, 바로 다음 씬 슛 들어가겠습니다! 레디…… 액션!”
그래서 승원은 어디 한번 진짜인지 보자는 심산으로 다시 ‘이다한’에게 다가갔다.
“왜. 쫄았어? 뭐가 기억나는 거라도 있어? 그래. 4월 20일. 잘 기억 좀 해봐. 아니면 다른 날짜 말해줄까? 내가 다 기억하거든.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세상에, 증거가 없대. 사람이 죽었는데. 여기 대한민국이야.”
그래.
이 나라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증거 하나 없는 게 말이 안 된다.
심지어 밀실도 아니고 야외다.
그래서, ‘최형식’은 미친 듯이 증거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하나 찾아냈다.
‘이다한’과 관련된 증거를.
“근데 이게 웬걸, 증거가 나왔는데 그게 ‘이다한’ 씨가 찍힌 CCTV네?”
“저, 전 정말 모른다니까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대답해! 4월 20일 밤 11시 40분! 그때 뭐 했냐고!”
그리고 쏟아낸 대사에 승원은 스스로 전율하고야 말았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자신이 방금 연기를 펼치고도 믿기지 않는 경우.
지금이 딱 그랬다.
모든 게 완벽한 이 느낌.
‘인생 연기’가 될 것 같은 예감.
“이봐요! 당신 누구야! 어디서 왔어! 보안팀! 보안팀!”
“다한 오빠!”
때문에 승원은 매니저와 코디가 달려오고, 하는 수 없이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다한’을 끝까지 노려보는 ‘최형식’을 완벽 그 이상으로 연기해 냈고.
“아주 좋습니다! 오케이! 캬. 오늘 무슨 날인가? 둘 다 NG가 없어요. 연기도 죽이고!”
다시 한번 PD의 찬사를 끌어냈다.
그리고 승원은 일순 멍해졌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감탄 어린 시선들.
물론 승원은 좋은 배우다.
노력도 했고, 실력도 있고, 비주얼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런 느낌은 난생처음이다.
뭔가.
새로운 길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이건…….’
옅은 흥분이 몸을 흔드는 사이 승원은 도윤을 바라봤다.
싫어도 인정해야 했다.
방금 그 연기는.
상대역 도윤 덕분에 완성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불쾌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바로 앞에 있는 녀석이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극단 출신’도 아니면서 승승장구하는 배우였음에도.
그렇게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승원이 갈피를 못 잡던,
그때였다.
“선배님.”
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수 배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칭찬이 뒤섞인 목소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