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68
화장하면 인상과 분위기가 쉽게 바뀌는 만큼, 양극에 있는 이미지를 사용해 외적인 부분을 표현할 수도 있다.
해조와 오민재가 동일인물이란 사실을 뻔히 아는 팬들이 쉽게 인정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관객들을 속인 경험이 많으니 이번 도전도 쉬울 것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당사자인 태화는 고민이 많았다.
‘근데 해조와 오민재는 같은 현장에 나타난 적 없잖아. 카메라 밖에서도 그 긴장감을 쭉 유지하는 건 어렵고.’
1, 2 주 정도의 짧은 기간이라면 그 방법이 가장 확실했으리라.
하지만 영화 촬영이 고작 한 달일 리 없었고, 블록버스터로 화려한 액션과 스케일이 돋보이는 만큼 ‘협력자들’을 찍을 때와 마찬가지로 6개월 이상의 대장정이 될 가능성이 컸다.
‘거짓말이 늘고 길어지면 꼬리가 잡히는 법이야.’
거짓은 진실 속에 섞었을 때, 가장 완벽하게 모습을 감춘다.
또한 거짓은 거짓을 부르기 때문에, 처음 선보일 진실의 크기는 최대한 커야 했다.
그런 이유로, 태화는 장기간의 싸움에 자신의 민낯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그건 아니지.”
물론 생각만 했을 뿐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태화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나래는 한쪽은 화장으로 꾸미고 다른 한쪽은 그대로 둔다는 의견에 반대했다.
“누나, 이 방법이 가장 안전한데요?”
좋은 생각이라고만 여겼지 반대에 부딪칠 거라곤 예상하지 못해서,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월급 주고받는 관계인만큼 고하(高下)를 강조한다면 밀고 나가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앞으로도 쭉 일해야 하는 사이를 그런 식으로 어그러트리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인간이 하는 일이니 둘 다 화장으로 바꾸다 보면 실수할 수 있어요.”
“배우가 거의 맨얼굴로 돌아다니는 게 더 수상해!”
“그, 아예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비비크림 정도는 바를 생각인데요······.”
태화도 집에서처럼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맨얼굴로 돌아다닐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최대한, 꾸밈없는 모습을 하려 했을 뿐이다.
‘근데 나, 피부도 괜찮고 동안이라서 비비 같은 거 바르지 않아도 괜찮지 않나?’
누가 들으면 참 재수 없다고 여길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며 태화는 나래를 응시했다.
여전히 단호한 얼굴을 한 그녀는 쉽게 설득될 기미가 안 보였다.
“루이나 해조처럼 풀 메이크업을 하란 소리가 아니야. 넌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확 바뀌니까, 그런 이점을 쉽게 버리지 말란 의미지.”
나래는 나래대로 답답했다.
태화의 외모는 쉽사리 흉내 낼 수 없는 강점이다.
모든 걸 다 보이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내보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에서 강점을 포기한다는 것은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지양해야 마땅했다.
“그리고 네가 잊은 게 하나 있는데 이 영화는 한국 관객들도 볼 거야. 네가 거의 화장 하지 않고 나오면 그 순간 눈치챌 걸?”
그는 언제나 화장을 하고 촬영에 임했다.
심지어 ‘겨울나기’의 오현수를 연기할 때조차 담담하고 딱딱한 인상을 위해 가벼운 변화를 줬었다.
화장을 통해 120프로를 보여줄 수 있는데, 굳이 100퍼센트만 보여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본적인 화장을 잊지 않던 배우가 기껏 합격한 영화에서 평소와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그에게 관심 있는 이들은 곧 이상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몇몇은 그가 ‘다른 역할’을 위해 자신을 숨기고 있다는 걸 깨달을 게 분명했다.
“배우라는 또 다른 관객이 생겨서 신이 난 것 같은데, 네가 속여야 할 것은 배우뿐이 아니야.”
나래는 새로운 도전에 철없이 구는 태화를 바라봤다.
한 가지에 미치는 건 좋았다.
그러나 그 한 가지에만 집중하다가, 원래 있던 것을 놔선 안 됐다.
“미국, 나아가 전 세계 관객을 속여야 하는 거라고..”
그렇기에, 그녀는 태화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을 집어줬다.
“······확실히, 제가 너무 들떴네요.”
그녀의 담담한 지적에 태화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배우들을 속인다는 것에 빠져 정작 중요한 이들을 잠시나마 돌보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그럼 구상했던 캐릭터들도 바꾸는 게 나려나요?”
그는 이번 오디션, 나아가 촬영을 위해 두 가지 인물을 준비했다.
영국 출신의 고압적인 말투를 사용하는 남자와 어쩐지 모범생 냄새를 풍기는, 할리우드가 그리는 전형적인 동양인이 바로 그것이었다.
루이를 연기한 경험을 바탕으로 착안한 설정들이었으며 그녀가 지적하기 전까지는 괜찮다고 여겼던 인물상들이었다.
“사실 네가 미국에까지 가서 전형적인 동양인을 연기한다는 걸 믿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난 그 부분은 좋다고 생각해. 옆에 있던 인간이 갑자기 슈퍼 히어로가 된다니, 그거 반전미 넘치잖아. 아, 넌 슈퍼 빌런이지만.”
단순히 설정의 디테일을 늘리자는 의미였다며 나래는 태화의 구상이 마음에 든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모범생 캐릭터도 화장하는 것으로 대화가 끝난 줄 알았던 태화는,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내려갔던 시선을 올렸다.
살짝 입술을 비튼 나래가 삐딱한 자세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도 프로야. 프로는 실수를 하지 않는 법이고, 그런 말은 배려가 섞여 있다고 해도 불쾌해.”
“죄송해요.”
“알면 됐어.”
그는 오늘따라 실수가 많은 것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나래를 무시해서 두 가지 화장을 동시에 진행하는 일이 실수를 유발할 것이라 말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수하는 법이고, 그것이 나래가 되지 말란 법은 없기에 과정을 최소화하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좋은 의도가 항상 좋게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었다.
‘내가 누나를 완전히 믿지 못했다는 건 사실이니까. 나였으면······. 화낼 만 하네.’
BGA나 현규가 ‘네가 저번에 연기한 건 해조였으니, 오민재를 연기할 때 해조의 모습이 튀어나올까 봐 걱정돼 일부러 해조와 비슷한 역할을 골랐다’라고 말한다면 태화는 쓸데없는 참견이라 일축했으리라.
위한다는 말 속에 들어있는 불신(不信)은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드는 법이었으니까.
역지사지로 생각해 본 그는 자신의 실수를 절절하게 깨달았다.
‘······누나가 담아두지 않는 성격이라 다행이다.’
현규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그는 분명 인정하면서 속으로 삭였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새 나을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고 깊은 골이 되어 어느 순간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던 댐의 구멍이었다.
초기에 나쁜 버릇을 발견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태화는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영어에 한국인 억양이 남은 유학생, 유럽에서 예법과 교양을 교육하던 교사. 섭외했습니다.]기분이 가라앉았던 것도 잠시, 서연에게서 온 문자는 태화를 들뜨게 만들었다.
***
‘카메오라기보다 이건 거의 조연 수준이네······. 아니, 조연이 이런 인상을 주긴 힘드니까 카메오의 이미지엔 부합되나?’
티켓에 대한 대가로 출연을 결정하자, 김춘봉은 고마워하며 새로운 대본을 그에게 보내왔다.
카메오 캐릭터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로, 그리 긴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주인공의 생각과 행동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사건이었다.
‘원래 넣으려던 장면인가 보네.’
대본을 다 읽고 식견을 통해 점수를 확인한 태화는 그새 오른 완성도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장면이긴 해도 해당 이야기가 들어감으로써 주인공의 행동에 대한 설득력이 증가했다.
그가 단순히 ‘이태화’란 이름의 가치만을 위해 무턱대고 넣은 장면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태화가 맡게 된 역할은 과거 ‘캐트시’를 맡기 위해 거절했던 것과 같은 검사 역이었다.
주인공의 고등학교 선배이자 바로 윗 기수로, 자신의 얼굴이 잘난 줄 알며 그 잘난 얼굴을 확실하게 써먹을 줄 아는 인물.
나르시시스트에 가까운 자기 자랑과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격함이 돋보이는 캐릭터였다.
‘일단 축복에 들어갈 수 있는 건 확인했고. 이렇게 개성이 뚜렷한 인물이라면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수 있으니 더 조심해서 다뤄야겠어.’
대본을 정독한 후 떠올랐던 창을 지운 그는 오디션 준비에 카메오 준비까지 참 바쁜 일정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투덜거리는 태화의 얼굴에 감돈 미소가, 그의 무의식을 드러냈다.
“형, 전데요. 미국 가기 전까지 연습 시간을 늘리려고요. 네, 아침에 좀 더 일찍 나오려는데.”
비영어권자 특유의 영어 발음, 교양 수업, 카메오 배역 연구 등, 할 것이 많아진지라 그는 아침 연습을 늘리고 외부 약속을 줄이기로 결심했다.
카메오 촬영까지 시간이 있는 편이었으나, 대본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즐거워 욕심을 부렸다.
“아, 자는 건 괜찮아요. 어차피 비행기 타면 잘 시간이 넘칠 텐데요. 네, 네. 부탁할게요.”
우려하는 현규를 다독이고 태화는 전화를 끊었다.
미국에 가기 전까지의 한 달이 상당히 즐거워질 것 같았다.
끝
ⓒ 마늘소금
태화는 연기를 위해 무언갈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게 배워둔 지식이 차곡차곡 쌓여 또 다른 역할에도 시너지를 일으키고 상상 속 이야기를 실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반적으로 배울 일 없는 무언가를 배워 관객들에게 선보일 때.
그리고 그렇게 내보인 일면이 호응을 얻는 그 순간.
그는 상당히 기뻤으며 자신이 무대 위에, 대중들 앞에 서 있음을 느꼈다.
「아무 때나 웃지 않습니다.」
물론 배우는 일을 즐기더라도 그 과정이 언제나 재미있던 것은 아니었다.
색기를 연마할 때는 짧게는 수 시간, 길겐 수십 시간을 대본 속에서 보냈다.
이론과 실전의 차이를 최대한 좁히기 위해서였다.
체력을 다시 다질 때도, 스코틀랜드의 억양을 배울 때도 태화는 항상 최선을 다해 가르침을 몸이 새겼다.
「허리는 곧게 펴고 어깨는 내리세요. 고개를 숙인다고 생각하며 턱을 안으로 당겨야 턱이 접히지 않습니다.」
월터 에반스는 태화가 만난 선생들 중 가장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였다.
그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정중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키지 않다는 감정과 ‘과연 네가 따라올 수나 있겠냐’라는 옅은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백인 우월주의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월터를 보며, 타인의 결정에 별 관심 없는 태화도 어떤 과정을 통해 그가 이 자리까지 왔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성격만 봐선 동양인이 아니라 자기네 노동 계층도 싫어하는 사람 같은데.’
과거 애정관련 해결사 박길동이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토박이를 중개해줬을 때도 그러했지만 BGA의 중개력은 정말 놀라웠다.
「목이 굽었습니다. 정말이지······. 몸이 쇠꼬챙이에 정수리부터 일직선으로 관통됐다 생각하세요.」
월터는 태화의 시선 방향과 걸음걸이, 심지어 재채기 하는 모습조차 고상하게 트집 잡았다.
인간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것도 못한다는 듯,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 지적하고 못마땅해 하는 모습은 배우는 이의 의욕을 저하시키기 충분했다.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으니 좋네.’
그러나 태화는 그런 공격적인 태도를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적대적이기 때문에 쉬지 않고 들어오는 지적을 기꺼워했다.
‘길게 만날 사이도 아닌데 뭐.’
어차피 스승과 제자가 아닌, 서로의 목적을 위해 가르치고 배우는 건조한 관계다.
이상한 것을 가르치지 않고 비용을 지불한 만큼의 역할만 소화한다면, 태화는 그가 자신을 싫어하든 말든 전혀 상관없었다.
‘닷새는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 속도면 기본예절에 관한 이론 부분은 하루 이틀 안에 채워 넣을 수 있겠네.’
태화의 암기력은 이미 Ⅱ단계 99퍼센트에 도달해 두꺼운 서적의 한 챕터 정도도 정독하는 것만으로 암기할 수 있는 수준에 다다랐다.
몸에 충분히 익혀 생각하지 않고도 행동이 나오게 하는 건 이야기가 달랐으나, 월터가 하는 말들을 전부 기억하고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일은 가능했다.
한 번 지적 받은 일을 똑같이 틀리는 경우가 없었단 의미다.
때문에 월터의 가르침은 세 시간도 되지 않아 태화의 태도에 스며들었다.
월터의 지적은 태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으며, 곧 태화의 자세에는 은은한 우아함과 위압감이 서렸다.
「······생각보다 잘하는군요.」
독설을 내뿜으며 이리저리 지적에 지적을 거듭하던 그는 태화의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을 보고 곱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태생적 한계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거늘······.’
그는 태화를 위아래로 훑었다.
상류층 아이들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자연스럽게 예의를 보고 자라며, 때문에 가정교사를 통해 교양을 가르칠 때 습관을 제외하면 건드릴 부분이 많지 않았다.
단지 그 습관이 쉽게 고쳐지지 않기에 긴 시간을 들여 몸에 익히도록 돕는 것이다.
태화의 경우는 그들과 달랐다.
자세가 곧은 편이긴 하나 그의 첫인상은 상류층 인사들보단 그들을 보좌하는 집사를 연상시켰다.
동작에 자연스레 묻어나는 고상함이 부족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순식간에 고쳐졌다.
수많은 지적들을 전부 외우고 있는 사람처럼 태화는 월터가 ‘천박함’이라 생각했던 부분들을 지워나갔다.
‘원래 알던 건 아니야.’
주요한 품행을 두 시간 만에 전부 수정했을 때, 월터는 사실 그가 이미 예절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한 인물이고 지금의 만남을 단순히 놀림은 아닌지 고민했다.
하지만 일면식도 없던 자신을 놀리기 위해 거금을 투척했다 보기엔 태화의 태도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이 정도면 웬만한 자제들보단 낫군.’
아무리 명예가 아닌 급전때문에 태화를 맡았다곤 해도 월터 에반스는 자신의 위치에 자부심을 품은 남자였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임에도 허투루 가르치지 않았으며 그는 그런 자신의 객관성을 자랑스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