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72
‘7시 약속은 월터하고였는데······. BGA 중개 팀장이 무슨 일로 날 찾아왔지?’
옷을 걸치며 생각해 봐도 걸리는 것이 없어서, 태화는 일단 매니저에게 연락을 넣은 뒤 밖으로 나섰다.
***
“하하하. 안녕하십니까, 이태화 배우님. 중개 팀 팀장 홍준혁이라 합니다.”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준혁이 태화를 발견하곤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눈꼬리가 아래로 쳐져 유순한 인상을 했으나 풍겨 오는 분위기가 단단하고 빈틈없게 느껴지는 남자였다.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사실 배우님의 담당은 임서연 씨인 걸 알지만 오늘 전해 드릴 자료는 중요도가 달라서, 제가 직접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준혁은 들고 온 서류 한 부를 태화에게 건넸다.
얼마나 중요한 자료라서 그렇게까지 말하나 살핀 태화는 ‘이태화 미국 담당자 정보’라는 제목 아래 적힌 소속을 확인하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속 BBA.
한국의 작은 연예 기획사 BGA가 장난으로도 협력을 요청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미국의 대표 에이전시.
이 정보가 임서연에게 갔다간 이미 의문을 품고 있는 그녀가 지금 도달해선 안 될 정답에 닿을지도 몰랐다.
‘근데 이걸 나한텐 알려도 괜찮은 건가······?’
태화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준혁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사실 저희가 미국 최대 에이전시인 BBA와 협력을 이뤄 냈다는 건 대외비입니다. 알려지면 상당히 소란스러울 관계니까요.”
“아하?”
협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태가 BBA다.
그러나 홍준혁은 침도 안 바르고 거짓을 내뱉었다.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왜 저한테?”
“저흰 배우님과 좀 더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 가고 싶으니까요.”
자신들의 저력을 보여 준 것뿐이라 말하는 그를 향해 태화는 모호한 미소를 띠었다.
태화가 처음부터 BGA를 골랐던 것은 회사가 BBA의 한국 지부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서다.
이미 포장지 안을 다 아는데, 내용물을 두루뭉술하고 장황하게 말해도 심심할 뿐이었다.
‘정말 큰맘 먹고 알려 주는 것 같네······. 근데 회귀 전엔 이보다 빨리 알려지지 않았나? 심유미······. 류 심도 작년쯤 미국에 가서 드라마에 들어갔어야 할 텐데 왜?’
회귀 전 BGA는 위에서 잡아 이끌 안정적인 스타들을 영입하지 못한 탓에 정말 바닥에서부터 시작했어야 했다.
심유미가 성공해서 다행인 것뿐이지, 그들은 BBA와의 연결 이점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으며 아득바득 살아남아 미국 시장의 바닥을 점령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겐 태화가 있었으니까.
때문에 그들은 소모적으로 배우들을 미국에 던지는 대신 조금 더 공을 들여 태화를 가꿨다.
가장 높은 곳으로 그를 던져 이름을 높인 뒤, 아래를 공략할 생각으로 말이다.
심유미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BGA가 성공적으로 자리 잡기 전까지 맨땅에 헤딩해야 했을 이들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대화가 길어질 것 같은데 먼저 들어가 있고 싶군요.」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월터가 시계를 확인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는 태화에게 인사를 건네고 태화를 힐끔거렸다.
데면데면한 걸 넘어 못마땅함이 서려 있는 행동이었다.
「네, 여기 입구키로 먼저 들어가 있으세요.」
「잠깐. 월터 씨, 저랑 잠시 이야기 좀 하죠.」
태화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 키를 건네려던 차, 준혁이 월터의 어깨를 붙잡았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은 어딘가 인위적이어서 섬뜩한 기색을 풍겼다.
「무, 무슨······.」
「월터 씨, 저희 배우님께 저번에도 그런 태도를 보였던 겁니까?」
태화에게 안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준혁은 짓이기듯 물었다.
월터는 뭐라 답하지 못하고 표정을 굳혔다.
준혁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눈빛은 차가웠다.
여기서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지금 자신을 큰 뜻을 품고 동양인을 가르치는 고귀한 선교사라도 된다고 착각하는 거 같은데.」
그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민하는 사이, 이미 결론을 내린 준혁이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하며 그를 차 쪽으로 끌고 갔다.
태화가 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도박 빚 때문에 여행 핑계 대고 여기까지 온 인간이 어디서 존심을 세워요? 응? 장난합니까?」
「크흡, 내가 돈이 없어서 이러······.」
「없어서 이러는 거잖아요. 쓸 수 있는 자금은 전부 드러나 있어서 도박 빚을 갚는 데 사용하면 도박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니까.」
상류층에서 도박을 하는 이들은 의외로 많다. 그러나 아이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예법 선생이 도박 중독자인 것을 좋아할 부모는 없다.
게다가 월터는 이미 한 번 도박으로 걸린 적이 있어서, 더 이상은 호기심 탓에 했다고 변명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도박쟁이 낙인이 찍히기 싫어 여기 왔으면 똑바로 하세요. 저희 배우님은 당신의 지갑이 아니라 구명줄이니까.」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발품 팔 듯 일을 찾으면 의심하는 사람이 생긴다.
그러나 교육 이외에 재능 없는 그를 현재 필요로 하는 인물은, 연기를 위해 예절 교육이 필요한 태화뿐이었다.
준혁이 짚은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기에, 월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치를 지키셔야 저희도 존중할 거 아닙니까. 네?」
준혁을 힐끔 본 월터는 길고 얇게 찢어진 눈에 서린 불쾌함을 보고 흠칫했다.
웃을 땐 단순히 푸근하던 눈이 표정을 지우자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미, 미안하오.」
「배우님과 한 약속은 계약의 존재가 밝혀지지 않는 것이었지, 당신이 또다시 도박을 해서 주변을 실망시켰다는 내용이 아니에요.」
홍준혁은 혼자 쥐고 있는 정보가 많은 만큼 바빴다.
하지만 그런 일정을 감수하고서도 현재의 선택을 고수했는데, 그것은 이런 식의 위협과 그것에 굴복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포기할 수 없어서였다.
‘비밀은 많은 사람이 알수록 효용을 잃는 법이니까.’
게다가 많은 이들에게 퍼지면 자포자기식으로 행동하는 이들도 나온다.
그는 중개 팀의 머리로서, ‘갑’들에게 ‘최상의 결과’를 중개할 의무가 있었다.
「이해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전 배우님과 할 말이 남았으니 추운데 먼저 들어가세요.」
「그, 그러겠소······.」
활짝 웃는 준혁을 보고 월터는 떨떠름한 기색을 내비치곤, 바로 먼저 들어가겠단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잠깐 사이 주눅이 든 월터를 잠시 힐끔거리고, 태화는 준혁을 바라봤다.
“굳이 기선 제압을 할 필요는 없다고 봤는데.”
태화라고 그의 못마땅함을 몰랐던 건 아니다.
그러나 어차피 길게 만나지 않을 사이에, 굳이 서열을 따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필요합니다, 이태화 배우님. 그건 정말 필요한 행동이에요.”
그러나 준혁은 월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진지한 얼굴로 태화의 생각을 부정했다.
“중개 팀은, 언제나 배우님께 해를 끼치지 않는 인물을 중개해 드립니다. 거기에는 ‘정신적인 우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의뢰인과 동등한 사회적 위치에 있거나 낮은 이들을 중개했다.
‘중개한 이가 의뢰인에게 최선을 다한다’와 ‘의뢰인을 무시하거나 낮잡아 보지 않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의뢰인의 권리였기 때문이다.
“그 부분은 딱히 필요 없는 서비스라.”
태화는 자신을 무시하는 이들이 무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즐거웠다.
회귀 전, 못마땅하단 시선들 사이에서 연기하며 생긴 버릇이었는데, 가족을 다시 만나고 인기와 사랑을 받게 된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건 배우님뿐 아니라 주변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BGA를 포함한 많은 스텝들은 배우님을 아끼고 있고, 그런 배우님이 무시당하는 것을 참기 어려우니까요.”
“아.”
준혁의 절절한 말에 태화는 눈을 깜빡였다.
회귀 전과 달라진 것은 주변의 시선뿐이 아니었다.
그를 사랑하는 이들 또한,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성재 형은 씁쓸해하긴 해도 그걸 슬퍼하진 않았으니까······.’
성재는 태화뿐 아니라 모두의 감독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연극 감독 자리에 ‘고용된’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는 태화가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실력으로 이겨 내란 조언밖엔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태화의 주변에 있는 이들은 좀 더 맹목적으로 태화만을 위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 차이가 상당히 크게 다가와서 태화는 웃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제 권리를 확실하게 챙기도록 할게요.”
“그리 시원시원하게 받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둘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마무리할 때쯤, 익숙한 차량이 건물로 다가왔다.
태화의 연락을 받고 온 매니저 현규였다.
“그럼 전 김현규 씨와 나머지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아, 그리고 첫 장은 매니저 분에게도 비밀이라······.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서류 가장 위에 있던 한 장을 빼내 품안에 집어넣었다.
왜 소속 칸의 유무만 다른 종이가 겹쳐 있는가 싶었는데 이를 위한 것이었나 보다.
“수고하세요.”
“네. 배우님도.”
한 번 더 생긋 웃은 그는 선한 미소를 띤 채 현규에게 다가갔다.
멀어지는 그를 잠시 지켜보다가 연습실로 발길을 옮기려던 태화는 주머니를 울리는 진동음에 스마트폰을 꺼냈다.
[태화 씨, 시간 되세요?]회귀 전 ‘괴물’의 오민재를 맡았던 배우이자 오디션의 경쟁자였던 남궁현태.
그에게서 온 문자였다.
끝
ⓒ 마늘소금
준혁과 월터 사이의 대화를 어렴풋이 이해했음에도, 태화는 그의 변화를 모른 척하며 저번과 동일하게 월터를 대했다.
아무리 얕잡히지 않겠다고 결심했다지만 이미 한껏 조심스러워진 이를 상대로 목대를 세우는 건 꼴사나워 질 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호랑이가 여우를 등에 타서 난척하는 꼴이지.’
굳이 지금 잘하는 사람에게 또 한 번 핀잔 줄 필요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 태화의 배려 아닌 배려에, 잠시 복잡한 눈빛을 했던 월터는 천천히 수업을 시작했다.
한결 정중해진 그는 동작을 지적하며 이 행동이 어떤 자리에서 중요한지, 현대 사설 학교 학생들은 평소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등, 세세한 부분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
가장 격식을 갖춘 방식만 배우던 태화는 현실에 맞는 자세를 함께 익혔고, ‘자연스러움’에 익숙해졌다.
「수업은 한 번 정도면 마무리될 것 같군요.」
「네. 오늘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다음에 뵙죠.」
잠시 무어라 말을 붙이려던 월터가 이내 하려는 말을 삼키고 인사를 건넸다.
아무리 정중해졌어도 친해질 생각까진 없던지라, 태화는 그에 호기심을 가지는 대신 식은땀을 수건으로 훔치며 수업 전에 왔던 문자를 확인했다.
한 달 전 서로의 수상을 축하해주는 문자들 아래, 찍힌 오늘 시간이 괜찮냐는 물음이 태화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무슨 일이지? 내가 미국 가는 걸 아나? 비밀로 해서 그 발 넓은 효신 누님도 모르는 일인데······.’
티켓을 준 신상아는 알고 있으나 그녀도 좀 더 극적인 순간 태화와 영화 소식을 엮기 위해 침묵을 택했다.
현규의 말에 따르면 퍼지는 순간 관심도가 한 번에 타올랐다가 사그라지니, 터뜨릴 거리를 여럿 마련해 두고 개봉 전까지 작품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도록 순차적으로 터뜨릴 계획인 것 같았다.
‘오늘 할 일은······. 두 시간 정도는 비울 수 있나?’
답이 나오지 않았던 태화는 일단 현태와 약속을 잡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회귀 전부터 동경했던 배우다.
오디션 이후 두어 번밖에 만나지 못한 탓에, 태화도 미국 일정을 소화하기 전 그를 만나고 싶었다.
***
사실 ‘괴물’의 오디션이 끝나고, 남궁현태는 남궁현태대로 바빴다.
비록 최지환 감독은 ‘괴물’의 오민재 역으로 태화를 선택했지만, 마지막까지 현태를 놓지 못하고 친구이자 시트콤계를 주름잡는 PD 김길욱에게 그를 소개시켰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정을 감독끼리만 안 채, 오디션에서 탈락한 남궁현태는 길욱의 제안을 받아들여 캐스팅 제의를 수락했다.
그리고 ‘괴물’이 개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길욱 PD의 ‘우리 오빠가 달라졌대요’라는 시트콤이 KBC에서 방영됐다.
마이너한 장르답게 시트콤의 초반 시청률은 잔잔했다.
하지만 배우들 간의 호흡, 시트콤 세대의 향수를 은근히 자극하는 익숙한 얼굴들, 그러면서도 젊은 층을 놓치지 않는 대사가 맞물려 ‘오달’은 회귀 전처럼, 아니 회귀 전보다 큰 인기를 이어갔고, 기어코 시즌 2를 성사시켰다.
그 성공 속에는 남궁현태의 공로가 적지 않았다.
선배 배우의 성을 따라 임현태로 출연한 그는 호탕하면서도 은근히 어수룩하고, 실수가 잦으나 그것이 웃음으로 이어지는 ‘오빠’역을 맡았다.
그의 연기는 시청자들이 실제 경험을 되새기게 만들었다.
현태를 보며 부모는 속 썩이면서도 결국은 사랑스러운 자식을 떠올렸고, 아이들은 경쟁자이면서도 한편으론 협력자인 자신들의 형제를 생각했다.
그렇게 현태의 연기를 현실과 이어붙인 시청자들은 ‘오달’에 조금 더 깊이 빠져들었다.
‘오달’이 시즌 2까지 총 2년 가까이 인기를 이어갈 수 있던 비결 중 하나였다.
‘각각 1년이라······. 대하드라마나 일일 드라마가 아니고선 힘든 길이인데 역시 시트콤은 다르네.’
태화는 드라마보다 가혹한 시트콤의 일정을 떠올리고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