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71
‘사건을 직접적으로 건드려야 하나? 어차피 중요한 사건이 아니라서 고쳐도 크게 문제는 없을 테지만 주인공과 관객에게 확 와 닿을 정도의 임팩트가······.’
대사나 행동을 약간 바꿔본 적은 있으나 대본 전체를 건드린 일은 ‘겨울나기’ 이후엔 없었다.
‘겨울나기’도 감정선을 바꿔 인물들 간의 관계를 다르게 해석되도록 한 것뿐이지, 사건들 자체를 바꾸진 않았었다.
‘······난 이런 부분에서 재능이 부족한 거 같네.’
아무리 쥐어짜도 괜찮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태화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겨울나기’를 연기했을 때도 그가 바꿔서 연기한 대본보다 수정 대본의 동기화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다.
전문 작가와 비교하면 스토리를 써가는 그의 실력은 조잡한 구석이 있었다.
크랭크인 전 한번 연락해 보는 쪽이 낫다 생각하며 그는 연습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자신의 생각과 비슷하면서도 상반된 인물을 연기한다는 건 의외로 골치 아팠다.
‘한번 연습한 것뿐인데 이 꼴이라니······. 그냥 오늘은 어제 배운 예절이나 연습할까, 어차피 내일 또 수업하려면 완벽한 쪽이 나은데. 영국 총리 연설 방송도 한번 쭉 듣고.’
그가 바닥을 뒹굴며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연습실의 문이 열리며 한 남녀가 들어왔다.
현규와 나래였다.
“······뭐하니?”
“역할을 너무 덜컥 맡았다는 후회요.”
“후회라니 별일이네.”
혼자 있는 것도 아닌데 계속 누워있을 수 없어 태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이 들고 온 물건을 받았다.
“고마······ 음? 태화 너 키 크지 않았어?”
종이봉투를 건네고 신발을 벗으려던 나래는 눈을 찌푸리며 그를 찬찬히 훑었다.
화장하거나 평소보다 차려입은 것도 아닌데 위화감이 든 탓이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 뭐지?’
나래가 위화감과 함께 다가온 기시감에 눈을 일그러트리자 태화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누나랑 이틀 만에 보는 건데, 그 사이 눈에 띌 정도로 컸을 거 같진 않네요.”
“흐음······.”
답변이 수긍되지 않은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태화를 뚫어저라 살폈다.
그런 나래를 내버려 둔 채 그는 현규가 꺼낸 조각 케이크들을 확인하며 기뻐했다.
한 헬스 트레이너가 ‘웰빙 케이크’라고 소개하면서 인기를 얻은 가게의 제품으로 최근 단것이 먹고 싶을 때 즐겨 찾는 음식이었다.
“······누나 아직도 그러고 있어요?”
준비가 끝날 때까지 여전히 망부석처럼 현관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 태화는 의아하단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너.”
“네?”
“목선이 예뻐졌어.”
“······아, 네.”
태화는 칭찬인 듯 칭찬 아닌 뜬금없는 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나래는 진지했다.
“그래. 목선이 예뻐졌어. 허리 라인도 그렇고······. 그러네. 어디서 봤나 했더니.”
태화는 화보나 피팅 모델로 작업한 적은 있어도 런웨이를 걸은 적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선 자세가 괜찮은 편이었으나 전문가들과 비교하면 그저 그랬다.
‘아주 미묘하지만 시선 높이가 변하고 행동에 여유가 생겼어.’
심적인 편안함에서 나오는 여유와 교육을 통해 습득한 여유는 같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임에도 느낌이 약간 달랐다.
아니, 여유를 교육받으면서 다른 분위기도 함께 습득한다는 게 올발랐다.
“너 나중에 밀라노 가자.”
“······밀라노요? 거긴 또 왜요?”
“너라면 밀라노를 점령할 수 있을 거 같아서?”
“그거 참 재미있는 농담이네요. 그나저나 와서 안 먹을 거예요?”
진지한 그녀의 발언을 가볍게 넘기며 태화는 케이크가 놓인 테이블을 두드렸다.
한 번 더 그를 설득해보려던 나래는 말로는 설득하기 힘들다는 걸 깨닫고 얌전히 마루에 발을 디뎠다.
“나래야······. 어쩌지. 우리 포크 안 챙겨왔어. 지금이라도 근처 가서 사와야······. 이 근처 슈퍼가 어디더라?”
그 사이 봉투를 정리하던 현규는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별거 아닌 일에 당황한 그를 보며 나래는 한숨을 내쉬었고, 태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형 괜찮아요. 어차피 낱개로 다 쌓여있는데 포장 부분을 손으로 들고 먹으면 되죠.”
“그, 그런가?”
“묻으면 화장실도 있으니 손 씻으면 되는 일이고요.”
그의 차근차근한 설명에 하얗게 질렸던 현규의 얼굴이 혈색을 되찾았다.
그런 믿음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며 나래는 혀를 찼다. 많이 고쳐졌음에도 갑작스러운 사고에 여전히 약한 것이 못 미더웠다.
“오빠 멘탈이 조금 더 튼튼했다면 진즉에 잘나가는 매니저 됐을 텐데. 왜 일에서 일어난 돌발 상황엔 침착하게 대처하면서 일상만 이래?”
“미안······.”
“그만해요, 누나. 그리고 저야 그 덕에 형을 만났으니 다행인 일이죠.”
그땐 번 돈이랄 게 없어 비싼 매니저는 꿈도 못 꿨다며 태화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풀었다.
그렇게 작은 소란이 지나고 태화는 드디어 고구마 케이크를 손에 쥐었다.
한 손에 잡히는 작은 원기둥에 포슬포슬한 노란색 가루가 눈처럼 덮여있어 따듯해 보였다.
가니시로 올라간 엄지손톱만 한 속이 빈 초코볼과 그 위에 뿌려진 금박 또한 참으로 탐스러워서, 태화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 하얀 치아로 초코볼을 집어 들었다.
“자, 잠깐!”
“네?”
“나래야 걱정 마! 내가 다 찍었어!”
“이런 부분은 정말 믿음직스럽다니까!”
“······?”
입안에 든 초코볼을 우물거리던 태화는 고개를 들어 둘을 바라봤다.
현규의 손에 든 스마트폰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 이런 것도 올리나.’
태화는 케이크를 한입 크게 베어 물며 렌즈를 향해 웃었다.
그리고 화보에서 보이는 강렬한 눈빛을 한 채 입술에 묻은 크림을 혀로 핥았다.
‘뭐 이런 걸 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팬 서비스는 확실히 하는 게 좋다고 여겨서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공식 계정에 올라갔을 때, 태화는 ‘동영상 촬영인 줄 알았으면 1절만 할걸’이라 후회했다.
└이거슨 광고입니까? 광고인 거죠? 그래서 어디 광고입니까? 바로 사러 갑니다.
└(동공지진) 케이크가 야한 음식이란 건 알았지만 혼자 먹어도 야한 줄은 몰랐어요······.
└묻은 크림도 별로 없는데! 왜!! 왜! 입술을 핥아서 절 심란하게 만드시나요!!! 악!! 앆!!! 억! (My 뒷목!)
“······이거 내리면 안 되나요?”
케이크 두 입 먹는 영상이 무슨 성인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가버리자 태화는 당황하며 현규를 바라봤다.
당혹스러운 그와 달리 매니저의 얼굴엔 흐뭇함만이 감들았다.
“어? 왜? 이렇게들 좋아하는데.”
“아니, 좀······. 분위기가?”
제 입으로 야하다고 말하긴 그래서 태화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신경 쓰지 마. 이런 떡밥도 있어야 팬질을 하는 거야.”
나래는 그런 의미에서 몇 장 더 찍자며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본능적으로 웃어 보이던 태화는 쉬지 않고 올라가는 댓글들을 보며 잘게 떨었다.
겨우 3분 만에 백 개 가까이 달린 댓글과 이미 어디 케이크인지 찾아서 증거를 제시하는 관찰력, 벌써 옷 입고 장소로 향하는 중이라는 행동력까지.
그는 폰 화면을 껐다.
자신의 팬이지만 가끔은 그들을 이해하기 상당히 힘들었다.
끝
ⓒ 마늘소금
공식 계정에 동영상이 올라간 다음 날.
영상의 일부 장면들이 캡처되어 기사로 쏟아졌다.
어차피 연예계 기사라는 것은 기사 베끼기가 심해서, 한 곳에서 작성한 내용이 다른 곳에서도 우후죽순 올라가는 경향이 강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대중들이 클릭할 만한 기대치는 있어야 퍼 나르기가 이뤄진다.
따라서 이런 사소한 일이 기사화되었다는 건, 그만큼 태화가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 인물로 성장했단 의미였다.
‘난 실시간으로 흑역사가 쌓이는 거 같아서 별로지만······.’
일찍 일어나 자신의 차를 타고 연습실에 도착한 태화는 운동과 샤워를 마친 후, 머리를 말리며 인터넷에 게재된 기사들을 확인했다.
기자들이야 이슈가 되니 글을 올리는 것이겠으나 공공재가 돼 버린 입장에선 기분이 묘했다.
‘형에게 공항 사진은 미국 도착한 다음 올려 달라고 말해야겠네.’
출국이 2주 앞으로 다가왔음에도 그가 미국에 간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적었다.
혹시라도 있을 공항의 혼란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연예인의 출국과 귀국 소식이 가장 쉽게 전달되는 것은 연예부 기자들에 의해서다.
소속사는 공항 스케줄 또한 홍보에 사용하기 위해 연예부 기자들에게 촬영을 요청하거나, 그들이 정보를 원하면 쉽게 제공한다.
그러나 BGA는 다른 연예 기획사들과 달랐다.
그들은 매니지먼트보다 에이전시의 성격을 띠었으며, 태화가 맡긴 의뢰를 수수료를 받고 ‘도와주는’ 역할을 맡아 왔다.
당연히 조용히 움직이길 원하는 태화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은 비밀을 엄수했다.
‘뭐, 다른 부분도 말해 두면 현규 형이 알아서 잘 해 주겠고······. 근데 극장 내 촬영은 안 되겠지? 백 스테이지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잠시 계정에 올라갈 사진에 대해 고민하던 태화는 월리엄 록셀의 공연을 떠올리며 산타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볼을 붉혔다.
예순에 가까운 나이로도 정정한 활동을 이어 가고 있는 연극계의 거성(巨星), 월리엄 록셀.
태화가 연극배우 중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과거 그가 연기와 사랑에 빠진 일은 우연이 겹쳐 일어난 것이었다.
우연히 동아리 활동을 권유받고.
우연히 연습 중인 배우들을 보게 되고······.
그렇게 심장의 두근거림과 끌림을 무시하지 못한 채, 연기의 길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록셀은 그런 우연들과 달랐다.
신입 단원 환영회에서 틀어 준 그의 젊은 시절 연극을 보고 그곳에 있는 모두가 록셀의 팬이 되었으니까.
‘같은 대본이 반복되고 있는데도 여전히 매진 행렬이라니, 역시 록셀은 달라.’
정기적으로 열리는 록셀의 연극은 연출 감독, 여자 주연, 다른 배우들이 전부 바뀌나 가장 기본이 되는 대본과 주인공은 언제나 동일했다.
요리로 치면 항상 같은 농장에서 나오는 체리를 바탕으로 여러 요리사가 다른 부재료들을 섞어 체리파이를 만드는 격.
하지만 사람들은 체리파이의 체리를 보고 자리를 채웠다.
태화가 꿈꾸는 이상을, 록셀은 진즉에 이뤄냈다.
‘오디션 전에 이것저것 배우려면 시간이 촉박한데 그마저도 빨리 갔으면 좋겠다니, 진짜 모순적이야.’
그는 어쩐지 기말고사 뒤에 있는 방학을 더 기다리는 학생이 된 기분에 잠시 머쓱해졌다.
그러나 학생으로 비유한다면, 그는 참 성실한 우등생이었다.
‘오늘, 잘하면 하루 정도 더 하는 걸로 예절 수업은 끝나겠지.’
쉽게 익혀지지 않을 거란 모두의 예상과 달리 태화는 유럽의 예법을 순식간에 익혔다.
전부 이해할 수 없으니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 버렸다는 학생처럼, 그는 익숙해지지 않은 것들을 ‘의식적으로’ 보완했다.
‘지식적인 부분과 형태를 기억하는 걸로 지금은 충분해. 내일이면 대본이 도착할 테니까.’
태화의 참여가 결정된 대본이 아닐지라도 현재 상영 중이거나 예정이 잡힌 작품은 보통 난이도로 연습이 가능하다.
그는 그 점을 이용하기 위해 현재 영국에서 방영 중인 영화의 대본을 BGA에게 부탁했다.
‘마지막이자 첫 번째였던 당신(The who Last and First for us)’이 바로 그것이었다.
로맨스물처럼 보이는 제목과 달리 조지 6세의 힘들었던 왕위 시절을 다룬 영화로, 왕실을 배경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예법이나 용인 영어를 연습하는데 제격인 작품.
하루 4시간씩 투자하다 보면 늘기 싫어도 늘 수밖에 없으리라.
태화가 연습에 대해 생각하며 머리를 다 말릴 때쯤, 평소 연락 올 일 없던 경비실에서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이태화 씨. 7시에 약속이 있다고 어떤 분이 찾아오셨는데요. 성함은 홍준혁 씨고······. BGA의 중개 팀장이라 하시는군요.
“아, 네. 제가 앞으로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뭘요. 이게 제 일인 걸요. 그럼 기다리라고 전하겠습니다.
태화의 연습실은 BGA 사옥에 있는 의상실과 달리 직접 구입한 장소였다.
보안이 상당한지라 다른 이들에 의해 방해받을 일이 적었고, 원하는 운동 기구들을 전부 구비해서 그를 몇 시간씩 잡아 놓는 주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