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60
거물의 방한 소식은 한국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대중들이야 ‘그냥 대단한 사람인가 보다’하고 넘어가도 영화인, 특히 감독들에게 장마르크는 ‘살아 있는 역사’였다.
태화에게 있어 록셀과도 같은 존재.
흥분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의 한국 방문이 확실시되었을 때, 한국 영화인 협회와 감독들은 태화를 복잡한 심정으로 대했다.
거장이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기쁘지만, 그게 자신들 때문이 아닌 배우에게서 시작된 것임을 알고 은근히 질투한 것이다.
물론 이유야 어찌 됐든 장마르크가 오는 것만으로 행복해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태화가 연줄이라 생각해 작품 한 번 맞춰 본 적 없음에도 친한 척 연락하는 감독들이 늘었으며, 콧대 높은 대한 영화인 협회에서도 은근히 숙이고 들어와 사적인 자리 마련에 도움을 줄 수 없냐는 의사를 내비쳤다.
‘정조’의 관객수 공약, 드라마 촬영, 홍보 등.
상당히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태화는 장마르크 감독을 다시 보는 것이 기꺼우면서도, 이런 시기에 방문하는 것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허용우 PD가 요새 이상한 행동 하던데······ 소속사 차원에서 이야기할까?”
“······괜찮아요. 딱히 무슨 짓을 하는 건 아니니까요.”
현규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던 태화는 고개를 저었다.
시선이 조금 노골적이긴 해도, 부러 말을 흘려 ‘진짜 뭐가 있나 보다’란 생각을 심어 주기 싫었다.
힘들면 집에 들어가서 쉬어야 하는데, 드라마 판에는 일정이 빡빡하고 힘들수록 술판을 벌이는 이상한 문화가 존재했다.
어차피 집에 들어가긴 글렀으니 함께 술을 마시고 가까운 숙소에서 구겨져 잠드는 것이다.
감독의 성향에 따라 술자리 빈도가 달라졌지만 허용우 PD는 음주가무를 사랑하는 축에 속했다.
당연히 일정이 바빠질 수록, 스텝과 배우들이 모여 술판을 벌이는 횟수도 잦아졌다.
물론 일정이 바쁜 주연 배우들은 그런 자리에 일일이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술자리를 바쁘다는 핑계로 빠져나갈 수는 없는 법이었고, 그렇게 자리할 때마다 용우는 태화의 옆자리에 성효를 앉혔다.
‘주연들끼리 앉히는 게 이상한 행동이라 보긴 힘들지만······.’
회식이라 해도 직책과 인기에 따라 앉는 자리가 결정된다.
주연 배우들이 감독과 함께 안쪽에 앉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 뒤를 비중 있는 조연, 카메라 감독 등이 채웠다.
그러니 태화와 성효가 합석하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 관찰하는 건지······.’
그렇게 앉은 두 주연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힐끔거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태화가 천성효에게 화를 낸 뒤, 둘의 관계는 완벽히 공적(公的)으로 변했다.
성효는 종종 태화를 힐끔거리면서도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고 태화는 일이 엮이지 않은 이상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눈치 없인 먹고 살기 힘든 동네니, 둘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알아차린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었냐고, 직접적으로 묻는 사람은 없었다.
태화는 그런 사적인 질문을 던지기엔 너무 급이 다른 배우였으며, 성효는 연기 이외의 부분에서 정신이 딴 데 가 있었기 때문이다.
멍하니 있다가도 가끔 애처로운 눈빛으로 태화를 보는 탓에 다들이 ‘천성효가 고백했다가 차였다’라 오해했다.
둘 다 오해를 지적하지 않았기에 소문은 진압되지 않았다.
사실, 성효는 싸운 친구와의 일로 여전히 고민 중이었다.
백치미와 개념 없는 발언으로 친구에게 험한 소리를 들었어도, 그녀는 의외로 극단 시절부터 동료로 지낸 친구를 좋아했으니까.
비록 ‘현재 재능이 부족해도 미래엔 다를 수 있다’와 ‘재능이 부족할지라도 주연을 꿈꿀 수 있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녀가 태화를 애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친구와 같은 발언을 한 그에게 조언을 얻고 싶어서였다.
‘현장 분위기가 별로야.’
태화는 ‘정조’ 당시와 현재를 비교하고 혀를 찼다.
‘이삿갓’의 촬영은 순조로웠다.
아직 초반이라 그런지 쪽대본으로 악명 높은 추원희 작가도 두툼한 대본을 한 권 한 권 배부하고 있었고, 현장 촬영도 딜레이되는 일 없이 당일 예정된 촬영을 일정에 맞춰 진행됐다.
그러나 카메라만 벗어나면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태화와 성효를 향했다.
그런 류의 관심에 둔한 태화마저 알아차릴 정도였으니 거의 대부분이 둘 사이의 관계에 호기심을 지니고 있다 보는 게 알맞으리라.
“현장 분위기 잡아야 할 PD가 앞장을 서고 있으니. 돌아가는 꼴이 개판이더라.”
“나래야······.”
나래가 신랄하게 비꼬자 현규는 한숨 쉬듯 그녀의 이름을 뱉었다.
하지만 경솔하다 타박하는 그 또한 나래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이렇게 현장에 문제가 생기면 누구보다 중심을 지켜야 하는 건 PD였다.
다른 주제로 흐르려는 분위기를 사전에 차단하고, 배우들의 신경전이 심해지기 전에 막고······.
그렇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 PD가 방임하거나 노골적으로 한쪽 편을 들 때, 현장 분위기는 엉망이 되기 마련이었다.
‘실력 있는 사람이긴 한데 남 연애사에 관심이 너무 많단 말이지······.’
현규는 난감한 기분으로 용우에 대해 생각했다.
초대박작을 만든 적은 없어도, 허용우는 꾸준히 평타를 치며 입지를 다졌다.
뭐가 성공할지 알 수 없는 연예계에서 일정한 성적을 유지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고, 그 실적에 맞게 용우는 방송국의 신뢰를 받았다.
문제는, 그가 주로 맡아 온 장르가 로맨스와 로코였다는 점이다.
‘······장르 차이 정돈 뛰어넘을 실력은 있지만.’
게다가 PD는 자신은 솔로면서 남의 연애사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스텝끼리 엮기를 좋아했고 그런 류의 이벤트를 열어 주는 것도 좋아했다.
물론 당사자들은 질색해서, ‘본인이 연애를 못 하니 대리 만족으로 남의 연애사에 참견하는 것’이라며 용우의 흉을 봤다.
‘······은근 소녀 감성이 있는 PD란 말이지.’
소녀 감성에 연애를 사랑하는 오지랖 PD.
상업 작품에 예술성와 완전성을 따져 가며 쪽대본을 남발하는 작가.
고의든 아니든 은근히 자신을 피해자로 포장하는 여자 주연.
어쩐지 다사다난한 촬영인 것 같아, 현규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한숨 쉬지 마. 쟤가 마음에 안 드는 거 참을 애야?”
현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나래는 운전 중인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뒤쪽에 있는 태화를 엄지로 가리켰다.
어느새 대본에 집중하고 있는 태화는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음에도 대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쟤도 얼마나 제멋대로인데.”
“나래야······.”
“게다가 아무리 계약 전엔 배우가 갑 계약 후엔 감독이 갑이라 해도 태화 정도의 급이면 계약 후에도 갑이야. 빠가사리가 아닌 이상 얌전히 있는 톱스타 건드릴 멍청이는 없어.”
허용우 PD는 오지랖이 넓어도 제가 참견할 수 있는 범위, 즉 주제를 알았다.
주연 배우들 사이의 일을 노골적으로 궁금해하면서도 직접 묻지 않는 건 그런 이유였다.
“그리고 천성효, 걘 본능적으로 약자 코스프레 하던데 그런 것도 통하는 사람에게 해야지.”
태화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여론에 흔들리지 않는다.
태화의 멘탈만 흔들리지 않으면 피라냐들은 그를 물어뜯지 못한다.
강약약강이 가장 확실한 세계가 연예계이기 때문이다.
“오빤 걱정이 너무 많아.”
“하하하······.”
투덜거리는 나래를 향해 현규는 힘없이 웃었다.
소심한 건 그의 성향이기도 했지만 돌다리를 수십 번 두드리고 건너게 된 건 상황의 영향도 무시 못 했다.
욱하는 성질이 있는 나래와, 톱스타가 돼서도 예의 바르나 은근히 마이페이스인 태화.
자칫하면 멋대로 나가기 쉬운 배우와 동료의 브레이크가 되려면 자신이 더 꼼꼼하고 사소한 것도 확인해 가며 보조할 필요가 있었다.
‘제발, 일 같은 거 안 터지면 좋겠는데······.’
어쩐지 불안하다.
‘이삿갓’의 현장으로 향하며 현규는 부디 이번 촬영이 무사히 끝나길 바랐다.
“컷컷, 태화 씨. 조금 붙어 보면 어떨까? 벽 치기도 좀 하고.”
그러나 하늘을 현규의 편이 아니었고, 고양이는 호기심을 버리지 못했다.
***
‘이삿갓’에는 시도와 시우의 작전 타임 같은 장면이 많았다.
이유는 달라도 공통 목적을 위해 모인 만큼, 둘은 맞지 않는 부분에서 일어나는 불협화음을 자제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성향과 성격을 지녔고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촬영하는 파트도 그러했다.
어린 환자를 한시라도 빨리 고치고 싶어 하는 이시도와.
정치에 도움 되는 극적인 타이밍과 결과를 계산하는 유시우.
아이의 목숨보다 제 입지를 먼저 따지는 시우를 보며, 시도가 으르렁거리는 장면.
그런 장면에서 PD는 흔들다리 효과를 요구했다.
“······.”
태화는 굳이 연애선을 넣으려는 감독을 보고 침묵했다.
‘이삿갓’에는 연애가 필요 없었다.
아니, 없는 게 맞았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시도는 떠날 사람이었고 유시우는 남을 사람이었다.
둘이 동지애 비슷한 걸 형성하는 시기 또한 드라마의 최종 목표인 유남서와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당연히 현재의 그들은 애정은커녕 동료라는 의식도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대충 넘어가면 계속 시도해 보려 들 거 같고······.’
PD는 연애에 미련이 많아 보였다.
이번에 어영부영 넘어가면 점차 로맨스의 비중을 늘릴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캐릭터 간의 감정선이 바뀌게 되면 결말까지 가는 길도 꼬이지.’
거기까지 생각했던 태화는 잠시 시선을 내려 성효를 바라봤다.
복잡한 눈으로 힐끔거리던 눈이 우연치 않게 맞았다.
여전히 복잡함과 억울함, 안타까움이 섞인 눈빛이었다.
‘이쪽도 역지사지가 필요할 것 같고.’
태화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부드러우면서도 이상하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미소였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미소를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럼 되돌려야지.’
지금껏 얌전히 있던 태화도 이 개판에 참전을 선언했다.
끝
ⓒ 마늘소금
허용우 PD의 의도는 간단했다.
두근거릴 만한 장면을 넣어서 시청자들이 둘 사이의 호감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
실제 연인 관계로 발전하지 않더라도 ‘주식’이라 부를 수준의 케미를 보이면 시청자들이 묘한 기대를 품는 건 사실이다.
또한 그런 기대가 시청률을 유지시켜 주는 것도 맞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감정 흘림’은 작품 전체로 따졌을 땐 독이 됐다.
본론만 전해도 시간이 모자란 미니 시리즈에서, 연애선까지 다룰 여유가 없었으니까.
특히 의료나 법정 같은 전문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때는, 연애가 들어가는 순간 작품의 의도 자체가 바뀌는 일이 왕왕 있어 왔다.
‘어울리지도 않고.’
태화는 대본이나 지시에 제 입맛에 맞는 의견을 주장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대본의 경우 ‘견식’을 통해 괜찮은 작품을 선별해서 계약한 데다, 연차가 올라간 다음엔 들어오는 감독 수준도 올라갔기 때문에 까다롭게 굴 필요가 없었다.
가끔 의문이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은 감독과 적당한 의견 교환을 통해 수정했으니, 난폭한 애드리브로 현장을 곤란하게 할 이유를 못 느꼈다.
그렇게 유하게 지나갔던 태화도 오늘만큼은 참기 힘들었다.
크랭크 인 때부터 달라붙었던 노골적이고 호기심 어린 시선.
물과 기름처럼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 상대 배우.
작품 속이든 밖이든 연애로 엮어 보고 싶어 안달이 난 PD.
과거 ‘캐트시’ 당시 참았던 일들이 한 번에 욱하고 터진 것처럼, PD의 발언은 가늘게 이어지던 태화의 인내를 끊어 버렸다.
‘연애를 넣고 싶으면 넣으셔야지. 물론 넣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예의 바른 행동 덕에 착각하기 쉬우나, 태화는 연기에 대해서만큼은 고집이 심하고 외골수에 자부심도 강했다.
자본 문제로 PPL을 우겨 넣는 것도 아닌, 단순히 감독의 취향 때문에 작품의 분위기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알려 줘야지. 함부로 로맨스를 넣으면 못쓰게 될 수 있다는 걸.’
데뷔 초였다면 ‘이런 방식’이 불가능했으리라.
하지만 5년이란 시간 동안, 태화의 재능도 발전했다.
태화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스텝들은 재촬영 준비로 분주해졌다.
카메라는 각도를 조정했고 조명의 위치도 바뀌었다.
“성효 씨.”
“아, 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