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68
현재 인기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는 성효가 이런 곳에서 사적인 다툼이나 언쟁을 하게 되면 언론의 먹이가 되기 쉬우니까.
사이가 나빠졌어도 여전한 배려에 성효는 눈물이 났다.
“응······.”
성효는 내밀어 진 손을 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테레사가 그녀를 이끈 곳은 기다렸던 장소와 멀지 않은 한적한 카페였다.
시간대가 애매해서 그런지 카페의 2층에는 그녀들 말고 아무도 없었다.
“······오랜만이야.”
“그래.”
“잘······. 지냈지?”
성효는 테레사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으려 했다.
예전엔 둘 사이에 앉은 침묵이 편하기만 했었는데, 사이가 벌어진 탓인지 음악만 흐르는 현재가 답답했다.
“나야 잘 지냈지. 너도 잘 지내는 것 같더라.”
“아니야······!”
담담한 테레사의 발언에 성효는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성효는 현실이 너무나 괴로웠다.
대본을 받을 때마다 소속사에 속한 연기 선생들의 연기를 훔쳐 카메라에 옮기는 일도.
인정해주길 바랐던 선배가 무기질을 보듯 무심히 바라보는 것도.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허상으로 치부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전부 끔찍하고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든 건, 그런 자신에게 버팀목이 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진실이었다.
“난 너가 없어서 너무 힘들었어. 테레사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성효는 서러움의 눈물을 뚝뚝 흘리며 테레사에게 사과를 건넸다.
제발 이 사과를 받고 그녀가 자신의 절친으로 돌아오기를, 그래서 힘든 자신을 지지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곤란한 얼굴을 한 채 울지 말라며 눈물을 닦아줘야 할 테레사는 성효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곤란함이 섞인 표정은 예전과 같았으나 그게 전부였다.
“······오늘 널 찾은 건 할 말이 있어서야. 그냥 갈까도 생각했는데. 이대로면 좀 분해서.”
“테레사······?”
테레사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낀 성효는 멍한 표정으로 테레사를 바라봤다.
울고 질질 짜면 못 이긴 척 웃으며 달래주던 친구가 너무 멀고,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 성효를 내버려 둔 채, 테레사는 가방에서 한 뭉텅이의 종이를 꺼냈다.
‘Blue Hole -S. 6-’라 적힌 표지가 태양 아래 선명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나 이번에 드라마 들어가.”
“축, 축하해?”
“네가 평생 불가능할 거라 단언했던 주연이야.”
테레사는 시종일관 담담하게 자신의 상황을 고했다.
그녀는 자신이 선호되지 않는 배우 타입임을 알고 있었다.
여자 모델 평균보다 큰 키, 운동으로 다져진 중성적인 몸매, 그런 육체 잘 어울리는 서늘한 외모.
테레사의 연기를 확인하기도 전에, 일단 외형만 보고 고개를 젓는 감독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테레사는 자신의 소속사인 BGA와 상담했고, 미국 쪽 배역을 소개받았다.
그 중에는 미국에서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는 배우 심유미가 주연으로 출연 중인 드라마 ‘블루홀’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름 영어에 자신 있고 스쿠버 다이버 자격증까지 있는 터라 테레사는 망설임 없이 미국으로 날아가 오디션을 받았다.
그리고 시즌 6의 키 캐릭터인 칼리 장의 배역을 따냈다.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주인공 그룹에서 ‘새 피’에 해당하는 주연급 캐릭터였다.
“넌 내가 평생 조연만 전전하다가 끝날 거라 생각했겠지만. 나에게도 빛나고 싶은 욕심이 있고 꿈이 있어.”
“······.”
성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 위 대본의 글자가 이상하게 흔들렸다.
‘난 지금 이렇게 힘든데······.’
자신의 연기를 잃고 모방하기 급급해진 성효와 달리 테레사는 지금 가장 빛나는 순간을 보냈다.
아니, 테레사의 미래는 앞으로 더 빛날지 몰랐다.
‘테레사가······?’
성효는 과거 호흡을 맞췄던 테레사를 떠올렸다.
그녀가 무대 중앙을 휘어잡는 메인 보컬이라면 테레사는 그녀의 뒤를 채워주는 코러스였다.
그 차이는 명확했으며, 성효는 그것이 전부라 믿었다.
“······나, 나 네가 연기한 거 볼 수 있어?”
“······그럴 줄 알고 들고 왔어.”
테레사는 자신의 오디션 영상을 틀어 성효의 앞에 내밀었다.
영어로 이뤄지고 있는 테스트였으나 연기력을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믿기 힘들게도, 화면 속의 테레사는 빛났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역할을 찾은 덕인지 연기는 지금까지 맡았던 어느 역보다 자연스러웠고 힘이 넘쳤다.
“하, 하······.”
성효는 웃으면서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태화의 말을 듣고도 깨닫지 못했던 진실이 이제야 보였다.
처지가 뒤바뀌고서야, 자신이 ‘다른’게 아니라 ‘틀렸’었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해.”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도, 이 관계가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전부 알아차렸다.
***
그렇게 테레사와 완전히 끝나고 성효는 연습실에서 멍하니 앉아 자신의 연기를 찍은 영상들을 확인했다.
극단 시절 팬들이 찍었다는 영상부터 과거 출연한 영화, 드라마의 연기도 모조리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이삿갓’의 연기 장면을 확인했을 때, 성효는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며 핏발 선 눈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저게 뭐야.’
태화가 관능미를 내뿜으며 균형을 어그러트렸을 당시의 영상은 NG 장면으로 버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성효는 자신의 연기가 무너지기 전과 무너진 후로 정확하게 나눠서 볼 수 있었다.
‘······도와준 게 아니었어.’
그리고 태화의 연기를 보며 자신의 멍청함을 되새겼다.
태화는 그녀를 도와준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작품이 무너지지 않는 수준에서 적당히 흘렸을 뿐이다.
그는 성효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것은 연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난 저 꼴을 하고 돌아다녔고?’
본인의 한심함에 숨을 몰아쉬며 성효는 손톱을 깨물었다.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태화에게 화가 났다.
자신을 잡아주지 않은 사람에게, 화풀이라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웃기지 마······. 난 내 모습을 제대로 보인 적도 없어.’
한껏 웅크린 성효는 형형한 눈빛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에서 비친 불빛 때문에 그녀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끝
ⓒ 마늘소금
성효와 합을 맞추는 순간, 태화는 그녀의 변화를 눈치 챘다.
다른 사람의 냄새를 풍기던 연기가 180도 바뀌었으니 모르는 게 더 힘들었다.
“컷! 오, 성효씨 오늘 좋았어. 그래, 하면 되잖아?”
한 번에 오케이 사인을 내린 PD가 상기된 얼굴로 성효를 칭찬했다.
성효는 언제 자신이 슬럼프였냐는 듯 여유롭고 빈틈없는 미소로 겸양을 떨었고, 그 순간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가 부활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시도의 도움을 필요로 하던 유시우가 사라지고 당당하고 야심만만한 유시우가 돌아왔다.
어제만 해도 그녀의 추락을 비웃던 몇몇이 안면을 몰수하고 다가가 살가운 태도로 달콤한 말들을 뱉었다.
뻔뻔한 모습이었지만 원래 연예계에선 뻔뻔함도 덕목으로 쳤다.
‘무슨 일 있었나?’
작품이 끝날 때까지 방황할 줄 알았던 배우가 하루아침에 달라진 지라 태화는 의아하단 시선으로 성효를 응시했다.
정신을 차린 것은 나쁜 일이 아니었으나 너무 예상 밖의 변화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히 알겠네.’
그녀를 향하고 있던 시선이 순간적으로 마주쳤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태화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감정을 눈치 챘다.
아니,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잰 날 싫어해.’
그것은 태화가 회귀 전 극단에서 언제나 받아온 시선이었으며 가장 기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감정의 종류였으니까.
슬럼프를 극복한 성효는, 태화를 싫어했다.
솔직히 말하면 성효의 분노는 전혀 정당하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았다.
자기 아집으로 살다가, 고작 한번 꺾인 것으로 온실 속 화초처럼 제 연기를 잊어버리고, 본인의 연기를 잊어버린 뒤엔 다른 배우, 특히 태화의 보조로 간신히 호흡을 이어가고······.
누가 생각해도 성효는 태화에게 ‘슬럼프 동안 일정이 펑크 나지 않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절해야할 입장이었다.
태화에게 적의를 불태울 위치가 아니었단 의미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이성적이지 않으며, 자기애가 강한 인간일수록 본인의 실수나 잘못을 타인에게 돌리는 법이었다.
성효는 지금껏 지녀왔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테레사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증명한 진실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태화에게 감사하단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
그가 한 행동이 성효 자신을 위한 게 아님을 눈치 챘을 뿐더러, ‘왜 테레사가 떠나기 전에 더 자세히 알려주고 자신을 돕지 않았냐’라는 말도 안 되는 원망이 피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태화는 그녀의 정확한 속마음을 몰랐다.
단지 지금까지 억눌릴 수밖에 없던 연기력을 오롯이 태화에게 풀려 드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재미있겠네.’
그리고 재능 있는 후배의 외골수적인 적의는, 지루해진 태화의 흥미를 자극했다.
***
“······뭐지, 뭐가 저렇게 살벌해?”
“천배우랑 이태화씨 분위기가 원래 저랬나?”
“푸흐흐. PD님 표정 썩은 것 좀 봐.”
촬영 중이라 한가해진 스텝 몇몇이 한창 카메라가 돌고 있는 현장을 보며 소곤거렸다.
성효가 완전히 슬럼프를 극복한 뒤 유시우의 행동도 바뀌었다.
은근히 비치던 나약한 모습은 벗어던진 지 오래.
이젠 필요하면 뜨거운 불에 손을 넣어서라도 움켜쥘 줄 아는 야망 넘치는 의사 하나가 병원의 정점을 노리고 움직였다.
유시우의 성격이 갑자기 달라진 탓에 캐릭터 붕괴가 일어날 수도 있었으나, 정신을 차린 천성효는 약간의 독백을 추가하는 것으로 그 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초반이었다면 멀쩡한 대본 놔두고 애드리브로 진행한다고, 자기가 잘못해놓고 제작진과 배우들을 고생시킨다고 욕먹었으리라.
그러나 중반이 넘어가 작가의 대본이 점차 느려지면서, 온전한 대본이 아닌 캐릭터의 성격에 맞는 장면 묘사만 대충 오는 경우가 늘었다.
특히 중요하지 않고 중간을 채우는 장면일수록 그런 날림 현상이 두드러졌다.
성효는 그런 부분을 들먹이며 PD를 공략했다.
어차피 적당히 채울 장면이면 자신에게 기회를 달라고 설득했고, 그녀는 성공적으로 유시우의 초기 캐릭터를 부활시켰다.
그 결과 유시우는 이시도에게서 완벽히 독립했으며, 이시도도 더 이상 유시우를 감싸거나 돕지 않았다.
오히려 둘은 사상적으로 완벽히 대립했고, 아무리 로맨스를 좋아하는 시청자라도 연애의 연 자 하나 붙이지 못할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봐요. 이시도씨. 당신이 어린애들한테 정을 주던, 떡을 주던 난 상관 안 해. 하지만 내 앞길을 막아서면, 당신도 재미없을 줄 알아.”
이시도가 벌인 일을 동료 의사와 원장에게 사과한 유시우가 뒤에서 이시도를 압박하며 이를 가는 장면.
최종 목적에 한걸음 다가갈 때마다 살얼음판을 걷는 유시우와 달리, 처음 왔을 때와 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이시도는 유시우에게 애증의 대상이었다.
출세를 돕는 도구라 버릴 수가 없는데, 지속적으로 유시우의 이미지를 깎아먹었기 때문이다.
권력을 최우선으로 여길 뿐, 피도 눈물도 없는 악인은 아닌지라 유시우는 이시도의 행동을 은근히 묵인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에게 피해로 돌아오는 것은 참지 못했다.
체력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서인 만큼 외과는 여자 의사가 권력을 잡기 힘든 분야였고, 시우는 출세를 위해 많은 것을 바쳤다.
그 앞길을 막는 사람은 누구라도 용납하지 않았다.
천성효의 맹렬하다 못해 살기등등한 기백은 현장에 있는 이들을 오싹하게 만들 정도였다.
카메라를 잡은 이들마저 슬쩍 자신의 팔뚝을 쓸 만큼 북풍의 한설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