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GATE RAW novel - Chapter 404
화
*** 남아도 너무 남은 이야기
텀덤은 커다란 집무실에서 이런저런 결재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눈앞에 떠 있는 수많은 홀로그램들이 그의 결정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다.
“이거 해도 해도 끝이 없네. 이걸 그냥 콱!”
“콱 뭐요? 다음 말이 궁금하네요?”
“어? 어? 왔어?”
텀덤은 갑자기 들려온 아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왔죠. 그러니까 당신이 하는 말을 들은 거고. 그래서 뭐요? 그냥 콱, 그 다음이 궁금하다니까요?”
“아니, 그냥 열심히 해서 빨리 끝내고 퇴근을 해야겠다는 그런 소리였지. 무슨 다른 할 말이 있었겠어?”
언제나 아내를 대하는 것에선 순발력이 뛰어난 텀덤의 대응이 이번에도 빛을 발한다.
“흐응? 정말 믿어도 될까요?”
“하하하. 마샤, 당신이 나를 믿지 않으면 내가 무슨 낙으로 세상을 사나? 응? 믿어 믿으라고.”
마샤는 텀덤의 너스레를 살짝 가늘어진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한 번 더 용서해 준다는 듯이 얼굴을 밝게 고쳤다.
“어서 가요.”
“응? 어딜?”
“아니 이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오늘 우리 덤덤이 발표회가 있는 날이잖아요. 그리고 마야도 저녁에 콘서트가 있다고요. 그걸 설마 잊은 거예요?”
“아니 설마 내가 그걸 잊고 있었겠어? 하지만 아직 시간이… 뭐야 벌써 이렇게 된 거야?”
텀덤이 시간을 확인하곤 깜짝 놀란다. 그런 텀덤을 보며 마샤도 살짝 미안해진다. 시간을 잊을 정도로 일에 몰두하고 있었을 남편을 생각하면 안쓰러운 면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이다.
텀덤은 초기 교역 행성의 담당자가 된 이후로 줄곧 교역 행성의 행정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교역 행성의 행정청장은 다른 식민 행성의 총독과 거의 같은 위치다.
그러니 오늘날 교역 행성의 발달은 작은 주춧돌 하나도 텀덤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교역 행성에서 텀덤의 위상은 높았다.
오죽하면 교역 행성에서는 세이커보다 훨씬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물론 그런 평가를 받기까지 텀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는 곁에서 지켜보며 보조해온 마샤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제는 텀덤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테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은 것이 텀덤과 같은 자로이라 종족은 공명심이 많은 종족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서 유명해지는 것에서 삶의 충족감을 느끼는 종족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먀사도 텀덤과 짝을 이루면서 그러한 자로이라 족으로 변했으니 둘이 하나같이 지금의 지위를 버릴 생각은 눈꼽만큼도 하지 않는 것이다.
거기다가 텀덤이 세이커를 만나서 세이커와 영혼의 맹약을 하고 세이커의 추종자가 된 것도 모두 세이커의 가능성을 보고 했던 일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 보상으로 지금의 지위를 얻었고, 또 앞으로도 세이커의 위상이 높아지는 만큼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니 여전히 세이커 옆에 딱 붙어서 떨어질 생각도 없다.
아마도 교역 행성의 청장 자리를 내놓게 되면 세이커도 텀덤에게 다시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편하게 여생을 살도록 배려를 할지는 몰라도 권력이니 뭐니 하는 것을 쥐어 줄 사람은 아닌 것이다.
텀덤이나 마샤도 세이커의 성향을 이미 알고 있다.
세이커는 이미 권력 따위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텀덤으로선 세이커만한 언덕이 없다. 그저 붙어 있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서 만나기로 한 거야?”
“학교 앞에서요. 때 맞춰서 온다고 했어요.”
“괜히 사람들 부른 거 아냐? 우리 덤덤이 말고는 이번에 발표하는 아이도 없잖아.”
“무슨 덤덤이 보자고 모여요? 서로 얼굴이나 보고 친목을 다지자는 거죠. 사실 당신이 이렇게 시간을 내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에요? 그래서 양해를 구하고 오늘 날짜로 약속을 잡은 거잖아요. 마침 마야가 하는 콘서트가 점잖게 구경하면서 저녁도 먹을 수 있는 곳이니까 기회도 좋잖아요. 덤덤이야 제 발표 끝나고 나면 친구들하고 어울릴 테고 말이죠.”
“그 놈은 어쩌자고 그런 녀석과 맹약을 해서는 쯧, 모자란 놈.”
텀덤이 아들의 선택을 두고 살짝 불만을 토한다.
“세이커씨 같은 사람은 다시없어요. 덤덤의 선택도 나쁘지 않아요. 그 아이도 크면 충분히 한 자리 할 수 있는 아이잖아요. 능력이 좋아요.”
마샤는 아들 덤덤의 선택을 옹호했다. 사실 덤덤이 일찌감치 영혼의 짝으로 선택한 아이는 여러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아이였다. 당연히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고 노리는 사람도 많았다. 그걸 덤덤이 일찌감치 제 짝으로 찍어버린 것이다.
자로이라 종족의 특성 때문에 그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덤덤을 곁에 두고 있는데 어쩌면 그 아이가 장래 덤덤의 짝이 될지도 모른다고 텀텀과 마샤는 기대를 하는 중이다.
물론 꼭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자자, 서둘러 갑시다. 덤덤 녀석이 우리가 늦게 가면 또 얼마나 잔소리를 할지 모르니까. 지금도 조금 늦은 것 같은데 말이지.”
“그래요. 가요. 서두르면 늦지 않을 거예요. 아니면 공무 중이라고 하고 속도를 좀 높여도….”
“절대 안 되는 거 알지?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네네, 알았네요. 제가 잘못했네요.”
마샤는 텀덤의 질책에 찔끔해서 곧바로 사과했다.
공무 수행을 위해서 간혹 급하게 움직여야 할 때는 공무중이란 표시를 하고 규정 속도 이상으로 날아갈 수도 있다. 그래도 단속에 걸리지 않는 거다. 물론 텀덤도 행정청의 청장이니 그 정도는 언제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원칙을 어기지 않는 것은 텀덤의 철칙과 같다.
세이커와 함께 일을 할 때에는 잔머리도 잘 굴리고, 엉뚱한 일도 많이 벌이지만 텀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할 때에는 절대로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 또 텀덤이다. 그걸 아는 마샤가 일찌감치 포기하고 손을 든 것이다.
세이커는 오늘도 정신없이 바쁘다.
그는 파워와 스피릿, 메틸의 시달림을 피해서 이 행성, 저 행성으로 숨어 다니는 것이 일이다.
그들은 아직도 진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세이커에게서 진화의 열쇠를 찾기 위해서 노력중이다.
스피릿은 세이커가 영혼의 기억을 가지고 새로 태어난 것, 혹은 전생의 기억을 되살린 것에 흥미를 가지고 세이커와 대화를 하길 원한다. 하지만 세이커로선 자신의 영혼이 하나가 아니라 둘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만은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세이커는 스피릿에게 기억의 일부를 읽힌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스피릿 일당들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어쩌다보니 잠깐 방심을 해서 스피릿에게 전생에 대한 기억의 일부를 읽혀 버린 것인데 그 이후로 스피릿은 세이커에게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세이커에게 관심이 깉은 것은 메틸도 마찬가진데, 그 이유는 스피릿과는 전혀 달랐다.
메틸은 세이커의 몸 안에서 완성되어 가는 오러 로드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미 세이커의 것을 훔쳐 배워서 세이커 수준의 로드는 완성한 상태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며 그것을 연구하기 위해서 세이커를 귀찮게 군다. 메틸은 육체의 완성이 세이커의 오러 로드가 완성되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세이커가 유전자 변형이나 그 외의 어떤 시술을 거치지 않고도 육체를 다시 구성해 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메틸이 보기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워는 세이커가 사용하는 오러와 마나와 에테르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아니 그 세 가지의 에너지를 점차 하나로 합일해가고 있는 세이커의 변화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지금도 총량으로는 파워의 힘이 비교불가로 강하지만 세이커의 에너지는 점차 변화를 겪으면서 하나로 묶여 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법과 검술과 에테르 이용술이 하나로 묶여서 경계가 없어지면서 생긴 현상인데 파워는 그것이 어쩌면 우주 만물의 모든 에너지를 하나로 만드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어쨌거나 그 때문에 세이커는 시시때때로 세 사람의 호출을 받았는데 언제부턴가 세이커가 그들의 호출에 불응하고 종적을 감추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초반에는 번번이 잡혀서 곤욕을 치르곤 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세이커가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숨는 경우가 늘더니 이즈음에는 셋이 힘을 모아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서 스피릿과 파워, 메틸은 세이커가 자신들의 수준을 뛰어넘은 것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세이커가 정말 바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들 셋의 손에서 도망 다니는 것도 일이지만 새로운 행성들, 그 중에서도 인류가 살고 있거나 살 가능성이 있는 행성들을 찾느라고 그런 것이다.
모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우주 지도와 그 안에 있는 행성들에 대해서는 이미 파악이 끝났지만 아직 세이커가 확인하지 못한 우주는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넓다. 그러니 세이커가 바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세이커는 에테르 기반 생명체들이 다른 행성에 침입하여 결국 그 행성에 있는 생명들을 모두 멸종시키고 자신들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이 살기 위한 환경을 만드느라 다른 모든 생물들을 멸종시키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과한 처사라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에테르 기반 생명체들이 침입할 가능성이 있는 행성들을 찾아서 그 에테르 기반 생명체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만들어 주느라고 바쁜 것이다.
대기 중에 에테르가 쌓이기 시작하면 세이커가 만들어 놓은 안배가 살아나서 에테르 기반 생명체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주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세이커가 행성들을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오늘도 세이커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고 그가 준비한 안배를 베풀고 돌아서고 있었다.
“이런 한적하고 외진 곳에 저렇게 예쁜 행성이 있을 줄은 몰랐네. 참 보기가 좋은 행성이야. 푸른색이라니 멋지군. 뭐 저쪽에 있는 황색 행성도 나쁘진 않지만 저긴 이미 문명이 한번 피었다가 진 후라서 언제 또 피어날지 알 수가 없네? 저기도 준비를 해 두고 갈까? 아니다. 말자. 저긴 내가 준비를 해 둬도 시간의 힘을 견지지 못하겠군. 이쪽 행성이야 지금 당장이라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지만 저쪽은 뭐 아주 오래 그럴 가능성이 없으니까.”
세이커를 그렇게 중얼거리고 다시 한 번 푸른색의 행성을 보고는 게이트를 열고 모습을 감췄다.
그가 사라진 우주 공간에는 하나의 항성과 그로부터 세 번째에 있는 푸른색의 예쁜 행성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